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인명사전에 의하면, 김활란은 1937년부터 친일 행위를 시작했다. 당시 조선총독부 사회교육과 주최 "가정의 개선과 부인교화운동의 촉진"을 목적으로 주최환 사회교화진흥간담회에 참석했다. 같은 해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전쟁협력을 위해 조직된 애국금차회의 발기인과 간사를 맡았으며 이듬해에는 총후보국(총 뒤에서 나라에 보답한다는 뜻으로 전쟁터에 나가지 않아도 그 전쟁의 뒷바라지를 해야 한다는 뜻. 그래서 학생은 공부하는 대신 소나무를 자르고 농부들은 농사를 지어 다 일본에 바침) 취지로 이화여자전문학교와 이화보육학교 학생 400명으로 이화애국자녀단을 결성하고 단장을 맡기도 했다.
1938년 11월 김활란은 정신대를 동원하기 위해 황해도 순회 강연을 했으며, 앞서 6월에는 세계 기독교 청년회 연합회에서 탈퇴하고 기독교 여성의 내선일체를 위해 일본 여자 기독교 청년연합회에 가맹할 것을 결의했다. 이 때 개회사를 한 내용이 이렇다. "비상시국에 기독교 여자 청년도 내선일체의 깃발 아래 모이지 아니하면 안 되겠으므로 시국을 재인식하는 동시에 황국신민으로서 앞날의 활동을 기약하는 의미에서 이러한 선택을 하였다."
이 밖에도 김활란은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사무국 훈련부 참사, 국민동원총진회 이사, 조선국민의용대 참여 의원 등 주도 면밀한 친일 행적을 보였다.
3년 전에는 이같은 김활란 초대총장의 친일행적에 이화여대 학생들이 문제를 제기하며 동상의 철거를 요구하는 포스트잇 쪽지를 붙이며 항의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