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집주름이 나타나 생업을 꾸리니 천 냥을 매매하고
백냥을 값으로 받으니(千민買賣百緡價) 동쪽 집 사람에게 서쪽 집을 가리킨다.”
-18세기 신택권의 성시전도시 중에서-
정조는 규장각 관리들에게 사흘간의 시간을 주고 도성의 모습을 묘사하라는
숙제를 내립니다.
이중에서 박제가, 신택권,김희순 등 다양한 사람들이 도성내의 생활상을 묘
사한 글들이 모인 일종의 합작품이 성시전도시임.(그림과 함께)
그중에서 눈여겨 볼 재미있는 기록중 하나가 바로 집주름이라는
오늘날의 부동산 중개업자에 해당하는 전문 직업인이 이미 18세기에 활동한
기록이 보인다는 점이죠.
그리고 정조에 앞서 이미 영조(1753년)에 윤성동이라는 사람이 집주름 노릇
을 생업으로 살아간다는 기록이 있어 이미 이전부터 이런 부동산업자들이
조선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걸 알 수 있음.
영조 80권, 29년(1753 계유 / 청 건륭(乾隆) 18년) 7월 5일(무오) 1번째기사
사족인 윤씨와 윤성동을 감죄하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윤성동은 고(故) 도위(都尉)의 자손으로서 윤성·최성을 봉사(奉事)한다고 일컬으면서 집주름[家儈] 노릇을 생업으로 삼았으니, 이런 무뢰배가 도둑의 무리에 들어가지 않았을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왕성(王城) 안에 머물러 둘 수 없으니, 추조(秋曹)로 하여금 엄중하게 감죄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집과 토지 등 부동산의 매매 임차 및 전당을 맡아보든 가쾌(집주름)들이
대한제국 시기에는 500여명이 활동했고 이들이 사용하던 사무실이 일명 복
덕방이라 불리면서 오늘날 부동산 중개업자들의 근현대적 전신상으로
18세기부터 활동을 하면서 조선의 근대화상이 이미 자체에서
싹트고 있음을 알 수 있죠.
조선후기의 여러 사회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그림으로는 저런 경기감영도
외에 도성내의 성시전도시 특히나 박제가의 기록은 상당히 생동감 있고
가감없는 묘사들이 주류를 이룹니다.
조선의 이런 자체 근대화상을 주도한 부분은 대동법의 시행을 통한
상공업의 활발해진 부분도 있지만 기존 양인 즉 일반 백성들 중에서도
전문 지식층이 점차 확대되면서 이들이 사대부와 일반 서민층간의
문화적 가교와 저변을 확대할 수 있었던 저력을 통해서 조선의
자체 발전적 근대상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죠.
이외에도 의료라는 것이 세계적으로 귀족층(사대부)에 몰린 시대상에서
점차 이들 중에서 서민 지식층들이 약방을 차리는 사람들이 증가하면서
경기 감영도를 보면 이미 조선 후기
의원과 약방이 분리된 오늘날 의학분업의 이른
선진 사회상들이 이미 나타나고 있음(오늘날 아프면 병원가고
약국에서 약타는게 당연한듯 보이지만 근대 유럽에서도 서민들이
이런 보건 의식수준과 생활상은 후대의 모습임) 그외
대형 상업적 작물 재배등이 나타나거나 혹은 오늘날 전문 대책여점
같은 세책점등에서 한글소설 대여부터 뒤에 넷댓글같은 감상문까지
한글의 문자 저변이 아녀자부터 일반 서민들까지 확대되면서 이런
근현대적 문화와 상업적 저변화는 더욱 확대되면서 나타나는 사회상도
상당히 신선하고 선진적 모습들이죠.(그외 특정 전문가나 사대부
이외에도 민화같은 회화들도 일반인들의 취미활동으로 나타나는 양상도
그렇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