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영국 고등법원의 브렉시트 판결은 놀랄 만했다. 영국 정부가 리스본 조약 50조에 의거해 EU 탈퇴 협상을 시작하려면 국민투표와는 별도로 의회의 결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칫하면 의회의 결의에 따라 지난 6월의 국민투표가 뒤집어질 수도 있게 되었다. 당연히 브렉시트 지지파들은 ‘국민의 의지가 전복되었다’며 격분하고 있다. 물론 영국 의회가 ‘국민의 의지’를 전복할 가능성은 없다. 의회의 토론과 형식상 찬성결의를 요구할 뿐이라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어떻든 법치의 진면목이다. 프랑스 혁명을 광장의 폭력이라고 혹평했던 18세기 에드먼드 버크를 연상케 하는 실로 영국적 판결이다. 프랑스는 결국 버크가 예언한 대로 이후 100년 동안이나 혁명과 반혁명, 독재와 전쟁을 되풀이했다. 다시 100년을 건너뛰어 68혁명에 이르면 프랑스인에게 광장의 유혹은 거의 고질병이 되고 만다.
누구라도 광장에 서면 거침없이 내달리는 역사의 바람을 가슴 깊이 숨쉬게 된다. 최인훈은 ‘분수가 터지고 꽃이 피고 영웅들의 동상으로 치장된 곳’으로 ‘광장’을 정의했지만, 한편으로는 ‘폭동의 피가 흐른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4·19에서나 극단적으로는 5·18에 이르기까지 광장은 실로 숭고한 감정과 무자비한 폭력이 뒤엉켜 들었다. 광장은 그렇게 위험한 장소다. 대중의 환호 속에 마녀사냥이 집행되고, 집단의 열정은 종종 핏빛 충돌 에너지로 전환된다.
광장에 서면 우리는 처음 얼굴을 마주친 사람과도 깊은 동지애를 느끼고 목이 터져라 같은 구호를 외치며 정신의 확장과 양심의 약동을 느끼게 된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행진할 때면 벅차오르는 우정과 시민의식을 공유한다. 이제 시민이 지배자가 되었다는 기분에 사로잡히고, 새 세상을 만들어가는 역사의 최전선에 서 있다는 현장감으로 몸을 떨게 된다. 지도자의 비행을 규탄하며 그들의 도덕적 타락을 공격할 때라면 더욱 그렇다. 한때 으스대던 지도자를, 누구의 제지도 없이 멸시할 수 있는 자유는 근거 없는 우월감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후략>"
민중, 광장의 유혹 광장에 서면 새 세상 만드는 역사의 최전선에 있다는 현장감에 몸을 떤다
어느 정도 보수적 스탠스를 가진 사람(정규재)의 생각이니 100만시위에 반대된다는 이유로 폄하할 근거는 없다고 봅니다. 저 역시도 민중주의에 관해서는 벌레를 보는 듯한 혐오감으로 보고 있고 그것이 민주주의의 올바른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니 광장민주주의만이 정의다라는 생각에 동의를 하지 않을 뿐입니다. 어디까지나 바람직한 사회가 무엇인가에 관한 생각차이니까.
같은 박근혜 사건도 수단과 방법론에서는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라는 정도만 보길. 우리는 민주주의를 제도권 밖에서 민중들의 궐기에 의해서 피켓과 목소리에 의해서 주장되는 것이 숭고한 것이라고 배워왔을 뿐 제도권 내부에서 시정되는 민주정치 기능의 신뢰성은 아무도 따지지 않음. 우리는 직접 민중이 국가대사와 연결되어 있다라는 생각은 포퓰리즘과 쉽게 연결이 될 뿐임. 국민, 국민 거리면서 민중을 절대적 존재로 신격화하고 그것이 국가의 본질이라는 생각은 자연스러운 발상이 아닙니다. 단지 그렇게 교육받고 세뇌받았을 뿐이지.
왕실이 있고 하원의장이 상원에 불려다니는 어떤 나라를 놓고서도 민주주의가 아니다라고 말을 하는 사람이 없고 직접 대통령을 뽑지 않아도 민주주의가 아니다라고 말을 하는 사람이 없음. 단지 민주주의의 핵심이 어디에 있냐의 차이점이지. 우리는 민주주의를 민중, 국민 이러한 무정형의 대중과 동일시 하는 광장분위기를 민주주의라고 생각할 뿐임. 저는 광장에서 시위하고 하는 그런 걸 민주주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