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멕시코 대표팀이 맞붙던 날. 2:0으로 뒤지던 상황에서 손흥민 선수가 한골을 만회했을때
나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마치 뒤늦게 노력하는 구남친 같다"고. 그말을 들은 친구가 깔깔
웃었다.
주변의 모든 남자들이 공놀이를 좋아하다 못해 숭배하기까지 한다.
그러므로 나는 '공놀이를 즐길 줄 아는 쿨한 여자'가 되어야만 했다. 나는 관심도 없는 라리가의
순위를 외우고 엘클라시코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척하며 '쿨한 여자'를 연기해야만 했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된것은 우연이 아니다. 공놀이와 쿨한 여자의 정서를 결합시켜 문화현상을
만드는 흐름이 존재해 왔던 것이다. 상상도 못한 월드컵 4강에 올라간 2002년 무렵부터다.
축구를 소재로 한 장편소설 (아내가 결혼했다)는 어느 축구광인 남자가 자신만큼 축구를 좋아
하는 '쿨한 여자'와 결혼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뤘다.
이런 작품들이 주는 메시지는 한결같다. 공놀이는 남성성 그 자체라는것. 그러니 쿨걸들이여,
우리들을 사랑해 달라!
결국 이러한 흐름은 공놀이를 여자들이 이수해야 할 필수 교양 과목으로 올려놓았다. 여자가
스포츠 까막눈이라는 전제하에서 (축구 아는 여자)같은 책들이 마구 등장한 것인데 한마디로
'쿨한 여자'가 되라는 것이다.
결국 내가 진정으로 공놀이를 좋아한들 그것은 여자인 나와 무관한 일인 것이다. 오직 남성들
만이 열띤 환호와 절망의 주인공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공놀이와 결별했다.
월드컵은 여전히 남자가 뛰고, 남자가 심판을 보고, 남자가 해설을 하고, 남자 권력자들이 한
자리에 모이고, 남자가 돈을 버는 이벤트인 것이다.
여자들은 남성에게 성추행을 당하는 여성 축구 리포트거나, 게티이미지의 '가장 섹시한 팬들'
이라는 이름의 갤러리에서나 등장했을 뿐이다.
그런데 결승전에서 반전이 일어났다. 러시아 밴드 '푸시 라이엇'의 결승전 난입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남자들의 게임을 시원하게 망쳐놨다.
역시나 공은 둥글다. 축구 역사상 가장 쿨한 진리를 선수가 아닌 록 밴드가 몸소 보여주다니!
앞으로도 이런 반전이 있다면 나는 다시 한번 공놀이를 좋아할 수 있을 것 같다.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