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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3-29 14:42
콘스탄티누스는 미트라의 숭배자, 예수는 투표로 선출되었다.
 글쓴이 : 포플란
조회 : 1,993  

기독교인들은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로 개종한 최초의 황제이자,
기독교를 공인하여 로마를 기독교화 시키는데 앞장선 성자(聖者)로 알고 있을 겁니다.

그것은 그가 그동안유럽에서 핍박받던 기독교를 공인했기 때문이고, 그의 사후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었다는점 때문이죠.

그러나 니케아 공의회를 개최한 이후인 AD 326년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친아들 크리스푸스와 장인
막시미아누스을 살해 하고 그의 2번째 아내인 파우스타를 끓는 물 속에 넣어 죽이는등 폭정을 저지릅니다.

그는 바르바리(이집트를 제외한 북아프리카)의 왕들과 수천명의 부하들을 짐승들의 먹이로 내던졌습니다.
또한 배가 고파 음식물을 훔친 노예의 입에 납을 녹여 붓는 형벌과, 가난한 자는 자식을 팔아도 된다는
법을 정하기까지 했던 폭군중의 폭군 이었음을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겁니다.

콘스탄티누스가 등장할 당시는 로마의 황제는 6명이나 되었습니다.
당시 로마의 황제는 강력한 힘을 가진 황제가 아니고 프리켑스(제 1의시민)라 불렸으며,
민주주의와 다신교를 숭배하는 로마인의 자유로운 사상 때문에 시저 마저도 황제가 되려다
시민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공화파에게 암살 당하기 까지 했죠.

결국 시저의 양아들 옥타비우스는 황제라는 명칭을 포기하고 프리켑스라는 명칭을 사용했습니다.
(옥타비우스는 그 명칭보다는 존엄한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명칭을 자주 들었음)
그후 폭군으로 알려진 칼리큘라(=가이우스)와 네로 황제가 암살당한후, 군인 황제시대인 AD 69년에는
한 해동안 무려4명의 황제가 등장 하기도 했을 만큼 황제의 권위와 세습체계가 미약했으며,
누구든 힘있는 자가 황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 6명의 황제중에 프랑스와 브리튼의 로마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 부제는 마지막 라이벌인
막센티우스(Maxentius)와의 운명을 건 물비안(Mulvian) 다리에서 전투를 하기 전 꿈속에서 십
자가를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꿈에서 본대로 군사들의 방패에 십자가를 표시하도록 했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죠.
그 전투에서 승리한 후 기독교를 공인 하고, 사후 AD 392년에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가 됩니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인이 아닌 태양신, 즉 미트라의 숭배자였습니다.
그는 평생 동안 태양신 종교의 고위 성직자로 있었으며, 그의 통치하의 로마 국교는 태양신 숭배였습니다.

그의 통치는 태양의 제위(帝位)라고 불리웠으며, 태양신 솔 인빅투스(승리의 태양, 로마식 미트라)는
당시 제국 국기는 물론 화폐에 까지 등장 했고, 그가 발행한 화폐에는 "무적의 태양, 나의 보호자"라고
새기도록 했습니다.
심지어 그의 기념축전에서는 거대한 기둥탑을 세워, 미트라신과 자신의 모습을 조각케 했다고도 합니다.

그가 기독교로 개종한 것은 죽음에 임박한 후, 즉 사망하기 전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Eusebius)에 의해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즉, 그가 로마를 통치하고 있을 당시, 그리고 니케아 종교회의를 개최할때 까지도
그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던 것으로
쉽게 말해 그는 기독교를 진심으로 믿었던게 아니라 자신의 권력을 위해 기독교를 이용한 것입니다.

헨리 채드윅은 그의 저서 초대 교회사에서 콘스탄티누스에 관하여 이렇게 언급합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자기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무적 태양을 숭배했다.
그의 개종을 내적인 은혜의 체험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군사적인 문제였다.
그는 크리스트트교의 교리에 대해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324년 콘스탄티누스가 로마제국의 동부에서 그의 정적인 리키니우스를 이기고 정권을 장악
하자, 325년 니케아에서 최초로 종교회의를 개최하게 됩니다.

기존 상당수의 기독교 종파는 예수를 신으로 여기지 않았고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정통파 아리우스파와 미트라의 삼위일체 설을 받아들인 아타나시우스파로 갈려지게 됩니다.

결국 교회는 예수의 신성(神性) 문제를 둘러싸고 생겨난 아리우스 논쟁으로 분열의 위기에 놓이죠.

콘스탄티누스는 이 분쟁이 국가의 분열을 조장할 것을 걱정하여 니케아에서 종교회의를 개최하고
자신이 믿던 미트라의 삼위일체를 받아들인 아타나시우스파를 지지하며 참석자들을 압박해
결국 318명의 [투표]를 통해 아타나시우스파의 주장대로 예수는 신(神)으로 선출되게 됩니다.

또한 이 회의를 통해서 많은 미트라교의 의식이 기독교에 도입되게 됩니다.

대표적인게 부활절과 크리스마스인데, 지중해 국가인 로마에서 봄의 여신 축제 시기를(미트라의 부활절)
부활절로 결정 짓고 또한 미트라의 탄생일인 12월 25일을 예수의 탄생일로 탈바꿈 시킨 것이죠.

이밖에도, 부활절 계란이나 결혼 반지, 종교적인 행사, 촛불을 켜는 것, 가운 복장의 성가대, 죽은 자들에
대한 기도, 예배 도구로 쓰인 나무 토막이나 천조각, 방에 성수(聖水)를 뿌리는 것등의 의식이 도입됩니다.

그 후 에페소스에서 열린 3차 종교회의에서 마리아를 신으로 숭배할것을 투표로 결정하게 되며
4차 종교회의에서는 사탄과 원죄론이 주 논쟁거리가 됩니다.

'만일 야훼가 전지전능한 신이었다면 아담과 이브의 거역을 미리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아담의 타락은 천국에서 반란을 일으킨 천사 루시퍼 때문이다' 라는 주장이 제기 된 것지요.

사탄이 타락한 천사라는 이야기는 유대교의 창세기인 하가다서에 나오는데 가다서에는
신이 아담을 창조하자, 천사들이 아담을 시기하여 불로 죽이려 하지만 야훼가 그것을 막아
주었는데 그중에서도 사탄이라는 12장의 날개를 가진 천사가 아담을 가장 시기 하여 천사의
자리를 박탈당하고 천상에서 추방 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사탄이 타락한 천사이고, 이것이 인간을 죄짓게 했다는 외경 사상의 원죄론이 이 회의에서
투표로 결정됩니다.

그리고 예수의 십자가형이 인류의 죄를 대속한 것이라는 개념도 이 회의에서 결정을 짓게 되는데
즉, 예수가 피흘리고 죽은 것을, 동물의 제물을 바치는 구약적 제사와 연관지어 예수의 죽음을
대속적 제사의 의미로 결정지은 것이죠.

기독교는 결국 자신의 신을 희생 제물로 바친 입다의 딸을 받아먹는(사사기 11장) 수준인
고대 화산신들의 수준으로 스스로를 끌어내린 것입니다.
이는 고대의 미개한 의식에 예수를 집어넣어 아름답게 치장한것에 불과한거죠.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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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쩜 16-03-29 14:47
   
감사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포플란 16-03-29 15:04
   
재미있으셨다니 다행이네요. ^^
미우 16-03-29 14:49
   
수준으로 스스로를 끌어내린 것입니다에서...
끌어내리기 전의 수준은 높았다고 보시는 건가요?
     
사막늑대 16-03-29 14:52
   
9단계에서 10단계로 정도로 이해하시면 될듯한데
     
포플란 16-03-29 14:59
   
별로 논점도 아니고 논쟁거리도 안될만한 문장을

알면서 물어보는건지 진짜 몰라서 물어는건지 궁금하네요.

바로 밑줄에 '고대의 미개한 의식'이 의미하는바가 뭔지 모르시겠습니까?
          
미우 16-03-29 19:04
   
저 역시 유익하게 본문 읽었고
저 당시 저 쪽 역사 심도 깊게 파본 적도 없지만 조금 알던 지식도 세월에 녹슬어 물어본 겁니다.
바로 앞줄의 예(사사기)보다 크게 달라질 게 있어 더 떨어진 거라고 이해해야 할까하는 점을요.
물론 크게 중하지 않고 사소한 질문이라는 점은 이견 없습니다. 너무 뭐라하시면 호기심을 가진 것에 후회를 해야하겠네요.
sky하늘 16-03-29 15:37
   
그러합니다. 이건 역사적 사실로서 기독교 또한 여타 종교처럼 미신숭배이며 인간이 지어낸 신화라는걸 보여줍니다
그렇기때문에 이스라엘인을 비롯 중동인이 예수를 인정안하는것은 너무나 당연함
안타까운건 이 땅의 기독교신자는 이런 진실을 모르고 오늘도 신의 자식이라 믿으며 예수찬양한다는것.
아니, 개중에는 거짓이라는걸 느끼면서도 불안해서 뭔가에 의지하고자 하는 맘에 믿는자도 있을듯~
에치고의용 16-03-29 15:45
   
콘스탄티누스가 이렇게 망나니였군요.. 몰랐습니다. ㄷㄷ
Banff 16-03-29 15:49
   
재밌게 읽었습니다.  딴지지만, 수정이 필요한 부분이 있는데,

1. 콘스탄티누스시절은 4두정체제에 2명의 동방, 서방정제(Augustus, 공식황제)와 2명의 동방, 서방부제(Caesar, 부하황제?)의 복잡한 정치형태라.. 공식적으로는 정제만 따져서 2명의 황제로 보는지라.. 6명의 황제라고 하는지는 모르겠네요.  전임황제자리서 은퇴한 막시미아누스와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내전에 참전하긴 했지만 그들은 그냥 은퇴자. 

2. AD 69년은 군인황제시대가 아니라, 그냥 1년짜리 내전이 있었던 해인데, 한해 4명의 지방 총독들의 내전이고, 바로 그해 유대전쟁 휴전하고 로마진군한 베스파시아누스가 내전승리로 간단히 정리하고 이후 아들 둘이 황제하고 이어지는 로마 최전성기 오현제시대의 발판마련.  군인황제시대는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배경황제인 콤모두스황제 사후 디오클레티아누스의 4두정체제 성립때까지 수십년간 이어진 쿠데타에 쿠데타로 나라 개판치던 시절.

3. 막센티우스가 콘스탄티누스에게 패배한 다리는 로마 시내에서 바로 북쪽에 있는 관광지중에 하나인 영어로는 Milvian Bridge 또는 이탈리아어로 Ponte Milvio인데.. Mulvian은 오타이신듯.  콘스탄티누스가 이 전투를 승리해서 콜로세움옆에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이 생겼죠.  그냥 정치적으로 4두정 내전의 승리이지, 종교를 위한 전투는 아니었고요.

4. 콘스탄티누스는 엄밀히는 정치적이유로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것은 맞는데, 초기엔 콘스탄티누스는 아리우스파도 지지했던걸로 압니다. 그리고 서방부제였던 콘스탄티누스가 프랑스지역에 남았으면 니케아 공회도 없었겠죠. 내전 승리후 기독교가 많이 퍼져있던 터키지역으로 가서 종교적으로 그 지역에서 기독교를 믿던 가족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들은 합니다만.. 당시 동방지역에서는 니케아공회 전에도 아나타시우스파와 아리우스파가 서로를 싫어했고, 결국 니케아 공회때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정하고 아리우스는 암살. 정사로 알려진건 여기까지고, 신학적인 내용은 천주교 신부님들이 더 잘 아실테니 저는 여기까지.
     
포플란 16-03-29 16:38
   
1. 막시미아누스의 아들인 막센티우스가 정제의 아들이었던 자신은 제위에 오르지 못했는데
부제의 아들인 콘스탄티누스가 황제가 되자 불만을 품고 로마 원로원과 근위병단의 지지를
받으며 황제를 칭하며 봉기, 그의 아버지인 막시미아누스까지 이를 지원하고자 황제로 복귀하면서
6명의 황제가 생겨나게 됩니다. 즉 6명의 황제가 맞습니다.

2. AD 69년은 군인 황제 시대가 아닌 네 황제의 시대였네요.
오래전에 공부한거라 헷갈렸다 정도로 이해해 주시길...

3. '운명을 건' 이라는 표현은 권력 다툼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종교를 위한 전투라고 한 적은 없어요. 아래 문장에도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은
종교적 신념이 아닌 군사적 문제였다는 문장을 인용한것도 같은 이유 입니다.
밀비안은 오타는 아니고 기억의 오류. 그냥 실수 입니다... ㅠ.ㅠ

4. 번은 특별히 딴지거실만한 내용이 아닌것 같은데 왜 적으셨는지 모르겠네요.
'콘스탄티누스는 아리우스 분쟁이 국가의 분열을 조장할 것을 걱정하여
니케아에서 종교회의를 개최하고' 결국 같은 내용입니다.
긴 글 쓰다보니 함축적으로 쓴것 뿐입니다만 논지를 이해하는데 문제는 없을것 같아서
줄였을 뿐입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오래전에 공부한거라 헷갈린 부분은 좀 있습니다만,
명칭이나 표기 정도의 문제로 전체 논지나 문맥에 영향을 줄 정도의 큰 오류는 아닙니다.
자세하게 검색하지 않고 기억나는대로 적다보니 살짝 실수가 있었다 정도로
이해해 주셨으면 하네요.
TimeMaster 16-03-29 17:34
   
미트라교 자체가 출발은 불교의 '미륵'신앙에서 출발함. 이게 중동지역을 거치면서 중동특유의 유일신 사상으로 짬뽕이 되고 이집트까지 가서 태양신사상과 다시 짬뽕됨. 그랬던게 다시 중동에 역수입되며 중동과 그리스를 거쳐 로마제국까지 흘러가며 최종 완성되죠. 인도신화+중동신화+이집트신화+그리스신화에다가 최종적으로 로마신화까지 짬뽕되며 각 민족들 입맛에 맞게 마구 가공되었기때문에 우리가 흔히 아는 모태가되는 미륵신앙과는 아주 다른 종교가 되어버렸죠.

거기에 마지막으로 기독교와 다시 짬뽕되며 사실상 초기 기독교의 모태가 됨. 초기 기독교는 종교적인 체계를 세울때 제례형식이나 법전이나 옷차림등을 제정하며 대부분 로마인들에게 익숙한 미트라교를 거의 베끼다시피해 미트라교와 구분이 안갈정도로 같았다라는 기록까지 남아있을 정도니까요. 이때부터 일개 선지자였던 인간 예수는 미트라교의 영향을 받아 신의 반열에 올라가는 창작이 시작되죠. 뭐, 삼위일체라는 사상조차도 고대 인도등 동양에서 온 사상이었으니...
     
레종프렌치 16-03-29 22:04
   
불교의 미륵과 미트라, 마이트레야가 같은 신으로 보이지만,

불교는 미륵을 석가모니불의 제자쯤으로 여기고, 까마득한 미래의 장래불이지만, 본래의 미륵은 미트라와 같은 태양신이고 절대신이었음...

미륵과 미트라는 일맥상통하지만 오히려 태양신, 광명 숭배신앙에서 비롯된 동일한 절대신이 어느 지역에서는 미트라로, 다른 지역에서는 미륵으로 불리게 된 것으로 생각함...
레종프렌치 16-03-29 22:06
   
매우 유익한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