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 타잔 박흥숙
* 무등산의 비극 “무등산 타잔 박흥숙”
“광주 무등산 무당 마을서 마을청년이 망치로 때려 4명 사망”
“집 헐리자 차례로 묶고 구덩이에 쳐 박아 쇠망치질”
- 당시 기사 中 -
1977년 4월20일, 광주 무등산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자신의 무허가 집이 철거되는 것에 격분한 21살의 청년 박흥숙이 철거반원 4명을 살해한 사건이었다.
사건 후 그는 “무등산 타잔”이라 불리며 평소 엽기적인 행각으로
살아온 인물로 보도된다.
* 구명회원들이 말하는 “인간 박흥숙”
* “무등산 타잔 박흥숙”여동생 박정자 인터뷰
* 박흥숙이 독학으로 공부를 하기 위해 녹음했던 육성 녹음
테잎
* 사건 현장을 목격한 오모씨의 생생한 목격담
* 도시빈민의 진정한 아픔은 무엇인가
* 박흥숙 자필로 쓴 최후 진술서 최초 공개!
* 생존철거반원 김모씨의 공권력의 개입에 대한 최초 철거
상황 고백
* 도시빈민 운동가였던 “김혜경, 이철용, 손학규”바라본 도시
빈민 실상
*「망치부대, 일용직 철거반원」과 유가족 인터뷰.
* 계속되는 강제철거 진정한 승자는 누구인가
오 갈 곳 없었던 도시빈민 살인자 박흥숙. 망치부대 일용직 철거반
원 사망자들. 도시빈민에게 정부는 대책 없는 철거정책을 시행했
고, 당시 강제 철거를 도맡았던 철거반원들은 일당을 받고 정부를
대표했다. 무허가 움막집의 주인 박흥숙은 살인자가 됐다.
도시빈민 박흥숙과 철거반원 4명의 사망자들 중 어느 쪽에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
1977년 4월20일의 살인 사건은 가해자인 박흥숙도 패(敗)하고, 피
해자 철거반원들도 패(敗)하고만 결국 진정한 승(勝)은 정부가 거
머쥔 것은 아니였을까?
2005년 지금도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계속되는 강제철거가
이루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