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들은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로 개종한 최초의 황제이자,
기독교를 공인하여 로마를 기독교화 시키는데 앞장선 성자(聖者)로 알고 있을 겁니다.
그것은 그가 그동안유럽에서 핍박받던 기독교를 공인했기 때문이고, 그의 사후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었다는점 때문이죠.
그러나 니케아 공의회를 개최한 이후인 AD 326년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친아들 크리스푸스와 장인
막시미아누스을 살해 하고 그의 2번째 아내인 파우스타를 끓는 물 속에 넣어 죽이는등 폭정을 저지릅니다.
그는 바르바리(이집트를 제외한 북아프리카)의 왕들과 수천명의 부하들을 짐승들의 먹이로 내던졌습니다.
또한 배가 고파 음식물을 훔친 노예의 입에 납을 녹여 붓는 형벌과, 가난한 자는 자식을 팔아도 된다는
법을 정하기까지 했던 폭군중의 폭군 이었음을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겁니다.
콘스탄티누스가 등장할 당시는 로마의 황제는 6명이나 되었습니다.
당시 로마의 황제는 강력한 힘을 가진 황제가 아니고 프리켑스(제 1의시민)라 불렸으며,
민주주의와 다신교를 숭배하는 로마인의 자유로운 사상 때문에 시저 마저도 황제가 되려다
시민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공화파에게 암살 당하기 까지 했죠.
결국 시저의 양아들 옥타비우스는 황제라는 명칭을 포기하고 프리켑스라는 명칭을 사용했습니다.
(옥타비우스는 그 명칭보다는 존엄한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명칭을 자주 들었음)
그후 폭군으로 알려진 칼리큘라(=가이우스)와 네로 황제가 암살당한후, 군인 황제시대인 AD 69년에는
한 해동안 무려4명의 황제가 등장 하기도 했을 만큼 황제의 권위와 세습체계가 미약했으며,
누구든 힘있는 자가 황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 6명의 황제중에 프랑스와 브리튼의 로마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 부제는 마지막 라이벌인
막센티우스(Maxentius)와의 운명을 건 물비안(Mulvian) 다리에서 전투를 하기 전 꿈속에서 십
자가를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꿈에서 본대로 군사들의 방패에 십자가를 표시하도록 했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죠.
그 전투에서 승리한 후 기독교를 공인 하고, 사후 AD 392년에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가 됩니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인이 아닌 태양신, 즉 미트라의 숭배자였습니다.
그는 평생 동안 태양신 종교의 고위 성직자로 있었으며, 그의 통치하의 로마 국교는 태양신 숭배였습니다.
그의 통치는 태양의 제위(帝位)라고 불리웠으며, 태양신 솔 인빅투스(승리의 태양, 로마식 미트라)는
당시 제국 국기는 물론 화폐에 까지 등장 했고, 그가 발행한 화폐에는 "무적의 태양, 나의 보호자"라고
새기도록 했습니다.
심지어 그의 기념축전에서는 거대한 기둥탑을 세워, 미트라신과 자신의 모습을 조각케 했다고도 합니다.
그가 기독교로 개종한 것은 죽음에 임박한 후, 즉 사망하기 전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Eusebius)에 의해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즉, 그가 로마를 통치하고 있을 당시, 그리고 니케아 종교회의를 개최할때 까지도
그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던 것으로
쉽게 말해 그는 기독교를 진심으로 믿었던게 아니라 자신의 권력을 위해 기독교를 이용한 것입니다.
헨리 채드윅은 그의 저서 초대 교회사에서 콘스탄티누스에 관하여 이렇게 언급합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자기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무적 태양을 숭배했다.
그의 개종을 내적인 은혜의 체험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군사적인 문제였다.
그는 크리스트트교의 교리에 대해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324년 콘스탄티누스가 로마제국의 동부에서 그의 정적인 리키니우스를 이기고 정권을 장악
하자, 325년 니케아에서 최초로 종교회의를 개최하게 됩니다.
기존 상당수의 기독교 종파는 예수를 신으로 여기지 않았고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정통파 아리우스파와 미트라의 삼위일체 설을 받아들인 아타나시우스파로 갈려지게 됩니다.
결국 교회는 예수의 신성(神性) 문제를 둘러싸고 생겨난 아리우스 논쟁으로 분열의 위기에 놓이죠.
콘스탄티누스는 이 분쟁이 국가의 분열을 조장할 것을 걱정하여 니케아에서 종교회의를 개최하고
자신이 믿던 미트라의 삼위일체를 받아들인 아타나시우스파를 지지하며 참석자들을 압박해
결국 318명의 [투표]를 통해 아타나시우스파의 주장대로 예수는 신(神)으로 선출되게 됩니다.
또한 이 회의를 통해서 많은 미트라교의 의식이 기독교에 도입되게 됩니다.
대표적인게 부활절과 크리스마스인데, 지중해 국가인 로마에서 봄의 여신 축제 시기를(미트라의 부활절)
부활절로 결정 짓고 또한 미트라의 탄생일인 12월 25일을 예수의 탄생일로 탈바꿈 시킨 것이죠.
이밖에도, 부활절 계란이나 결혼 반지, 종교적인 행사, 촛불을 켜는 것, 가운 복장의 성가대, 죽은 자들에
대한 기도, 예배 도구로 쓰인 나무 토막이나 천조각, 방에 성수(聖水)를 뿌리는 것등의 의식이 도입됩니다.
그 후 에페소스에서 열린 3차 종교회의에서 마리아를 신으로 숭배할것을 투표로 결정하게 되며
4차 종교회의에서는 사탄과 원죄론이 주 논쟁거리가 됩니다.
'만일 야훼가 전지전능한 신이었다면 아담과 이브의 거역을 미리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아담의 타락은 천국에서 반란을 일으킨 천사 루시퍼 때문이다' 라는 주장이 제기 된 것지요.
사탄이 타락한 천사라는 이야기는 유대교의 창세기인 하가다서에 나오는데 하가다서에는
신이 아담을 창조하자, 천사들이 아담을 시기하여 불로 죽이려 하지만 야훼가 그것을 막아
주었는데 그중에서도 사탄이라는 12장의 날개를 가진 천사가 아담을 가장 시기 하여 천사의
자리를 박탈당하고 천상에서 추방 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사탄이 타락한 천사이고, 이것이 인간을 죄짓게 했다는 외경 사상의 원죄론이 이 회의에서
투표로 결정됩니다.
그리고 예수의 십자가형이 인류의 죄를 대속한 것이라는 개념도 이 회의에서 결정을 짓게 되는데
즉, 예수가 피흘리고 죽은 것을, 동물의 제물을 바치는 구약적 제사와 연관지어 예수의 죽음을
대속적 제사의 의미로 결정지은 것이죠.
기독교는 결국 자신의 신을 희생 제물로 바친 입다의 딸을 받아먹는(사사기 11장) 수준인
고대 화산신들의 수준으로 스스로를 끌어내린 것입니다.
이는 고대의 미개한 의식에 예수를 집어넣어 아름답게 치장한것에 불과한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