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도 오래전에 읽은 거라 등장인물들의 이름까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만은 몇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생생합니다. 워낙 충격적인 내용이었으므로. 며칠간은 그 소설 생각이 머리에서 쉬이 떠나지 않았더랬죠.
국문학을 전공한 누님 덕분에 집에는 그나마 책들이 풍족했고 입대전 뒹굴다 지쳐 정 할 게 없으면 소설 위주로 읽던 저. 이십대 초반 한참 말초신경의 자극에 몸 달아하던 제게, 읽을 땐 묘한 쾌감을 읽은 후엔 충격과 의문을 동시에 안겨다 준 소설 '익명의 섬'(단편소설집에 수록된 여러 편 중 한편. 책 제목도 동일)
..................................................................................................................................................
외딴 섬에 발령 받은 20대 여교사. 정혼자가 있는 그녀에겐 여러모로 곤란하지만 어차피 한번은 지나야 할 통과의례. 배를 타고 내려 다시 버스를 타고 마을에 도착하자 마자 자신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기분 나쁜 시선의 한 남자. 알 수 없는 위압감에 한마디 항의도 못하고 애써 무시하는데.
도무지 알 수 없는 한 가지는, 아무 하는 일 없이 종일 앉아있거나 그저 이곳저곳 방황하며 돌아다니는 그에게 마을 아낙네들이 누구 하나 별다른 군말 없이 저녁밥을 지어준다는 것. 비루한 행색에 지능마저 심히 떨어져 보이는 그에게 말이다. 대체 왜일까?
그렇다고 당번(순서)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깨철(갑자기 이름이 기억나버렸음! 소름;;)이 본인이 가고싶은 집에 가면 그날은 그 집에서 무조건 저녁밥을 내주는 것. 누구나 "깨철아! 깨철아~" 하며 어렵지 않게 그를 하대했지만, 어느 누구도 그를 막 대하진 못했다. 심지어 남자들(남편들) 마저도.
그러던 어느날 그녀는 우연히 모든 충격적인 비밀을 알게 되고, 그로 부터 그리 오래지 않아 그녀 역시 결론적으로 보자면 마을 아낙, 아니 마을 전체와 묵시적 공범이 되고 만다.(해당 부분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합니다. 최근 일련의 몇몇 사건들과 유사-상반-배치되며 논란의 소지가 많아요. 직접 읽어보시길;;)
어느덧 시간이 흘러 도서지역 근무를 마치고 드디어 육지학교 발령을 받아 섬마을을 떠나는 날. 그녀가 이 섬에 도착하던 때와 마찬가지로 마을입구 구멍가게 앞(버스정류장) 평상에 퍼질러 앉아 더럽고 끈적한 눈빛을 보내고 있는 깨철.
그러나 이번엔 그 대상이 그녀가 아니다. 그녀의 후임으로 이곳에 보내진 또 한명의 20대 여교사. 예전의 자신처럼 다소 과장스럽게 경계하는 몸짓에 기분 나쁜 표정을 짓고 있지만 후임 역시 아무런 항의의 말을 하진 못한다.
그녀는 생각했다. '내가 알려줘야 하나? 이 마을의 룰과 질서, 그리고 깨철이의 존재의미에 대해서?' 하지만 이내 이런저런 걱정을 털어내고 묵묵히 어구로 가는 버스에 오른다. '그녀(후임)에게도 어쩜 '익명의 섬'이 필요해지는 날이 올 수도 있으니까' 라고 애써 스스로를 변명(?)하며.
.................................................................................................................................................
음, 다시 곱씹어 보니 상당 부분 비슷하며 또 완전히 다르기도 합니다. 결정적으로 사건(?)에 처해지는 입장은 무서울 정도로 흡사하지만 현상을 받아들이는 주체의 태도와 사후처리가 크게 상반된다고 할까? 이 부분이 혹자들에게 이번 사건에 대한 물타기로 비춰질까 저어하여 해당 부분을 생략할 수 밖에 없네요.
제목 '익명의 섬'이란 사실 이번 사건의 본질과는 완전히 상이합니다. 말그대로 '섬'이 주는 고립성을 '타인의 시선으로부터의 자유로움'으로 은유적 보장을 해주는데다, 한술 더 떠 '이름조차 없다(익명)'는 형용으로 개인/국가의 기록에서 조차 안전하리라는 이중의 상징적 보증을 해주는 셈.
단지 제가 이 소설을 떠올리게 된 건 다름 아니라 '취재'로 정의할 수 있는 부분 때문. 소설/드라마/영화 등 작가들은 장르를 막론하고 마치 기자처럼 취재활동을 통해서 작품의 아이디어/소재/전문지식 등을 얻죠. 이 소설이라고 예외겠습니까?
검색하면 바로 나오겠지만 이 소설이 아마 80년대 근처의 작품일 거라 기억되는데... 이미 그 시절에도 그런 일은 은밀히 자행되고 있었을지 모른다는 확신같은 가정이랄까? 이렇게 '섬'처럼 고립된 안전(?치안 부재 혹은 공동체의 침묵)이 공개적으로(?) 대놓고 보장되는 곳에서는 말이죠.
그게 이 글을 굳이 쓰도록 만들었네요.
#. 혹 게시판 성격에 맞지 않는다면 미리 사과의 말씀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