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죽자 이 땅에서 독재는 사라지는듯 했습니다.
국가 비상사태를 빌미로 전두환이 다시 독재 정권을 열자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극단적인 반정부 성향을 지니는 인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광주 사태까지 겹치자 대학생들의 정부에 대한 회의는 그 깊이를 더해만 갔다.
이 사태를 주시하던 북한의 정보 집단은 이런 반정부 성향을 이용해 남남갈등을 조장하고 간첩으로도 활용하기 위해 모략해 '주체 사상'을 이들에게 주입시키기로 한다.
실제로 간첩들에 의해 간첩이 남한에서 활동하는 것처럼 점조직으로 활동하며 학생활동에 가담하는 학생들을 포섭해 주체사상을 가르치고 그 학생이 또한 점조직으로 움직이며 대학생들에게 이를 널리 파생시킨다.
그결과 80년대 후반에는 대학생들의 학생 운동 기저에 북의 '주체 사상'이 사상적 기반으로 작용하였고, 반정부 시위를 주도하며 학교 내에서도 끊임 없이 집회나 시위를 자행해 대학 학과 운영을 파행적으로 이끌게 한다.
이들의 학교 내외의 시위는 마치 무산계급에 의한 계급투쟁처럼, 혹은 사회주의가 말하는 그런 투쟁처럼 진행되었고 북에서는 간첩을 기르는 방식으로 고문을 이기는 법, 재판을 회피하는 법 등까지 이들에게 가르치게 됩니다.
날로 조직화가 심화되던 학생 운동은 독재의 청산으로 시들해졌고, 명분을 잃은 학생운동은 폭력 지향적, 반정부적으로 진행되며 97년 한양대에서 있었던 한총련 사태를 기점으로 거의 해산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그럼에도 지하에서 마치 교회에서 목회를 하듯 한총련 주체사상파들이 주체사상을 대를 이어 전파하는 행위는 멈추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주사파 학생들은 김일성의 죽음과 북한 실상에 대한 사실들이 밝혀지면서 거짓이었음을 깨닫고 자발적으로 주체사상을 폐기하지만 일부 극성 주사파들은 자신의 끝까지 남아 이른바 진보 진영의 정치적 브레인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사실 진보 세력들은 특징상 잘 집단화되지 못 합니다. 이해 충돌이 있을 경우 모였던 집단들로 해체되거나 분열되기 쉽습니다.
이를 이용해 주사파들은 자신들의 결집력을 동원해 진보 세력 기저에서 활동하며 진보 세력들이 결집하는데 역할하고 진보 세력이 결집하면 숨겨 왔던 발톱을 드러내 진보 집단을 주체 사상화 하려 합니다.
우리나라 진보 진영을 좀 먹는 이런 주사파들은 현재 극히 일부지만 이들이 끼치는 영향력은 결코 적다고 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