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생각들을 가지고 계시겠지만 저는 전반적으로 이번 정부의 경제 정책이 대부분 방향성은 제대로 잡았다고 보여집니다. 물론 얼마나 충실히 제대로 시행될지는 지켜봐야 하겠지만요.
제가 주변 분들한테 많이 듣는 얘기가 한국은 일본과 흡사한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왜 선진국이 되기도 전에 버벅거리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한국은 일본보다 민도가 뒤떨어져서 그런 거다, 부정부패 때문이다, 재벌들 때문이다 많은 의견을 들었지만 제 생각을 간단하게 한마디로 표현하면 '일본은 운이 좋았다' 입니다.
일본이 2차 대전 전부터 애초에 우수한 산업 과학 기술을 갖추고 뛰어난 기업가들 덕분에 발전한 것도 있습니다만 일본은 전후에 본격적인 세계화 시대가 개막되기 직전(80년대 말)에 선진국 진입(85년도에 1인당 소득이 갓 2만불을 넘겼고 플라자 협정 이후엔 급격한 엔고 덕에 88년 4만불을 돌파)을 완료한, 사실상 마지막으로 '문 닫고 들어간' 선진국입니다. 90년대 이후로 개발도상국 중에 새로 1인당 소득 4만불 이상인 선진국이 된 나라는 하나도 없습니다. (싱가포르와 산유국들 제외)
세계화 이전에는 중국이 개방되기 이전이고 지금처럼 선진국 기업들의 해외 생산이 일반화되지 않았습니다. 특히나 일본같이 폐쇄적이고 국수적인 국가들은 신발, 의류, 가발 같은 공장은 동남아에 짓는 한이 있더라도 주력 산업인 전기, 전자, 조선, 자동차 등의 산업은 거의 100% 자국 공장에서 생산했습니다. 그 덕에 수출 고용 유발 계수가 굉장히 높았고 주력 산업에서 창출되는 부가가치가 개발도상국으로 흘러가지 않고 온전히 자국 내에 축적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고도 성장을 하면서도 빈부 격차를 적정 수준으로 유지하면서 중산층을 육성하여 '1억 총중류' 시대를 가능케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일본이 발전할 때 우리는 더 빨리 발전했다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출발선이 너무 뒤쳐저 있어서 격차를 쉽게 좁히지 못한 것 뿐입니다.
시기적으로 90년대 초반에 들어서면 한국, 일본 모두 산업경쟁력이 큰 폭으로 꺾이기 시작합니다. 중국이 해외 공장들을 전격적으로 유치하기 시작하면서 제조업 일자리가 중국으로 옮겨가기 시작하고 전세계적으로 소위 '블루칼라' 중산층들이 서서히 줄기 시작하고 제조업 전반이 성숙기에 도달함에 따라 이윤율이 하락함에 따라 자본들이 점차 고수익의 금융산업에 눈을 돌리기 시작합니다. 90년대 초에 전면적 세계화가 이뤄진 뒤 결정적으로 미국, 영국을 중심으로 한 투기 금융자본들이 본격적으로 아시아 경제를 교란하기 시작합니다.
90년대 말에 아시아와 남미에 금융 위기가 닥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죠. 한국도 큰 피해를 입었지만 일본도 큰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일본은 버블이 꺼진 이후에 완전히 훅 갔다 생각하시지만 사실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강한 회복의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이 때 '아시아 외환위기'라는 강펀치를 맞고 완전히 꺾여버린 것입니다. 차이점이라면 일본은 이미 선진국에 진입한 상태였고 우리는 한창 커야할 개발도상국이었단 것이죠. 비유하자면 일본은 몸이 허약해진 어른이었다면 우리는 '성장판'에 손상을 입게 된 청소년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일본이 우리보다 선진국인 것은 분명하나 우리보다 우월한 고효율적, 합리적인 경제 시스템을 갖춘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일본은 세계화 '이전'에 자신들을 선진국으로 이끌었던 '성공 방정식'에 꽂혀서 세계화 '이후'에도 개혁할 생각은 하지도 않는다는 것이죠. 우리는 비록 세계화 이전에 선진국에 진입하진 못했고 IMF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사회 전반에 '이대로는 안된다. 보다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고부가가치 경제 시스템으로 한단계 도약해야 한다'라는 공감대는 형성되어 있다 봅니다.
사실 앞으로 우리 앞에 놓인 도전은 극소수 유럽 선진국만이 성공한 험난한 길이라 봅니다. 실제로 9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세계화 이후에 빈부 격차가 심화되지 않고 중산층이 유지되면서 안정적으로 지속성장을 이룩한 선진국은 전세계에서 독일, 네덜란드, 덴마크, 스위스 등으로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이들 나라의 특징은 일반 제조업, 서비스업, 첨단 산업(항공, 우주, 군사, 의료, 제약, 생명공학 등등) 모두에서 골고루 글로벌 경쟁력을 갖췄단 것입니다. 이는 미국, 일본, 중국 등도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일례로 미국은 서비스업, 첨단산업은 최고지만 일반 제조업은 사실상 붕괴된 상태죠. 이 때문에 '블루칼라'가 급속히 감소해 중산층 붕괴와 빈부 격차로 이어져 대표적인 '불평등' 국가로 자리잡았습니다)
우리가 일본과 비교해서 경제의 방향성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힘든 길이 앞에 놓여있다고 한국의 미래가 일본보다 어둡다 할 수는 없다 봅니다. 일본은 진즉에 가야했을 길임에도 두려워서 회피하고 현상태에 안주하다가 결국 지금 상태에 이른 거니까요. 일단은 옳은 방향으로 꿋꿋이 가고 결과는 하늘에 맡겨야 한다 봅니다. '진인사대천명'이니까요...
p.s 세계화에는 많은 정의와 논쟁이 있지만 제가 말하는 '세계화'는 '금융자본의 국가간 이동이 자유로워지고 중국, 동남아 등지로 생산기지 이전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80년대 중반 이후부터의 대세적 흐름'이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