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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2-24 10:31
이것도 국보라는데 백제 금동관이라는데
 글쓴이 : 레옹레옹
조회 : 1,987  

금이 예전에도 비싸서 그랬던가 아니면 너무 금이 연하니 동을 섞은 건지...
금동관.jpg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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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자 14-02-24 10:33
   
금 자체는 너무 연성이 커서 순금으로 제작하기엔 제약이 크죠.
뭐꼬이떡밥 14-02-24 10:35
   
금관이 무거우면 안되겠죠.
그렇다고 모양이 후져보일수도 없을테고요
금을 얇게 만들면 상당히 약하지 않을까요?
금반지를 이빨로 앙~ 깨물면 자국이 날 정도니까요
순금으로
저렇게 얇게 만든다면 제 생각으로 상당히 제작후 변형이 올거 같은데요
떡국 14-02-24 10:44
   
제가 알기론, 삼국시대 관의 소재는 지위에 따라서 달랐던 것 같아요.
왕은 순금 (신라금관 생각해 보시면 됨)
그 밑에는 금동관 (좌평급?)
또 그 밑에는 은관 (예를 들어 초기 신라한테 잡아먹혀 신하가 된 지역 영주의 경우)
이런 식으로요.

금동관은 동에 금을 섞은게 아니고, 동판으로 만든 다음 금을 도금한 거에요. 
도금방법은 요즘처럼 전기도금 공법이 없었으므로,
수은에 금가루를 녹인 액체를 바르는 방식으로 알고 있는데
수은을 쓰다 보니 아무래도 장인의 건강이 안 좋았을 듯..

순금으로 만든 금관의 경우에는 강도가 약하므로 아마 비단 같은걸로 만든
모자(?)를 뼈대삼아 의지해서 함께 조립해 둔 형태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리고 저런 관은 평소에는 잘 안 쓰고, 제례 행사 같은때 썼겠죠.
가상드리 14-02-24 10:48
   
이름 그대로 금동관(금과 동이 섞인 관)이죠.
동으로 만들고 금으로 도금한 걸로 보이네요.
순금은 구리보다 2배나 무거워서 순금으로 만들면 목부러지니까 구리로 만들고 도금했나 봅니다.
LetsBe 14-02-24 10:50
   
저 모양대로 24K 순금으로 만들었다면 아마 유리관에 모셔두고 감상만 해야 했을거임...실제 사용은 못함.
어디 부서질까 무서워서 만지기나 하겠어요^
꿈꾸는자 14-02-24 11:04
   
참 무령왕릉 발견안됐으면 백제의 왕관,장신구,무덤의 여러 부장품등 백제 최고의 유물들을 우린 상상속으로만 그려야 했겠죠..
기적처럼 도굴안되고 발굴된 무령왕릉,마치 투탄카멘왕릉도 도굴을 피하고 기적처럼 살아난것처럼 우리문화를 더욱 찬란하게 만들었죠..
꿈꾸는자 14-02-24 11:06
   
뭐 고구려것은 남아있는게 없지만 그래도 고분벽화라도 많이 남아서 다행이고..
몇년전에 중국에서 고구려 미천왕릉인가가 발견됐죠..도굴안된상태로..전부 중국당국이 완전히 발굴하고 내용은 일절 공개되지 않더군요..모든유물과 함께..
고구려의 많은 최고위유물들을 알수있는 기회인데..안타깝죠..
스토리 14-02-24 11:19
   
원래 저런 도구들은 ..순금으로 만들수 없습니다...
KilLoB 14-02-24 11:21
   
이게.. 일본서만 발견된건데. 백제의 중앙집권화의 증거품이자, 당시 왜의 발견된 그 지역 또한 백제의 지방국이란 증거입니다. 중앙국에서 지방왕에 내리는 인정한다는 책봉?하사품입니다. 한국내에서도 많이 뿌렸거고,아마 찾아보면 발견이 될수밖에 없을것. 백제 동성왕 영산강유역 무력시위(여기는 훗날 청해진서도 알수있듯이... 스스로 교역을 통해 힘을 쌓고, 스스로 중국남조에 전쟁에 참여해서 전공을 거두고, 백제왕을 압박하는등. 기세 등등했던 아파트 고분군 지역-아마 이들중 동성왕에 쫓겨나 일본에 가서 왕이 되던 사람도 있었을수 있슴-그럴 가능성이 있슴. 당시 규슈지역 야마토세력이 본토로 쫓겨가는 과정을 보면...)  이후 담로제가 중앙집권화하는과정.. 그전엔 철 교역 잇권을 의미하는 칠지도또한 일종의 인증개념.

칠지도에 언급된 주는 사람인 "엄지(엄지손가락 할때 그 엄지=지방국 왕인 "지"들중 최고)"= 최고왕(여기선 태자로 나오는=그 이유는 실제 왕이라도 왕이라 칭할수 없었기때문-왜?지방국 왕녀와 결혼을 못했기 때문=전체 시스템서 추인이 안되기 대문-그게 훗날 번거로우니. 중국에 책봉을 요구하기도 하고, 의자왕 3천궁녀식으로 중앙집권화 변형되는것,훗날 고려왕건의 결혼정책도 그 연장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