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은 한국의 교과서 등에서 일본의 조선 점령에
협력한 친일파의 상징으로서
나라를 팔아먹은 만고의 역적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리고 역적 맞다.
친일파로 알려져 있는 이완용
그 역시 타락하는 과정이 있었는데.
관직에 입문한 이후 이완용은 대부분의 기간을 정동파로서
일본 및 청나라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활동하였다.
당시 열강이 조선에서 차지하고자 했던 이권은 세 가지였다.
고종은 이 같은 여러 이권들을 서양에 넘겨주면서 막대한 뇌물을 받아 챙겼다.
하지만 고종이 군주라 할지라도 20년간 전전긍긍 했는데 이는
담당 대신의 결재 없이는 이권을 쉽게 넘겨줄 수 없었던것이다.
이완용은 20년 동안 압록강 및 두만강과 울릉도의 삼림을 베어갈 수 있는 권리를
러시아에 팔아넘기는 조약에 대해 서명을 거부했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완용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대한제국 최대의 이권이었던 이 사업은 러시아에게 넘어갔다.
줄곧 러시아에 맞서 국익을 수호하던 이완용은 1897년 말 결국 친러파에 의해 실각,
평안남도 관찰사로 좌천되어 쫓겨나게 되었다.
1898년 이완용은 고종의 명을 받아 잠시 서울로 복귀했으나
여전히 중앙정계에는 복귀하지 못하고 쫒겨났다
러시아의 영도 점유는 침략의 첫 단계라고 판단한 이완용이 이끌던 독립협회는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종로에서 1만여 명이 참가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다.
이를 계기로 러시아의 영도조차 요구가 철회되고
일본도 국내의 석탄고 기지를 되돌려주었으며,
러시아와 일본은 한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니시-로젠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세력 균형이 이루어짐으로써
조선은 또 한번의 기회를 얻게 된다.
기회를 잡은 이완용이 이끄는 독립협회는 다시 입헌군주제를 추진하였다
그 성과로 대한제국에는 오늘날의 국회 역할을 하는 중추원신관제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에 대해 황국협회를 중심으로 뭉친
보수파들은 강력하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독립협회가 의회를 설립하는 것이 아니라
고종을 폐위하고 공화국을 수립하려 한다는 전단을 뿌렸던 것이다.
이에 놀란 고종은 경무청과 친위대를 동원하여
독립협회 간부를 체포하고 개혁파 정부를 무너뜨려 버렸다.
그리고 이후 조병식을 중심으로 한 보수파 정부를 수립하였다.
이어 고종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함으로써
조선이 가졌던 마지막 기회가 사라져버렸다.
이완용은 서재필과 함께 이 같은 행동을
주도하였으며
실제로 내각의 중심에서 실천에 옮긴 인물이긴 했다.
과정이 어찌되었건
대한제국의 입헌군주제를 둘러싸고
1898년과 1899년에 걸쳐 벌어졌던 치열한 정치투쟁은
결국 고종과 보수파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그 이후 이완용은 미쳐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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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간이 미쳐버린 이후로
그 다음 스토리는 워냑 유명한 내용이라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