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은 도대체 왜 한국을 싫어할까
이런 궁금증에 과거 신문부터 확인해 보기로 했습니다
1,중화사상
세계에서 중국 문화와 중국인은 우월하다라는 중화사상에 의거 과거 중국 이외
국가는 모두 속국이라는 사상
한류로 인해 한국 문화를 즐기기는 하나 한국을 인정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하고 불쾌하겠죠
그럼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의 물음에 대해 이런식으로 대답을 합니다
정촌지 (대만, tv 시사평론가)는
우리의 몸은 타이완이지만 머리는 중국입니다
그래서 중국 입장에서 한국을 바라보면 한국은 단지
속국에 불과하다고 할수 있죠. 그렇기 때문에 타이완인들이
한국과의 관계를 평등하게 바라볼수 없다는 겁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이 반한감정을 가지게 됩니다
2.한국의 친중노선
1984년 4월25일자 동아일보면을 읽어보면 2가지 사건이
한국과 대만의 불편한 관계가 시작 된것임을 알수있습니다
중공의 민항기 사건과 아시아 청소년 농구가 반한의 시작을 알리고 있습니다
1983년 5월 5일 중공 민항기가 중국인에 납치되어 한국에 불시착한 사건
중국체재가 싫어 대만으로 민항기를 납치했던 납치범들이 북으로 가다
한국에 불시착 했고 이걸 계기로 한국 정부와 중국이 최초로 접촉을 하죠
중국과 회담을 통해 승객과 승무원은 중국에게로
민항기를 납치한 무장납치범은 한국 재판에 회부됩니다
처음에는 한국의 사법 판단에 따르겠다고 수긍한 대만이
반발하게 됩니다 그래서 1984년 8월13일 한국 정부는 형집행을 중지하고
납치범들을 대만으로 보내 대만에 성의를 표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대만은 한국 외교 정책의 주요 대상이 대만이 아니라
중국이라는 사실을 알고 경계를 하기 시작합니다
중공(중국) 대만 귀순자를 왜? 한국에서 재판하는냐? 라는 불만등과 함께
대만은 한국에 경제보복 조치 및 한국 유학생 추방과 항의 시위 협박등으로
보복을 단행했습니다
그리고 얼마후 제 8회 아시아 청소년 농구 대회중에 또 다른 사건이 발생합니다
한국 조직 위원회는 대만과 중국간의 갈등을 막기 위해 대만이 주장한
공식 국제 경기에서 국기 사용을 계양말자라는 대만측 주장을 따르기로 했지만
중국이 국제농구연맹(FIBA)규정에 위배된다 IOC 규정 주장에 따라 국기를 계양하게 되었고
그러인해 대만은 경기를 포기하고 한국에 의해 이미 청천백일기 (대만국기) 사용을 거부당했다며
격분했고 대회 불참을 선언하게되 반한 감정의 극에 달합니다
(1984년 4월12일자 매일경제)
반한 혐한 감정의 물결
한국이 중공(중국) 편향으로 대만의 우의를 저버렸다
한국의 배신 규탄 ,한국의 정신애도
한국에 격분유감 등등 구호와 데모가
대만 한국 대사관에 연일 시위가 벌어졌다
(1984년 4월 24일 동아일보)
대 한국 비난은 데모에 국한된것이 아니다
국회에 해당하는 입법원외 감찰원. 집권국민당.국회대표연합회.대만상공 회의소.
대만의회등 거의 모든 기관 단체가 나서고 있다
이들의 요구도 과격하다
한국정부의 사과, 무역제재, 한국 상품 불매 운동, 한국 관광 중지, 한국 농구협회 공개처벌
주한 대사 소환, KAL기 운항 축소및 박탈등
언론도 대 한국 비난 일색이고 한국의 대 중국 관개 개선시도는 환상에 불과하다라고 주장했다
(1984년 4월 20일 경향신문)
대만에 反韓(반한) 물결
대만 국회위원 서울주재 중국대사 송환.한국측 해명 요구 결의안 채택
대만TV공사(TTV)서울에서의 TV로케 취소
대만 국영 전력 공사 방한 취소및 신히 직원 3만 2천명에게
한국산 인삼을 사지 말라고 지시했다
대만 여행사들은 한국행 관광객에 대한 비자 발급 중단
대만 뱀장어 수입협회 한국과 회담 취소
대만 한국산 승용차 수입 취소
(1984년 4월20일자 대만=APP)
그외에도 조사한 각종 신문에 반한과 혐한 내용들이 너무 많아서 시간상 다 적지 못하겠네요
너무나 많은 반한과 혐한 시위와 데모 항의 기사가 대만과 단교 하기 이전부터 존재 했습니다
단교를 해서 반한이 된것이 아니라 그이전 부터 있었습니다
지금보다 더 더럽게 혐한과 반한을 해 왔던 대만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