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3권, 1년(1419 기해 / 명 영락(永樂) 17년) 1월 19일(갑자) 2번째기사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고 부절과 고서를 받다
......경복궁에 당도하자, 상왕은 궁문 밖에서 고명을 영접하고, 사신은 절·고를 받들고 근정전에 당도하니, 상왕은 전정(殿庭)에서 절·고에 먼저 절을 하고 악차로 들어갔다.
임금은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네 번 절한 후 전상으로 올라오니, 사신은 친히 고명을 임금에게 바쳤다.
임금은 받고서 뜰에 내려가 여러 신하와 더불어 네 번 절하고 악차로 들어가 면복을 입고 나와, 여러 신하와 더불어 멀리 사은하며 네 번 절하고 향을 피우며, 또 네 번 절하고 만세를 부르며 춤추고 발구르며, 네 번 절하고 악차에 들어가 면복을 벗었다.
사신은 절(節)을 받들고 나가니, 임금과 상왕은 전정에 나가 공경히 전송하고, 여러 신하는 절을 인도하며 태평관(太平館)에 당도하여, 절을 북루(北樓) 위에 안치하였다. 상왕은 태평관에 와서 사신과 더불어 사례(私禮)를 행하고 수강궁으로 돌아갔다. 임금은 사례를 행하고 나와서 악차에 들러, 앉아서 여러 신하와 예를 행하였다. 예식이 끝나니, 한확(韓確)은 악차 앞에 와서 네 번 절하는 예식을 거행하였다.
임금은 잔치를 베풀어 사신을 위로하고 안장 갖춘 말과 의복을 선사하였다. 임금이 사신과 더불어 행례할 적에, 한확은,
“감히 그럴 수 없다.”
고 사양하는데, 임금이 강권하여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러나 한확은 잔치에는 나오지 아니하였다.
한확은 본국 사람인데, 그 누이가 황제의 후궁으로 뽑혀 들어가서 총애를 받고 있었다. 그 까닭으로 황제는 영화를 보여 주기 위하여 북경으로 불러들여 고명을 고명을 주어 돌려보낸 것이었다.
에도시대 조선통신사는 막부에 새로운 장군이 취임할때마다 이웃국가가 외교적으로
그 정권을 인정한다는걸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과시하여 그 정통성을 인정받고자 함이었는데
이는 조선과 일본이 상하관계도 아닌 어디까지나 대등한 교린관계였음에도
조선통신사를 아주 깍듯이 예우하고 저자세적인 모습도 보인 사례들이 많아서
일부러 피하고 있는게 아닌가 싶음.
일본이 조선통신사부분에 대해 이러한건 그들의 민족심리를 엿볼때 이해가 가는건 사실.
일본사극에서 임진왜란이나 새로운 쇼군이 취임할때마다 입국하는 조선통신사 부분을
누락시키는것을 두고 우리가 뭐라 하진 않죠.
우리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아무리 조선과 당시 명청과의 관계가 상하관계이고 임금이 절을 하고 굴욕적인 부분을 감내했다치더라도
굳이 현대의 국민감정을 건드리고 한류드라마의 인기로 해외팬들이 많이 시청하는 상황에서 한국이 과거
중국의 속국이었군 하는 강한 인상만 심어주는 중국사신 고명문제를 약방의 감초처럼 빠트리지 않고 다룰
필요가 있냐는 겁니다.
사실, 그나마 현대에와서 별로 안보여준거지 칙사와 명패에 절하는건 사실 실제역사에 비하면 별거 아닌 수준입니다. 실제 고증보면 민족의 자존심이 완전시 산산히 부서질꺼에요 ㅋㅋ당시엔 그게 국제적인 질서이고 룰이였으니 당시엔 그게 당연히 한걸로 생각했을껍니다.
당시 아시아는 중국을 중심으로 대국의 질서아래 천하가 유지되는데 당연히 천자에게 절하는게 조선에선 무슨 문제가 됬을까요. 당시의 세계관과 질서를 현대의 잣대로 바라보는건 옳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