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댓글 단 분과 베트남 파병제의와 서독 파견 노동자들에 관련된
소모적 설전을 하게된걸 계기로
해당 사건에 대한 기록과 내용을 적어보려 합니다
역사학은 수학 같은 학문 처럼 정확히 정답이 있는 학문이 아니기에
역사 관련 이야기를 할 때는 항상 조심스럽습니다만
최근의 역사는 날짜기록이 정확한 편 이라
사건이 발생되어지는 해당년도를 기준으로 살짝 살만 붙여보겠습니다
디테일은 전혀 없으며 개인사관은 아주 최소화 시키겠습니다
참고로 저의 사관은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해 사리사욕으로 뭉쳐진
인물들로 해석을 하고 있으나
대한민국 대통령 이었던 역사적 사실은 부정하지 않으며
이들 또한 대한민국의 역사이며 발전이었단 사실은 인지하고 있습니다
글이 많이 부족하더라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954년 7월 이승만의 베트남 파병 제의에 대한 역사적배경]
6.25 한국전쟁은 1953년 7월 27일에
군사적으로 끝났지만
정치적으로 완전히 끝을 보기 위해 1954년 4월 다시 모여야 했습니다 (제네바 회담)
우리나라는 이 회담에 당시 외무부장관 변영태 가 단장으로 파견되어
졌으며
UN측은 남아공이 빠진 15개 참전국이 나왔고
공산측에서는 북한,중국,소련 총 3개국이 참석하였습니다
이 회담에서 또 다시 한반도의 통일 문제가 거론되어 집니다
우리측 대표인 변영태는 UN 감시
아래 인구비례 원칙에 따라
총선거를 실시하자, 그
전에 중공군은 모두 철수해야 한다 주장했으며
이에 미국은 강력한 지지를 보입니다
하지만 소련측 대표가 반발을 하며
UN은 미국의 따까리 인데 UN감시 라니? 안된다
중국역시 UN감시가
아닌 중립국 감시로 총선거를 해야한다 하며
한국측 대표의 주장을 반대합니다
한국도 중립국을 믿을수 없다며 두나라 주장을 수용하지 않았죠
애초 서로 살육전을 벌였던 양측이
총선거를 통해 평화통일을 하자는 구상부터가 현실성이 없었습니다
어쨋든 이렇다할 합의 없이 제네바 회담을 통해 한국전은 공식적으로
모두 끝이 나게 됩니다
이 의미 없는 제네바 회담을 언급한 이유는
베트남 때문 입니다
베트남은 1954년에
실시된 이 제네바 회담에서 분단이 되어집니다
왜 이리 되었는지 조금 더 위로 올라가보겠습니다
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을
일본이 점령하게 됩니다
점령명분은 이것이였죠
프랑스와 네덜란드는 우리 동맹국 즉 나치독일에게 망한 나라
앞으로 일본의 나와바리인 아시아 내 두 나라의 식민지는 일본이
다 먹겠스무니다
하지만 미국에 의해 일본은 패망하고
식민지에 있던 일본군들의 무장을 해제하기 위해
열강들이 차례로 들어가게 됩니다
한반도에선 38선을
기준으로 소련과 미국이 들어왔듯이
1945년 8월
베트남에서는 17도선을 기준으로 북에는 중국이 남에는 영국이 들어가게 됩니다
양국은 베트남에서의 일본군무장을 해제시킨 후
중국군(당시 장제스의
국민군)은 미련없이 중국으로 돌아갔지만
이에 따라 베트남 17도선
이북은 무주공산이 되어버립니다
엉? 장제스 매너남? 이라 생각하실수도 있는데
당시 장제스가 모택동의 팔로군 때문에
정신없었던게
베트남에 오래 주둔할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입니다
하지만 17선 이남
베트남에 들어온 영국군은
일본군무장해제 후 에도 점령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유는
식민지를 함부로 독립시킬수 없다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였고
원래 주인이던 프랑스한테 다시 돌려줘야 한다는 명분 이었는데
이런 명분이 나올수 있었던 이유는
영국이 프랑스를 이뻐라 해서 그런건 아니고
영국이 베트남을 독립시켜 주게 된다면
베트남 인접국가 이며 영국의 식민지들인 인도와 버마(미얀마)도
서로 독립하겠다 난리 칠게 분명했으니까요
암튼 이런 이유로 영국은 베트남 남부를 프랑스가 되찾으러 올
때까지 지켜줬습니다
반면 무주공산이 된 베트남 북부에서는 호찌민이 이끄는 공산군이 세력을 키워나가기 시작합니다
1946년 프랑스의 행보가 참 양아치 같았습니다
2차 세계대전 후 다른 나라들의 힘으로 겨우
나라를 되찾은 주제에
여전히 정신 못차리고
해외식민지들을 놓지 않으려 했으며
프랑스는 베트남 전역을 다시 무력을 점령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당시 오리올 프랑스대통령은
"프랑스를 살리기 위해선 우리 해외 식민지를
절대 잃어서는 안된다"
외치며 1946년
북베트남을 침공하게 됩니다
하지만 좀처럼 프랑스의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프랑스는 병력을 18만명이나
쏟아부었음에도
북베트남 하나를 제대로 공략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1954년
초 부터
프랑스군은 괴멸적인 패배를 거두게 됩니다
프랑스가 패배한 여러 이유 중 전체글과 상관있는 한가지 이유만
이야기 해보자면
1953년 7월
한국전이 휴전되면서
중공은 베트남을 본격적으로 도울수 있는 상황이 되어집니다
항미원조전쟁(한국전)에서 보여준 전술과 병력.병참물자를 지원하여
북베트남군에게 큰 힘을 안겨주게 되어지면서
프랑스는 급격히 수축되어지게 되며 결국
1954년 8월 1일 디엔비엔푸 요새 전투 이후
프랑스는 베트남에서 철수준비를 하게 됩니다
그동안 지켜보던 미국은 사실 프랑스의 북베트남침략이 맘에 안들었었죠
식민지를 침략하는걸 반대하는 미국~!
요게 미국이 순수하게 열강이 식민지를 침략하는걸 싫어해
그런게 아니라는걸 다들 아실거라 생각하고 이유는 생략합니다
하지만 프랑스의 패퇴로
1954년 북베트남에서 사실상 공산정권이 수립되었기
때문에
미국은 프랑스로부터 남베트남의 운명을 인수인계 받고
남베트남을 독립시켜
자본주의의 보루로 만들고자 하게 됩니다
여기서 나오는 이론이 그 유명한 "도미도 이론" 입니다
남베트남이 무너지면 인도차이나 전체가 무너진다!
그리하여 1954년
제네바 회담을 통해 17도선을 경계로
베트남은 남북으로 분단이 되어지게 됩니다
때문에 냉전이라는 20세기
열강의 대리전은
한반도에서 베트남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1954년 7월
이승만은 미국방문길에 오르게 됩니다
공항에서 기자들이 이승만의 덥수룩한 머리모습을 보고
각하 이발 하고 미국 가시지요
하지만 이승만은 고개를 저으며
이보게들 돈 얻으러 미국 가는데 멀끔하게 차리면 누가 주겠나
허름하게 보여야지...
(강준만,
한국현대사 산책 1950년대 편 2권 P196~197 발췌)
하지만 이승만의 작전은 전혀 먹혀들지 않게 됩니다
돈을 얻기 위한 방법이 너무 과격했기 때문에
오히려 역효과만 초래하고 말았던 겁니다
그는 미국 의원들 앞에서 연설을 하는데
여기서 3차대전을
촉구했기 때문입니다
연설문 중 일부를 적어보죠
시간적 여유가 없습네다
곧 소련은 미국을 파괴하려 할 것 입네다"
"그 전에 먼저 행동을 개시 하십시요 한반도가
답이 될겁네다"
"한국은 현재 20개 사단이 있고 앞으로도 20개 사단을 만들수 있습네다"
"미국은 단 1명의 보병을 투입하지 않아도 됩네다
미국의 공군과 해군의 힘만 바쳐주면 됩네다"
"미국이 중국의 해안을 봉쇄하면 중국의 교통망은
일대 혼란을 일으키게 될겁니다"
"그러면 미국은 지상군을 투입하지 않고 해,공군만으로 승리할수 있습네다"
"그렇게 중국 본토가 자유진영으로 돌아오게
되면
한국과 인도차이나 전쟁은 자동적으로 승리로
귀결 되어질 겁네다"
이어 이승만은 뉴욕타임즈 에도 기고를 통해 이렇게 밝힙니다
"베트남에2개 사단을 파견 할 뜻이 있습네다"
하지만 이에 대한 미국의 반응은 싸늘했습니다
특히 아이젠하워는 이렇게 코웃음 칩니다
"이승만의 연설을 듣고 어떤 의원들이 찬성을
했냐능?"
"전혀 없고 그런 사람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뉴욕타임즈는 이승만의 연설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이승만의 시나리오 대로 했다간 미국은 국제적으로
고립되는 물론
세계는 핵전쟁으로 치달을 것이다 그는 불행한
연설을 하고 말았다"
이상 이승만이 베트남에 2개
사단을 파병하겠다 라고 한 배경을 적어보았습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