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박정희는 미국이 장면내각에게 지원을 하려 했던
경제개발차관을 자신에게 지원해달라 부탁해보려 했습니다
박정희는 베트남으로 운을 띄웠으며
우리가 파병을 베트남에 해줄수 있다 케네디에게
말합니다
풀어쓰자면
"너 북베트남 땜에 스트레스 많이 받지? 우리가 가서 북베트남 쓸어버릴수도 있는데
너희가 지켜준 나라가 이제는 너희와 힘을
합쳐 새로운 공산당을 막는다
어때? 그림
좋~잖아 그치? 대신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 돈...헤헤"
하지만 케네디는 "아뇨
괜찮은데요 님은 관심 끄셈" 거절하죠
베트남 파병으로 차관문제를 수월하게 풀어내지 못하고
그냥 경제정책을 위한 차관(즉
장면내각에 지원하려 했던 겅제정책 차관)을
요청하지만
박정희의 경제정책이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차관 거절을 하게 됩니다
미국이 장면내각에게는 관련 경제정책에 대해 차관지급 예정이었는데
왜 박정희 에겐 거절을 했을까요?
여러가지 있겠지만 2개만
적자면
1. 박정희의 출신 즉 여순반란사건으로 인해 남로당 인물로 밝혀지면서 사형선고를 받은적이 있었죠
(당시 한국군 소령 / 정보참모)
자신의 친구들과 선후배등 300여명의 정보를 넘기고
남로당조직도를 불어 목숨은 건지게 됩니다 (만주군관학교 선배인 백선엽 힘이 컸죠)
이런 출신성분과 CIA 한국지부의 정보를 통해 미국은
박정희의 공산주의를 의심하게 되며
한동안은 박정희를 경계와 의심의 눈초리로
감시합니다
오죽하면5.16의 주체가 박정희 란걸 알고 김일성이가 좋아했을까요..
이런 미국의 의심을 종식시키기 위해 박정희는
극악의 반공정책을 펼치게 되며 이로 인해
수 많은 피해자분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2. 박정희의 경제정책에는 뉴딜과 더불어 중공업정책이
있습니다
60년대 초반 한국 현실에 중공업이 왠말이냐 경공업부터 육성해라
라는 미국 이였습니다
장면내각에선 국책사업과 더불어 경공업산업을
위한 공장설립에 주목적을 두고 있어
미국의 코드에 맞아 차관지원을 약속했던
것 이였습니다
하지만 박정희와 경제정책코드가 안맞으니
차관은 없던걸로 되었던거죠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가자면
박정희의 최초 베트남파병 제의는 1961년 케네디와 정상회담 이였습니다
이걸 가지고 통킹만 사건이 언제인데 61년에 파병을 한단 소릴 하냐 하는 댓글 단 분이 그러시는데
베트남은 열강의 대상만 바뀔분이지
1946년 프랑스침공 부터 1979년 중공침략저지 까지 30년 넘게 계속 전쟁 중 이였습니다
어쨋든
미국에 차관을 거절당한 박정희정부? (에잇 그냥 박정희정부로 적을게요) 는
다음으로 서독을 찾아가게 됩니다
박정희의 존경하는 스승님이 있고 잘난 친구들이 있는 일본이 아니고
왜 서독일까요?
일본은 아직 국교가 수립되기 전 이라
공적인 개발자금을 빌리는게 부담되었기 때문입니다
서독을 다음 차관협상대상으로 삼은 이유는
1. 당시 동독이 북한에 경제적으로 많은 지원을
하고 있었음
2. 같은 분단국가의 정서이용
3. 라인강의 기적으로 인한 경제부흥기 (당시 세계 3위의 경제대국)
박정희정부의 차관교섭 사절단은1961년 11월 서독을 찾아가
4천만달러의 차관을 요구하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 국제신용도가 낮았던 우리에게 서독은 지급보증을 요청하게
되죠
특별하게 지급보증 방법을 만들수 없던 상황에
우리사절단의 일원인 백영훈 교수가 한가지 제안을 하게 됩니다
"우리나라 노동자를 서독에 보내 일을 시키고
서독은 차관의 지급보증으로
우리 노동자들의 급여를 담보로 하면 어떨까요"
서독정부는 지급보증 방법에 응하였으며
한국측에 광부와 간호사를 요청하게 됩니다
1962년 서독과 경제협력의정서가 체결되어 최종적으로
차관제공 합의가 되어지며
1964년 박정희내외의 독일 방문간 서독과 경제협력협정이
체결되어지게 됩니다
이 협정 체결 후 차관금액 중1차분인 약 1억 6천만 마르크(당시 서독통화)를 받게 됩니다
즉 박정희 때 최초 차관협상은1961년 이지만
차관금액등의 세부조항 조율은1962년에
경제협력의정서로 정리되었고
이를 시작으로 1963년
말 1차 노동자 파견이 있었으며
1964년 박정희 내외의 서독방문을 하여 체결한
경제협력협정으로
전체 차관금액 중 1차
지급분을 받게 됩니다
1963년 부터 정부는 서독으로 파견되는 광부와
간호사들을
대대적으로 모집합니다
그런데 경쟁률이 엄청났습니다
당시 일자리가 없어 허덕이던 당시
국내 임금의 7~8배를
준다는 말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렸던 겁니다
광부는 5천명 모집에 4만명 이상 몰려들었고
간호사는 2천명 모집에 2만명 이상 몰려들었습니다
대략 10 : 1 의
경쟁률 이었습니다
참고로 64년도 1인당 소득은
서독이 1,773달러 / 한국은 77달러 였습니다
1964년 1인당
소득
한국 노동자들의 임금은
현지 서독인에 비해 1/3 밖에
안되지만
우리에겐 반년치 임금보다 많았던게 현실이었습니다
정부는 모집 대상자를 2년
이상의 광부경력을 가진 사람으로 제한했지만
실제로는 육체노동이라고는 전혀 해보지 않았던
대졸자들이 가짜 서류를 만들어와 대거 끼어들기도 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