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라임오렌지나무... 단상>
요즘 노래 한 곡 덕에 <나의 라임오렌지나무>가 이야기가 많이 되고 있다. 나 역시 중학생 때 눈물 흘려가며 읽던 책이다. 삼십 대 중반에 일 때문에 이 책을 다시 보았고 흔히 그렇듯 완전히 새로운 책처럼 느껴졌다. 어린 시절 읽으면서 울고, 다시 책장을 돌려서 보고 그랬던 기억은 선명한데 왜 울었는지, 뭐가 감동적이었는지는 기억할 수 없었다.
두 번째 본 이 책은 전형적인 아동학대 사례였다. 아동학대가 왜 발생하는지, 어떻게 진전되는지, 피해자는 어떤 심리적 경험과 행동 문제를 보이는지 교과서처럼 묘사되고 있었다. 물론 작가인 바스콘셀로스가 정신의학 교과서를 읽고 쓴 것은 아닐 것이다. 자신의 자전적 경험이라고 밝힌 바 있는데, 현실을 충실히 그린 것이고 교과서 역시 그런 현실을 반영하다보니 비슷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 책이 감동을 준 이유는 학대 그 자체 때문은 아니다. 5살 꼬마 (만 5살이다) 제제가 지닌 독특한 매력, 가진 것 없고 즐길 것도 없는 궁핍한 상황에서 제제가 보여주는 빛나는 상상과 놀이가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특히 학대 자체가 아닌 학대를 넘어서는 희망과 사랑을 이야기하고 싶어했기에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불안을 견디고, 무너져가는 자신을 지키고, 더 나은 행동을 선택하기 위해 아이들은 힘이 필요하다. 꿈과 희망, 따뜻함과 사랑. 이것이 아이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원동력이다. 삶이 버티기 힘들 때면 아이들은 끊임없이 기댈 언덕을 찾는다. 그렇게 기댈 언덕이 한 군데만 있어도 아이는 살아낸다. 뭐 아이만 그러겠는가?주인공 제제는 오렌지나무 밍기뉴에 기대고, 둘째 누나인 글로리아 누나에게 기대고, 뽀르뚜까에게 기댄다. 제제가 기대는 이유는 학대와 모멸감 아래서 살아남기 위해서다.
학대받는 아이를 다룬 책이 흔히 그렇듯 이 책은 누군가에겐 매우 소중하다. 아주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 '인생의 책', '영혼의 주인공'이 되곤 한다.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를 읽는 사람들 중 일부는 제제에게 강렬하게 감정을 이입할 수밖에 없다. 제제가 느끼는 슬픔과 분노에 공감하고 제제의 희망에 동참한다. 고작 소설 속 인물이지만 결코 쉽게 잊지 못한다. 자신의 경험의 중요한 부분이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잘 알려진 작품의 캐릭터를 재해석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멋진 일이라 생각한다. 제제는 여러 측면에서 양면성을 띄고 있어 극적인데다 환상적인 특성도 가진 캐릭터라서 재해석 여지도 많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제제는 아동학대와 복합 트라우마의 희생자다. 가정에서는 학대받고 그런 학대에서 자신에게 희망을 갖게 해준 영웅 뽀르뚜까는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다. 소설 속 캐릭터지만 엄청난 희생자라서 뒤틀기가 부담스럽기 마련이다. 이런 캐릭터를 함부로 다루면 일이 복잡해지기 쉽다.
하지만 재해석은 독자의 자유고 그 속에서 캐릭터는 더 풍부해질 수 있다. 인간이란, 또 인생이란 복잡하다. 딱 떨어지는 말로 설명하기 곤란하다. 예전에 만화가 주호민 님의 트윗 글에서 읽었는데 무단 횡단을 하면서도 도로에 떨어진 쓰레기를 주워가기도 하는 것이 인간이다. 설명할 수 없는 일, 틀에 넣어 바라보기 힘든 사람은 너무나 많다. 그래서 인생은 다채롭고 사람들 사이에서 오해와 갈등은 불가피하다.
이번에 화제가 된 노래 가사. 나로서는 감흥이 적었다. 하지만 다른 재해석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처음 가사를 보고 작사가가 이 책을 정말 읽었을까 의심했다. 원작자가 만들어낸 제제와 제제의 상상 속 친구인 밍기뉴와는 거리가 너무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장난꾸러기 악동이지만 속마음만은 순수한 그런 전형적인 캐릭터를 작사가는 상상했구나 싶었다.
순수함과 악마성을 넘나드는 존재. 그런데 학대로 만들어진 악은 그런 귀여운 악과는 여러 면에서 차이가 크다. 게다가 밍기뉴는 제제의 일부다. 제제가 자기 내면에 담아두기 어려워 밖에 내놓고 의지하는 존재다. 스스로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아이들은 자기가 너무 약하거나 악하다고 생각하기에 의지할 대상은 상상이든 실제든 밖에 만들어둔다. 그렇게 만들어진 밍기뉴인데 그 밍기뉴가 제제에게 말하는 가사 내용은 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작사가는 이것은 소설 속 제제가 아니라 제제의 특정 성격만을 따서 묘사한 것이라고 해명했다고 한다. 그게 맞을 것이다. 그런데 제제가 워낙 특별한 인물이기에, 비록 소설 주인공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아주 중요한 인물이기에 논란을 사지 않았나싶다.
한편으로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가난도, 학대도, 구타도, 설움도 그닥 경험하지 않은 사람에게 제제는 어떻게 이해될까? 제제 수준의 경험을 하는 사람은 요즘은 드물다. (없지는 않다. 수 만명의 아이들이 있다.) 다만 그 정도는 아니어도 그 상황을 상상할 수 있는 기반 경험을 가진 사람은 더 많다. 그런데 그런 기반 경험도 없는 사람들에게 제제는 어떻게 이해될까? 좀 궁금하다.
생각을 이어가다 보니 또 이런 생각도 든다. 영화 '사도'도 엉뚱한 목적으로 아이들에게 보여준 부모도 있다던데... 이 책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예전에 넌 네가 얼마나 행복한 아이인줄 아냐는 내용의 책이 발간된 적이 있다. 제법 많이 팔려 속편도 발간되고 유사품도 나왔다. 저기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엔 이렇게 학교도 못 가고 고생하는 아이들이 있는데 너는 호강에 겨워서 지금 불평하는 거야. 이렇게 말하고 싶은 부모들의 심정을 잘 반영한 책이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도 그런 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넌 가난해서 크리스마스 선물을 못 받지도 않고 그렇다고 부모에게 혁대로 두들겨 맞지도 않잖아. 가질 것 다 갖고 사랑받으며 사는데 대체 뭐가 불만이야?' 이런 마음을 담아 읽히는 부모도 있지 않을까? 아니 그 시간에 차라리 공부를 한 자라도 더 시키려나?
집에 이 책이 있지만 아이들에게 읽어보라고 권하지는 않았었다. 그렇게 완성도가 높다고 느끼지 않아서다.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숨겨진 것보다 드러내놓고 표현하는 부분이 많은 책이라 생각했다. 그래도 한번 우리 아이들에게도 읽어보라고 해봐야겠다. 아이들의 감상이 실로 궁금하다.
서천석씨라고 현직 소아정신과 의사분이 올리셨던 글입니다.
서천석씨 트위터에도 올라가있습니다.
솔직히 지금 문제에서 가장 큰 부분이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의 내용을 잘 모르고 본인이 추상적으로 가진 이미지만 가진 분이 많은거 같습니다.
다섯살짜리 애가 부모한테 허리띠로 죽기 직전까지 맞아서 온몸이 멍투성이가 되고
의사가 자칫 잘못했으면 죽을수도 있었다 라고 하는게
제제가 받았던 고통입니다.
민국이한테 섹시하다 자막은 괜찮고 제제한테 섹시하다 하면 왜 난리냐고요?
송일국이 민국이를 허리띠로 죽도록 때려서 온몸에 피멍이 들게 만들어서
부모에게 조차 버림받은 느낌을 받은 민국이가 의지할 대상이 필요해서
상상속의 친구를 만들어서 그 상상속에서 노는걸 방송에 내보내며
섹시하다 라고 자막이 달리면요?
이 의사분도 의문을 제기하는게
책을 안 읽은 경우거나
책의 주인공의 상황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거나
공감능력이 부족한게 아니냐는 식의 얘기를 하세요
소아정신과 의사도 전형적인 교과서적인 아동학대 피해 아동이 보이는 일이라고 진단하는 내용입니다.
왜 이런 글을 올리냐면
아래에 어떤 분들이 마치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를 이런 내용이 전혀 아닌것처럼 말씀하시더군요
하도 어이가 없어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