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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11-18 14:35
포스텍은 멀쩡했다, 基本의 힘
 글쓴이 : 넷우익증오
조회 : 3,420  

31년 됐는데 지진 피해 없어… 이 건물이 던지는 메시지] 
"원칙에 철저했던 학교 건물, 컵 하나 안 떨어질 정도"

박태준 前회장, 1985년 "강진 견디는 1000년 갈 학교 짓자"
내진 설계 기준 없던 시절, 건축 표준 지키며 원칙대로 공사

새롭게 정의하는 혁신적인 투자전략을 경험해보세요

<iframe vspace="0" hspace="0" marginwidth="0" marginheight="0" frameborder="0" scrolling="no" src="about:blank" style="width: 640px; height: 337px; margin: 0px !important; padding: 0px !important; border-width: 0px !important; border-style: initial !important"></iframe>
- 박태준 "수백년 한번 올 지진도 대비"
주변선 "호들갑 떤다" 했지만 매일 공사현장 찾아 진두지휘
97년에 지은 교내 건물보다 튼튼

- 15㎝ 차이가 가른 건물의 운명
31년전 지은 포스텍 기숙사, 외벽 두께 30㎝ 튼튼하게 지어
포항 지진에 갈라지고 기울어진 대성아파트 외벽은 15㎝ 불과

지난 15일 발생한 포항 강진으로 다세대 주택 기둥이 엿가락처럼 휘고, 아파트가 '피사의 사탑'처럼 한쪽으로 기울었다. 잇따른 강진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선 내진(耐震) 설계를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하지만 31년 전 내진 설계를 하지 않고도 이번 지진을 견딘 건물이 있다. 포항시 남구 지곡동의 포스텍(포항공과대학교)이다. 1986년 완공한 포스텍 건물 35개 동(棟)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진앙과의 거리(약 11㎞)가 상대적으로 멀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포항시청에 따르면 이번 지진으로 포스텍이 있는 포항 남구에서만 230여건의 피해 신고가 접수됐다. 포스텍에서 1㎞ 떨어진 대잠동의 27년 된 한 5층 아파트에선 화장실 천장이 무너져내렸다. 포스텍은 작년 9월 발생한 경주 강진 때도 아무런 피해를 보지 않았다. 당시에도 진앙과의 거리는 30㎞ 안팎이었다.

지진 견딘 포스텍 - 1986년에 지어진 포스텍 본관 일대. 포스텍 설립자인 고(故) 박태준 포스코 전 회장은 건설 현장에서 “우리나라에도 언제든 지진이 올 수 있다. 강진에 견디는 천년 갈 학교를 지으라”고 여러 번 강조했다. 국내엔 내진 설계 기준도 없던 때였다. 박 전 회장의 고집 덕분에 당시 지은 35개동은 이번 지진 피해를 전혀 입지 않았다.
지진 견딘 포스텍 - 1986년에 지어진 포스텍 본관 일대. 포스텍 설립자인 고(故) 박태준 포스코 전 회장은 건설 현장에서 “우리나라에도 언제든 지진이 올 수 있다. 강진에 견디는 천년 갈 학교를 지으라”고 여러 번 강조했다. 국내엔 내진 설계 기준도 없던 때였다. 박 전 회장의 고집 덕분에 당시 지은 35개동은 이번 지진 피해를 전혀 입지 않았다. /남강호 기자

포스텍이 강진에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캠퍼스 시공을 진두지휘한 박태준 포스코 전 회장의 원칙 시공과 안전한 건물을 짓겠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이번에 일부 천장 내장재가 덜렁거린 피해를 본 포스텍 건물은 오히려 1997년 지은 것이었다. 포스텍 설립 때 건설본부장이었던 이대공(76) 애린복지재단 이사장은 "박 전 회장은 30여년 전 이미 지진에 대비하고 1000년을 견딜 수 있는 건물을 지으라고 했다"고 말했다.

건축 원칙에 충실한 시공

17일 포스텍을 찾아 당시 설계도면을 살펴봤다. 본관 강의동 중 하나인 5층짜리 '무은재기념관' 도면엔 '기둥의 폭은 40㎝로 하고 지름 1㎝짜리 횡근을 30㎝ 간격으로 둘러라'고 적혀 있었다. 이런 기둥 120여개가 건물 하중을 버틴다. 기둥 설계의 기본은 가로로 놓는 철근(횡근)의 간격이 기둥 폭보다 촘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원칙을 분명히 명기하고 지킨 것이다.

이번 지진에 부러진 장성동 필로티(1층을 주차장으로 만들고 2층부터 건물이 올라가는 것) 공법 건물은 기둥의 폭은 30㎝인데 횡근 간격은 이보다 넓은 32~33㎝였다. 원칙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포스텍 건물의 기둥은 피복(겉 부분 콘크리트) 부분도 건축 표준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하중을 지탱하는 기둥(내력벽)은 피복 두께가 3㎝ 이하여야 한다. 철근이 들어가는 중심부가 그만큼 굵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은재기념관 기둥의 피복 두께는 3㎝였다. 장성동 '필로티 건물' 기둥 피복은 10㎝가 넘는 것으로 조사됐다.

포스텍과 지진에 휘어진 필로티 공법 원룸 비교 그래픽
포스텍과 지진에 휘어진 필로티 공법 원룸 비교 그래픽

이번 지진으로 건물이 기울어진 흥해읍 대성아파트는 '벽식 구조'로 지어졌다. 기둥이 없는 대신 벽이 건물 무게를 견디는 공법이다. 건물 내부 공간을 넓게 쓸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벽이 부실하면 이번처럼 건물이 쉽게 파손된다. 권현우 포스텍 시설운영팀 대리는 "벽식 구조라고 지진에 특별히 약한 게 아니다"며 "벽을 견고하게 지으면 오래된 건물이라도 얼마든지 버틸 수 있다"고 했다. 5층짜리 포스텍 기숙사는 대성아파트보다 1년 먼저 지어졌다. 포스텍 기숙사 외벽 두께는 30㎝, 대성아파트 외벽은 15㎝ 정도였다. 15㎝ 차이가 건물의 운명을 가른 것이다.

김영수 포스텍 시설운영팀장은 "1990년대 자체 조사를 해보니 학교 건물 전체가 규모 6 정도 지진을 버틴다는 결론이 나왔다"고 했다. 포스텍은 지난 9월 1986년 완공한 35개 건물 중 기숙사 생활관, 대학원 아파트, 교수 아파트 등 4개 동(棟)을 뽑아 내진 성능을 진단하고 있다. 김 팀장은 "중간 조사 결과 규모 6 지진은 문제없이 버틸 수 있는 것으로 나왔다"고 했다. 김도연 포스텍 총장은 "박 회장이 가장 싫어한 말이 '잘' '대충'이었다"며 "그만큼 꼼꼼하게 신경 쓴 덕분에 우리가 안전하게 학교에 다닐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언제든 지진 올 수 있다" 만반의 대비

포항 지진 주요 피해 지역 지도
1985년 박태준 전 회장은 당시 포스코 상무였던 이대공 이사장과 세계 유명 대학을 순방했다. 포스텍의 모델이 될 만한 학교를 찾기 위해서였다. 영국에 들러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대학을 둘러본 박 전 회장이 이 이사장에게 말했다. "포항공대는 정말로 오래 남아야 해.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봤지? 학교 역사가 600년이 넘어. 우리 학교는 1000년을 가도록 튼튼하게 짓자고."

그는 지진에도 대비했다. 당시는 우리나라가 '지진 안전지대'로 생각되던 때였다. 박 전 회장은 수시로 "우리나라도 언제든 지진이 날 수 있다. 학교 모든 시설이 수백년에 한 번 오는 강진에도 안전할 수 있도록 지어라"고 강조했다. 일본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나온 박 전 회장은 지진 위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당시 실무진은 '아니 우리나라에 무슨 지진이 온다고 호들갑을 떠시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내진 설계에 대한 기준조차 마련돼 있지 않았던 때였다. 이 이사장은 "내진 설계 기준이 없었다. 그냥 설계도면 보고 원칙대로 정직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1985년 8월 첫 삽을 뜬 뒤 박 전 회장은 거의 매일 현장을 찾았다. 건설 부본부장으로 포항제철과 광양제철 전체 건설 부문을 총괄하는 포스코 본사 본부장을 앉혔다. 주변에선 "조그마한 대학 짓는데 본사 총괄을 쓰다니. 닭 잡는데 소 잡는 칼 쓰는 격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기도 했다. 이대공 이사장은 "그만큼 회장님이 학교에 애착을 갖고 공사를 진행한 것"이라고 했다.

 1986년 경북 포항의 포스텍 공사 현장을 방문한 박태준 포스코 전 회장이 현장 관계자들에게 시공 관련 의견을 전달하고 있다. 지난 15일 강진에도 포스텍 건물 기둥이 하중을 버텨낸 것은 박 전 회장의 안전 공사 원칙 덕분인 것으로 알려졌다.
1986년 경북 포항의 포스텍 공사 현장을 방문한 박태준 포스코 전 회장이 현장 관계자들에게 시공 관련 의견을 전달하고 있다. 지난 15일 강진에도 포스텍 건물 기둥이 하중을 버텨낸 것은 박 전 회장의 안전 공사 원칙 덕분인 것으로 알려졌다. /포스텍

어느 날 밤, 자정에도 불쑥 공사 현장을 찾기 좋아했던 박 전 회장 눈에 콘크리트를 붓다만 공사장이 들어왔다. 건물 층을 올릴 때는 H빔으로 건물 뼈대를 세우고 그 위에 레미콘으로 콘크리트를 부어 굳힌다. 한 층은 하루에 다 마쳐야 콘크리트가 균일하게 굳는다. 한 번에 하지 않으면 콘크리트가 굳는 정도가 달라져 쉽게 깨질 수 있다. 이 모습을 본 박 전 회장은 불호령을 내렸다. "이봐 당신, 배울 대로 배운 놈을 본부장으로 앉혀놨는데, 건축의 ABC도 몰라?" 결국 퇴근한 레미콘 기사와 인부들을 다시 불러 밤새워 콘크리트를 부었다. 1977년 포항제철 발전 송풍 설비 공사에서 부실이 발견되자 건설 회사 소장들을 불러다 놓고 이미 80%가량 완료된 설비를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킨 사건은 '부실 공사는 용납하지 않는다'는 박 전 회장의 신념을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다. 이 이<iframe width="250" height="250" noresize="" scrolling="no" frameborder="0" marginheight="0" marginwidth="0" src="http://cad.chosun.com/RealMedia/ads/adstream_sx.ads/www.chosun.com/news@x74" style="margin: 0px; padding: 0px; border-width: 0px; border-style: none"></iframe>사장은 "정말 지독한 분이었다. 이번 지진 때 선반의 컵 하나 안 떨어질 정도였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포스텍 바로 옆 교수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이 아파트는 당시 박 전 회장이 "외국 석학들이 와서 살 곳이다. 튼튼하게 짓는 건 기본이고, 위층에서 나는 소리가 아래층에서 들리지 않도록 지어라"며 콘크리트 타설 작업을 매일 와서 지켜본 곳이라고 한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11/18/2017111800138.html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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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잇글힘 17-11-18 15:11
   
내진설계에 대한 기준이 마련되지 않았다고 치더라도 무슨 선경지명의 경영자로 얘기를 하는군요. 박회장에 대한 경영능력이나 철학은 별개로 하더라도 이건 좀 간잘간질하네요. 차라리 일본서 어린시절부터 대학입학때까지 여러차례의 지진경험들이 그의 이런 판단에 영향을 주었다고 이야기하는 게 더 현실적일듯.
설중화 17-11-18 15:21
   
포철은 구조적으로 빼먹기 어려운 줄 알았는데
앞전전 대통령이 불가능이 없다는 걸, 하면 된다는 걸 보여 준걸로 기억합니다.

박태준님 같은 분의 일하는 자세는 배워야 된다고 봅니다.
강산 17-11-18 15:26
   
조선기레기가 좋아하는 드라마물 기사이지만.
박태준 만큼은 인정하지 않을수 없다.
보수적 정치입문은 그럴러니하고, 이해할수밖에 없고.
흠이라면 고승덕 같은 개미새끼만한 흠밖에는 생각안난다.
김민주탱 17-11-18 15:35
   
97년에 지은 건물이 아마 체육관 윗쪽에 지은 생명동을 말하는 것 같은데... 그때 건물 짓고 얼마 후 포항에 약 4 정도의 지진났을때 안에서 실험하다 건물 무너지는 것 같아 밖으로 뛰어 나왔었죠.. 그건물 모유력 정치인의 사촌이 아주 부실하게 지었다 말 많았었습니다..여기저기 금가고...
그당시 상황에 비추어 보면 박태준은 인물은 인물이죠...
마데카솔 17-11-18 15:59
   
조선일보 기레기들 또 선동 시작했네요. 박태준 띄우기....진앙지에서 한동대보다 5배나 먼 포항공대가 피해가 적은것은 당연한 거지요.
지진이라는게 진앙에서 멀어질수록 그 위력은 그만큼 감소합니다.
그리고 박태준일당이 박지만에게 일감 몰아줘서..박지만을 천억대 자산가로 만들어주죠.
마데카솔 17-11-18 16:04
   
조선일보가 선동의 달인인것이..박태준이 포스텍 건물 공사 할때..의례적으로 던진 말이겠죠. 100년이 가도록 지어라. 근데 그것을 이 지진 타이밍에..5배나 가까운 한동대 피해와 엮은것이죠.  10%의 팩트와 90%의 소설을 섞어..지들이 원하는 프레임을 만들어 냅니다.  박태준 대단하다..-> 박정희 대단하다..-> 아..그 시대의 인물들이 그립다.
     
넷우익증오 17-11-18 16:26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박태준 만나본 사람 그밑에서 일한사람애기들어보면
원리원칙에 철저했다함
조선이 정치에선 ㅄ맞지만 저애긴 진짜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만약 저대로 안하면....진짜 성격대단했다는데 .의례적으로 던진 말이다?ㅁㅊ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angun92 17-11-18 20:09
   
원칙에 철저한 박태준이라...

박태준이라는 인물을 이야기할 때
늘 거론되는 것이 영일만에 포항제철 기초공사를 하면서
부실한 기초공사를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하고 공사를 처음부터 다시 하게 했다는 일화.
박태준 자서전에도 등장하는 이야기.

그런데, 박태준은 군바리 출신으로서 제철 산업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
용광로를 어떻게 만드는지도 모르는 사람.
압연설비가 어떻게 생겼고 어떻게 운용하는지를 전혀 모르는 사람.
그런 사람이 기초 공사가 어느 수준으로 되어야 하는지 어떻게 알았을까?

박태준의 일화는 사실상 남의 이야기를 도둑질해서 자기 일화로 만든 것.

박정희가 포항제철을 건설하기로 결심하면서 총책임자로 앉힌 사람이 공병 출신인 박태준.
그러나 박태준이 제철산업에 대해 전혀 모르기 떄문에
기술 관련된 사항을 책일질 사람으로 초빙한 분이 윤동석 박사 (포항제철 제 1대 부사장).
윤동석 박사는 일본에서 제철소 건설과 운용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사람.
박사학위도 일본에서 해당 분야의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분.

그런데 박정희의 일정 관련 독촉에 박태준은 기초 공사를 설렁설렁 대충 했음.
윤동석 박사는 기초공사를 이런 식으로 하면, 나중에 용광로가 버티지 못한다고 말을 해도 박태준을 들어먹지를 않음.

그래서 박태준이가 현장을 비웠을 때
윤동석 박사는 현장소장을 불러서 다니어마이트로 몽땅 폭파하라고 지시함.
현장소장 (현역 군인)은 겁이 나서 못하겠다고 뒷걸음질.
윤동석 박사는 이런 식으로 지어봐야 어차피 다 무너지게 되어 있다고 설득하면서
자신이 모든 것을 책임질테니 폭파하라고 지시.
결국은 다니어마이트로 몽땅 폭파.
박태준이는 당연히 지랄지랄.
그러나 윤동석 박사는 박정희를 설득.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함.

그 이후부터 박태준이는 윤동석 박사가 업무 관계로 다른 사람을 만나러 갈 때마다 보안요원을 붙여서 미행하는 등 많이 괴롭힘.
그래서 윤동석 박사는 포철 제1 고로를 건설해서 화입을 한 이후에 포철을 떠남.

이런 내용을, 마치 박태준 자기가 부실 기초를 폭파한 것처럼 조작함.
     
뇌세포 17-11-18 20:24
   
위 내용은 어디에 있는 글인가요?
흥미롭네요. 더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sangun92 17-11-18 21:08
   
윤동석 박사는 포항제철 제 1대 부사장 직을 사임한 후
모 대학 금속공학과 교수로 갔습니다.
그 대학, 그 학과 출신들은 다 알고 있는 이야기.

요즘 학생들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70년대 학번들까지는 다 알고 있는 이야기.
     
넷우익증오 17-11-18 21:06
   
아무리찿아봐도 그런내용없던데?

1969년 9월 KISA와의 기본협정이 해지되고 일본으로 방향을 선회하는 즈음의 어느 날 여 전 부사장은 경영 관련 보고를 하는 자리에서 박태준 사장으로부터 고뇌의 한 자락을 드러내는 말을 들었다. 당시 제철소를 구경해본 사람은 박태준 사장과 윤동석 박사 둘뿐인데, 103만 톤 체제 운영에는 대체 어느 정도의 인원이 있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흘러가는 얘기처럼 말씀하셨지만, 나는 그때 충격을 받았어요. 바로 내가 해내야 할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우리로서는 그 어떤 정보도, 자료도 접할 수 없는 상태였어. 당시엔 모든 일이 그랬어."

여 전 부사장은 서양인 고문단을 통해 정보를 얻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의 대답은 '정확한 것은 모르겠으나 아마도 1만 4000명 내지 1만 5000명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추론된다'는 극히 추상적인 것이었다. 일본인 슈퍼바이저에게도 같은 질문을 해보았는데, 그들 또한 '9000명 내지 1만 명은 가져야 할 것이다'고 할 뿐, 구체적인 산출 근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근거를 말해달라고 했지만 '거기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나 설명내용은 없을 것이다. 이것은 오랜 경험과 경륜을 근거로 판단한 결과다'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고 여 전 부사장은 생각했다. 제철소라는 대단위 공장을 주먹구구로 운영할 수는 없을 것이므로 소요 인력에 대한 스탠더드 같은 것이 있을 터인데, 그걸 구할 수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러던 중 마침 일본 연수 기회가 있어 야하다제철 전무이사를 만나게 되었다.

"제철소의 직무내용과 거기에 관련된 자료가 있으면 한번 보았으면 좋겠다고 간청했더니 '물론 있다. 그런 게 없으면 어떻게 인력편성과 직무훈련, 작업내용을 설계할 수 있겠는가?' 하면서 창고로 가자고 했어요. 따라갔더니 창고에는 빨간 도장으로 비(秘)자가 찍힌 직무명세서·작업내용서·소요인력판단서 등 상세기록이 있는 거야. 외부 반출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례 한 장씩만 구해서 돌아왔지."

서울로 돌아온 뒤 처음 자문을 했던 일본인 슈퍼바이저를 다시 만나 퉁명스럽게 물었다.

"있는 걸 왜 없다고 한 거요?"
"그런 걸 알려달라는 사람이 잘못이오. 오랜 세월에 걸쳐 축적한 노하우를 거저 달라는 것이나 마찬가진데, 그러면 우리는 교육훈련·기술연수·직무판단에 대한 기술이전비를 어디서 받겠소."

가진 자의 매정함이 묻어났지만,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요원 8명으로 직무분석반을 편성하고 추정직무분석, 즉 발생되지 않은 일을 추정하고 거기에 소요되는 기술과 인력을 산출한다는, 어떻게 보면 황당하기 짝이 없는 작업에 도전했다.

"일본서 얻어온 샘플로부터 영감을 얻고 유에스스틸 직무사전, 일본 자문단, 서울대 행정대학원 박동서 교수의 조언을 받아가며 5개월여의 시간을 투자하여 머리를 짜낸 결과 최종안을 도출했지. 4직계, 14직군, 64직종, 420개 직무에 4268명이라는 판단서가 나온 거야. 임원회의에서 보고를 받은 박태준 사장께서 손으로 의장석을 탁탁 치면서 '좋다. 103만 톤 제철소를 4000명으로 운영하겠다. 그대로 실시해' 하셨어요. 만약 그때 외국인 슈퍼바이저들의 말대로 1만 명 이상으로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야."

이 작업은 공장을 짓고, 공장을 돌리는 일이 아닌 '보이지 않는 소프트웨어(invisible software)'의 산물이었으므로 크게 두드러져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후 '포스코 10년'을 맞아 분석한 '포스코 성공요인'의 하나로 꼽혔다.

"인사제도에서 제일 중요한 게 승진 관계인데, 당시까진 연공서열이 가장 보편적이었어. 조직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데는 좋은 제도이지. 그러나 스스로 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제도를 답답해할 수밖에 없어.

조직의 안정성과 효율성을 동시에 추구하기 위해서 과장부터 발탁제로 했어요. 그래서 당시 과장 승진 경쟁이 가장 치열했어."

당시 직무는 관리직·사무직·생산직·기능직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반상의식(班常意識)이 문제였다. 기능직에서 관리직으로 옮겨가려는 욕구가 은근히 팽배했던 것이다. 그래서 착안한 것이 '기성제도'였다. 기능인들이 스스로 초라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직무에 자부심을 가지고 알찬 인생을 설계할 수 있는 유인요소를 찾아본 것이었다.

"일본 야하다제철을 벤치마킹했어. 거기에 숙노(宿老)라는 제도가 있었는데, 야하다 100년 역사에 8명밖에 없었어. 독일의 '마이스터'와 비슷한데, 그보다 한 차원 높은 경지라고 볼 수 있었지. 사장께 보고했더니 '베토벤을 뭐라고 불러' 하시는 거야. 거기서 힌트를 얻어 '기성(技聖)'이라고 했어요."

1970년 가을이었다. 여 전 부사장은 당시 박태준 사장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면서 아이디어를 주고받았는데, 어느 날 매우 밝은 표정으로 "내 맘대로 쓸 수 있는 큰돈이 있다. 이걸 어떻게 쓰는 것이 좋겠어?" 하고 물었다. 웬 돈이냐고 되물었지만, 그런 건 묻지 말고 연구해보라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1기 설비 구매과정에서 설비에 보험을 들었는데, 보험사로부터 6000만 원이라는 거금의 리베이트가 들어온 것이었어. 그건 정당하게 들어오는 공식적 리베이트야. 박태준 사장이 그 돈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가지고 가서 경위를 설명하고, 국정에 유용하게 쓰시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을 드린 거야. 대통령께서는 두고 가라고 했는데, 며칠 후 다시 들어오라고 해서 갔더니 거기 편지가 들어 있으니 가져가서 읽어보고 그대로 하라고 했어. 나와서 읽어 보니 '이 돈의 용처는 박 사장이니까 임의대로 조처할 것'이라고 되어 있었던 거야."

직원들의 꿈이 "나는 못 배웠어도 아들·딸만은 원 없이 교육시키고 싶다"는 것을 알고 장학회를 건의했다. 박태준 사장은 좋은 생각이라고 했고, 바로 제철장학회 창설 작업에 들어가 오늘날까지 포스코 직원 자녀들을 위한 장학사업이 존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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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미그린 17-11-18 21:38
   
sangun92 님의 댓글이 사실이라면 꽤 흥미로운데
관련 기사라도 있었으면 좋겠군요.......
     
sangun92 17-11-18 22:24
   
관련 기사는 없음.
있을 수가 없음.
서슬 시퍼런 박정희 정권 하에서 벌어진 일이었고
박정희가 죽은 다음에는, 박태준의 권력이 어마무시 했던 시절이었으며
윤동석 교수는 정치적인 힘이 하나도 없던 그냥 학자였으니,
공식적인 기록으로 남기거나 기사화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음.
그냥 그쪽 세계에서 회자되는 이야기임.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됨.
박태준이는 자기가 부실공사라고 판단하였다는데, 제철산업/용광로에 관한 지식이 전무한 박태준이가
어떻게 공사 규격이 부실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었겠음?

더구나, 박태준이가 처음부터 공사 총책임자였고 현장을 지켰는데
부실공사가 진행되도록 그냥 놔구고 구경만 하다가
나중에야 부실공사이니 폭파하라고 명령을 했다?
박태준에게 부실 공사 여부를 판단할 능력이 있었다면, 애초부터 공사를 그렇게 진행시키지 않았을 것.

윤동석 박사 입장에서는 제철산업/용광로 건설과 운용에 대한 경험과 지식이 있었고, 기술 담당 부사장이었음.
기초 공사가 잘못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판단할 능력이 있었고 인지를 했지만
박정희의 공사 독촉 때문에 박태준이가 무리하게 진행하는 것을 보면서
부실 공사를 하지 말라고 지적했다는 것이 훨씬 더 상식적이고 개연성이 있음.

그래서 말을 듣지 않는 박태준이가 현장을 비운 사이에 기초 공사를 폭파시킨 것임.
samanto.. 17-11-19 19:09
   
포스코 빼고 전부 무너진줄 알겠네...... ㅂ ㅅ ㄷ....
한약맛초코 17-11-20 23:35
   
박태준 회장 포스코 건설 당시에도 기준에 맞지않는 자재 및 강도로 건설한 건축물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폭파해버리고 새로 지으라 그랬죠.
선조들의 핏값으로 짓는 공장이니 실패시 전원 영일만에 몸을 던져야 한다고 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