싯타르타가 드디어 깨달음을 얻자,마귀가 마왕한테 달려와서 큰일났습니다 큰일 났습니다.마왕님 싯타르타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러자 마왕은 웃으면서"그럼나는 싯다르타의 종파를 만들면되지"라고 했다 진리는 바뀌지 않아도 진리를 전하는 것은 누구나 하고 진리의 뜻은 본인의 의도따라 왜곡할수있고 범죄로 사용할수있다
한국엔 수많은 교회가있다 다 예수님을 섬기는 교회라 자처하지만 그중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것은 드물다 대부분 뉴스 전면에 등장하고 신도들끼리 싸우고,목사 세습과 교회횡령 권력과 종교의 연루된 비리가 흔하다 이런 사태가 개신교 신도들이 줄어들고 있는현상에 한몫한다 본다,그러나 밀물들어왔다 썰물이 나가면 그속에 이미있는 작은교회안에서 신실한 신도들 남아있고 예수그리 스도를 변함없이 찬양한다
'개신교'의 신도가 줄어들어도 종교를 가지려 하는 사람은 꾸준할것이라 본다,왜냐하면 인간에게 있어 풀지못할 숙제는 죽음이라는 고통이고 삶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과학으로 설명못한다.막걸리 개똥철학에서"죽으면 끝이다"하지만 이말은 의미없이 하루 하루를 사는 사람의 말이고 다른 사람의 치열한 인생의 고난과 의미를 '무화'시키는 것이다.이 세상의 의미없는 삶은없다 그 의미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왜 고통을 느끼고 난 왜?이래야만 하는가에 물음에 항상 봉착한다 이것은 개개인의 주어진 환경과 성격의 따라 다르지만 고난과 고통은 피할길없다 거기서 자유로울려면 종교를 가지거나 하는게 보통이다
인간에게서 '종교'를 떼어 놓을수없다 인간은 무엇의 완결성을 지으려하는 '욕망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항상 초월자를 선망한다 그것은 '심리적인 요인'에서 나의 부족한 부분을 완전함으로 채우려는 욕망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인간이 '초월자'를 선망하는 것은 인간은 밭을 갈고 씨를부리고 기도하듯이 풍요로움과 혜택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씨를 뿌리는 것은 삶... 생명을 일구는 것이고 신'에게 은혜를 바라는 것이다
이것은 항상 있어왔던 것이고,민족과 종교를 떠나 어떤 형태든 다 존재했다 'CG 융 처럼 무의식은 하나로 인식된 경험이고 그것의 따라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무의식 저편에 신의 대한인식이 작동하고있다는 것이다 신'과 멀어저 홀로 떨어진 인간은'무의식'에서'창조주'와 '인간'의 다툼에서 인간은 창조주와 화해와 상처의 봉합을 갈망한다는 것이다,그게 무의식에 뿌리깊게 잡혀있다는 것이며 인간의 행위및 타자의 대한 행위에 있어 어떤 종교적 자기절제나 그 하위개념에서 도덕과 윤리에 크게영향을 준다는것이다
무의식을 평가 절하했던'프로이드'의 '종교적 무의식'은 아무런 연구대상도 아니였더 제자 였던 'CG융 은 스승'프로이트'의 여성의 '자궁'에만 그치는데,이에 여성의 자궁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무의식까지 도달할수있다 봤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자궁'으로 거술로 올라가는 '무의식'은 자칫 '종교'로 빠질수있고 과학에서 떠난다했다 이에 '언제 심리학이 과학이라 했던가?말했다 한다.
'무의식'에서 인간의 행위를 살펴보면 종교적인 행위가 많이 존재한다, 또한 거기서 자기의 본성도 드러난다 나의 의식은 타자와 나'의 관계에서 타자의 의식에 많이 치중하는데 무의식은 타자의 의식과는 무관하게 자기자신 안의 또다는 '자아'의 의식이 독자적으로 작동하는데있어 본인 본성이 드러난다,그것은 자기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이고 숨길수없는 것들이다 이런 형태 무의식 속에 종교적 형태,종교적 심성도 나타난다는 것이다 무교이거나 불교이거나 천주교이거나 말이다
인간이 '초월자'를 선망하는 것은 무의식의 문제다 '논리'에 대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의식에서의 논리는 사실로서의 증명의 문제에서 허위 이지만 '무의식'이 작동하는 인간에게서 초월자나 '부처'나 '창조주'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은 '의식'에 아닌 인간이란 존재 이전의 '어떤 형태'로 각인된 의식이 오늘 현재 의식으로 되어서 발현되기 때문이지 않았나 생각한다.나는 종교를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허위임을 증명하는것은 슬모없는 것이라 본다 인간은 영생을 추구한다 그러나 항간에 '죽음'을 이해하는 책들이 즐비하다 그러나 그런 책들도 인간이 죽음을 초월하려는 본능에서 출발하는 것들이다 죽음 앞에 인간은 담대해지기전에 솔직해저야 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