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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4-06 23:02
과학과 종교의 차이를 이해해야
 글쓴이 : abcd2014
조회 : 611  

과학과 종교가 만난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 수 있다. 과학문화를 말하기 위해서는 과학과 종교가 만나야 하지만, 과학이 종교의 세계에까지 미칠 수 있는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과학기술 시대를 전제할 때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과학문화를 논하지 않을 수 없다. 가장 어려운 과학문화의 한 측면을 말하는 것이다.

과학의 세계와 종교의 세계를 아예 분리시켜서 별개의 독립적 세계들로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이 있다. 과학자가 종교를 갖는다는 것은 두 가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오늘의 종교는 과학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과학의 도전을 받고 있다는 말을 하게 된다. 그런 과학의 도전을 종교가 제대로 받아들여서 대응할 수 없기 때문에 방어적으로 도피하는 경우가 있다. 과학과 종교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벽을 쌓고 문을 닫는다는 것이다. 그런 종교의 울타리 속에 갇혀있는 사람의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으며, 특히 젊은 세대의 사람들이 그렇게 갇혀있고자 하지 않는다는 것이 오늘날 모든 종교의 문제가 되고 있다.

그 반면, 과학과 종교의 만남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종교 신앙을 과학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이다. 과학자들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과학의 세계가 종교의 세계와 쉽게 연결될 수 있는 것처럼 종교의 과학화를 말하는 과학자들이 있다. 과학은 알지만 종교를 제대로 모르기 때문이다. 과학자로서 종교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종교와 과학의 만남을 이야기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아직 그런 과학자들이 없다. 오늘의 과학도들에게 종교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여 과학과 종교가 만나는 미래의 과학문화를 주도하게 해야 할 것이다.

과학자와 신학자의 어긋난 대화

우 선, 과학과 종교의 대화가 어려운 점을 보자. 과학자와 신학자가 TV에서 종교와 과학에 관한 대화를 하고 있었다. 과학자가 말했다. “지금의 우주 역사를 시작하게 한 대폭발(Big Bang) 이전에는 아무 것도 없는 無의 세계였습니다. 모든 것은 대폭발 이후에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신학자가 과학자의 말을 받아서 말했다. “대폭발은 구약성서에서 말하는 천지 창조의 사건입니다. 無의 세계에서 有의 세계로의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과학자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구약성서의 천지 창조를 우주 역사에서의 대폭발과 같은 것으로 보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TV 시청자들을 당혹하게 하고 민망하게 한 대화였다.

하느님에 의한 창조가 無의 세계에서 有의 세계로 바뀌는 사건이었다고 할때의 ‘無의 세계’는 대폭발 이전의 상태를 ‘無의 세계’라고 하는 것과 전혀 다른 것이다. 대폭발 이전에도 우주는 존재했다. 대폭발을 하게 한 에너지와 물질이 있었다. 다만, 형태와 색깔이 있는 개체들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 개체들의 존재가 없었다는 의미에서 無의 세계라고 한다는 말이다. 대폭발 이후의 우주에는 그런 개체화가 가능하게 되었으므로 有의 세계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 반면, 그야말로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無의 세계에서 이 우주가 존재하게 했다는 하느님의 창조에 대해, 과학자는 의미 있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었다. 과학에서는 에너지 불변의 법칙을 전제한다. 에너지 총량의 존재를 말하는 것이다. 그 에너지 총량이 하느님의 창조로 존재하게 되었다면, 그런 창조 작업이 필요로 하는 에너지는 어디서 왔느냐는 것이다. 창조 작업을 위해 필요한 에너지는 우주의 에너지 총량에 속하는, 그것과 같은 에너지일 수 없다. 그렇다면, 그 에너지의 존재를 설명해야 하며, 그 에너지가 존재하고 있는 세계는 無의 세계가 될 수 없다. 이런 과학자의 문제를 과학적 개념으로 해답할 수 있는 창조론은 없다.

과학에는 불가능이 없다?

또 다른 과학자의 말이 있다. “과학에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어떤 문제든 해결이 가능하고 해답이 가능합니다” 놀라운 주장이었다. 도대체 과학에는 불가능이 없다는 말을 그렇게 해도 되는 것인지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신학자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아마 마음속으로 과학자의 그런 망언을 부정해버렸을 것이다. 하느님의 전지전능을 과학 만능과 같은 것처럼 말한다는 것은 그냥 단순한 망언이라고 무시해버렸을 것이다. 혹시, 하느님의 과학에는 불가능이 없다는 뜻으로 말한 것일까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과학에 불가능이 없다면, 그것은 과학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전지전능 때문이다. 그런 하느님의 전지전능은 과학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 인간이 과학을 하는 것은 인간의 유한성 때문이다. 과학으로 그런 인간의 한계성에 도전할 수는 있지만, 과학이 그 한계성을 부정하게 할 수는 없다.

과학에는 불가능이 없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과학적 방법이 적용될 수 있는 과학적 문제의 영역 안에서만 말할 때 그렇다는 것이다. 과학적 방법의 적용을 허용하지 않는 문제는 과학의 문제가 될 수 없다. 과학의 영역에서 제외되어야 하기 때문에 과학적 해결이나 해답의 가능성조차 물을 수 없는 것이다. 과학자의 주장은 과학의 영역 안에서만 의미 있는 말이 된다는 것을 고려하면 과학에는 불가능이 없다는 말도 이해가 가능하다. 과학자가 물리학의 완성이나 과학적 탐구의 완성을 예상하는 것도 비슷한 의미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과학의 언어와 종교의 언어는 다르다

문 제는 과학의 언어와 종교의 언어가 다르다는데 있다. 과학의 영역과 종교의 영역이 다르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런데 일상 언어를 쓰면서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관한 대화를 하게 되면 과학언어에서의 중요한 개념들과 종교언어에서의 중요한 개념들을 적절하게 규정하고 제한하여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있다. 종교와 과학의 대화에 참여하고자 하는 과학자나 신학자라면 당연히 이런 영역 혼동의 문제를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 불행하게도 아직은 과학과 종교가 만나게 하는 우리의 과학문화가 그런 수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TV 대화에서도 그런 불상사가 일어났던 것이다.

과학과 종교에 관한 미래의 과학문화를 위해서는 오늘의 과학도들에게 적절한 종교교육을 제공해야 한다. 그러면서 종교계의 성직자들에게는 과학에 관한 기초 교육을 철저하게 요구해야 한다. 그런데, 성직자 교육에서 과학교육을 필수로 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른 인문사회계 교육에서도 과학교육을 필수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학도들에게 종교교육을 필수로 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우선 그런 종교교육의 필요성을 이해시키는 문제가 있다. 이공계 학생들에게 종교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는 사람이 없는 실정이다. 또, 과학도들이 필요로 하는 종교 교육이 어떤 내용의 것이며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인지가 문제시 된다. 과학도를 위한 종교교육의 필요성을 전제하면서 종교교육의 내용과 방법에 관한 몇 가지 제언을 해 보자.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기본

과 학도의 종교교육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과학적 진리와 종교적 진리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다. 과학에서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과 종교에서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르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학에서의 진리는 가설의 설정으로 시작하여 실험을 통한 검증을 거쳐서 점차로 확인되어가는 것이다. 종교에서의 진리는 가설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진리로 전해지고 진리로 가르치는 것을 받아들이는 믿음으로 시작된다. 그런 종교적 진리를 믿음으로써 종교적 체험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믿음이 체험으로 직접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진리에 대한 믿음은 종교적 실천을 요구한다. 수행의 실천, 고행의 실천, 사랑의 실천, 자비의 실천을 요구하게 된다. 그런 실천을 통하여 종교적 체험을 하게 되고, 비로소 믿음으로 받아들인 종교적 진리를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믿음이 더 강하게 되는 체험이라 할 수 있다.

종교적 실천으로 체험에 이르고, 체험으로 믿음을 확인하게 되는 것은 과학에서의 검증 방법과 유사하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험적 검증과 체험적 확인은 다르다. 과학에서의 실험은 객관성을 전제한다. 그러나 종교적 체험은 주관적이다. 진리를 믿는 마음을 전제하면서 그 마음으로 진리는 확인해가는 체험을 말한다. 주관적으로 체험되는 믿음의 확인이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실천적 행위를 통해서 볼 수 있는 수도자의 마음이다. 수행하는 마음, 고행하는 마음,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마음은 객관적인 행위로 표현되는 마음이다. 그런 마음이 성숙해가는 과정은 수도자의 얼굴 표정과 몸가짐에서도 나타나게 된다.

종교적 진리는 체험적 진리

종교적 진리는 체험적 진리이다. 믿음을 실천함으로써 체험으로 확인하게 되는 진리이다. 그런 종교적 진리를 가르치는 일과 그 진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실천하는 행위를 위해 종교는 교단화를 필요로 한다. 온갖 제도와 기능을 필요로 한다. 경전을 필요로 하고 종교적 의식을 필요로 한다. 종교적 체험을 도우기 위한 방편들이다. 그러나 종교적 체험이 그런 방편적 길을 제시해주는 종교교단 안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누구나 자신만의 길을 선택하여 종교적 체험에 이르는 것도 가능하다. 물론, 이미 존재하는 방편의 길을 따르지 않고 새로운 길을 개척해 본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우면서 위험 부담도 높을 것이다. 과학적 탐구에서 독자적인 패러다임을 개척하게 하는 일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교단이 역사적으로 마련하게 한 방편은 편리하고 유효한 것이지만, 그런 방편을 고정시키고 절대화하게 되면 문제가 생긴다. 수단이 되어야 할 방편이 목적으로 변하면서 종교적 진리의 체험 보다는 종교교단의 교세 확장에 치중하게 된다는 것이다. 문화적 특수성에 따라서, 역사의 시대 변화에 따라서 종교적 방편도 수용적으로 변화해야 하는데 그런 변화를 거부할 때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유럽의 성당과 교회가 텅텅 비어 있다는 사실이 말하는 바가 그런 문제일 수 있다. 우리나라의 불교와 기독교 교단들이 젊은 대학생 신도들을 모으지 못하는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도 그런 문제일 수 있다. 과학도의 종교 교육과 직접 관련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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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ndtlk 16-04-07 01:19
   
종교적 진리라는 것은 없습니다. 종교는 믿음의 체계이지 진리체계가 아닙니다.
믿음이란 것은 진리가 아니라 모순이 있음에도 믿는 심리적 상태이지 사물을 탐구하는 진리 탐구의 방법이 아닙니다. 어느 한 종교가 진리라 주장하면서 다른 종교도 인정하고 진리라 한다면 서로 다른 종교는 서로 다른 진리이고 서로 다른 진리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종교는 진리가 아니라하면 독선이고 그렇게 주장하는 종교도 진리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사실적 세계와 관계가 없는 허구의 가상적 세계입니다.

과학은 과학적 방법론에 의한 합리성 추구이고 아직도 불확실한 부분은 있지만 많은 부분은 확실히 증명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확실한 부분은 과학적 방법론으로 점점 더 줄어갈 것입니다.

한마디로 종교와 과학은 서로 관계가 없는 것이고 종교인이 실생활에서 성경을 근거로 역사,자연적 현상, 진화론, 과학 등등을 거론하는 것은 웃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인도 실생활을 살기 때문에 실생활을 함에 있어 이러한 구체적 사항들에 대해 판단해야 하는 것이고 성경에 근거하여 실생활을 판단하고 그것이 합리적이라 생각하면 모순이 생길 수 뿐이 없습니다. 단적인 예가 갈릴레오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대한 교황청의 제재와 루터의 저주입니다.
그런 의미로 가장 웃기는 단체가 창조과학회입니다.
이리저리 16-04-07 02:27
   
과학적 언어와 종교적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상호간에는 대화나 타협이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
일면으로는 참으로 공감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표현에 의아함을 느끼게 됩니다.
두 개체의 언어가 다르면 이해와 대화가 안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지구상의 모든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들은 영원히 언어적으로 단절되어야 마땅하지 않을까요.

제가 종교인들이 가끔 불합리하고 부당한 억지주장을 너무 심하게 하는걸 딴지거는 이유가 바로
이 게시글 속에 담겨있군요. 바로 객관성과 주관성의 차이. 종교계는 주관적 사실을 마치 객관적
근거가 있기라고 한 것처럼 포장해서 보편성을 부여하려 하는 시도를 꽤나 많이 하기 때문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