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스포츠
토론장


새 잡담게시판으로 가기
(구)잡담게시판 [1] [2] [3] [4] [5] [6]
HOME > 커뮤니티 > 잡담 게시판
 
작성일 : 16-02-21 12:19
근데 기자조선에 대해서 이해하려면...
 글쓴이 : aghl
조회 : 744  

잘은 모르겠지만 쉬운 말로 말해서, 기자라는 중국계 코리언이 자기네 나라가 극혐이라 한국으로 와서 그나라 대권을 줬다고 보면 되는건가요?

현대식으로 말하면 중국계 리콴유가 싱가폴가서 총리한 격?
(그렇다고 리콴유를 중국의 역사로 볼 수 없고 싱가폴의 역사로 볼 수 잇듯이 당시 기자조선도 그렇게 보면 된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뭐라뭐라 말들 많은데 뭔가 복잡해서요.. 현대식으로 이해하려면 어떤 예가 가장 적절할까요?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
꾸리끄 16-02-21 12:29
   
저도 역사를 잘아는건 아닙니다만...아마 기자조선은 없었던걸로 기억합니다. 기자는 고조선까지 왔다가 토착민한테 밀렸다는 걸로 알고있습니다.
서클포스 16-02-21 12:29
   
현재 사학계는 기자 조선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서클포스 16-02-21 12:29
   
유적의 부재[편집]
1102년(숙종 7년)에 고려의 왕이 평양에서 기자의 무덤을 찾아내고 기자묘와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그 외에도 정전(井田)과 같은 기자와 관련된 유적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실제 고고학 조사 결과 이들 유적은 모두 고려·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기자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4][11].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준왕의 무덤이라고 전해지는 익산의 무강왕릉이 나타나는데, 이 무덤은 실제 발굴 결과 백제의 무덤 양식으로 만들어진 것임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정확히 연구가 이루어 지지않았다.

또한 황하 유역과 요하 동쪽 지방의 신석기·청동기 문화가 매우 큰 차이를 보인다는 점도 주요한 논점이다. 중국의 청동기와 랴오닝 성 및 한반도의 청동기는 양식이 전혀 다르며 성분 또한 크게 다르다. 기자가 상나라의 왕족으로 조선의 왕이 되었다면 상나라와 관계가 있는 청동 유물 등이 나타나야 하나 실제 고고학 발굴 결과는 두 지역 사이에 문화가 크게 다르다는 것이 확인되었다.[15]

문헌상의 문제점[편집]
기자조선과 관련된 문헌 사료를 살펴보면 선진문헌과 한대 이후의 문헌에서 큰 차이가 나타난다. 선진문헌인 《논어》, 《상서》, 《죽서기년》 등에는 기자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고 있으나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거나 조선에 봉해졌다는 내용은 없다. 그러나 한나라 이후의 기록에서부터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또한 기자가 주 무왕에게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전한 기록과 기자조선의 기록은 서로 모순된다는 점도 지적된다. 홍범구주는 주 무왕이 은둔하였던 기자를 찾아가서 얻은 것으로, 기자가 조선에 있었다면 홍범구주의 전래가 불가능하다.[16]

한편 이마니시 류는 《사기집해》에서 기자의 무덤이 량국 몽현(蒙懸; 현재 하남성 상구현)에 있다고 하였으므로, 평양의 유적은 위작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정인보는 기자의 기(箕) 자는 임검의 검(儉) 자가 시대가 흐름에 따라서 발음이 변한 것이며, 검(儉)과 기(箕)는 모두 높다(高) 혹은 윗사람(上)의 뜻이라고 하였다. 즉, 고구려 환도성에 있던 기산(箕山)이란 일명 기구(箕丘)라고도 하였는데 이것은 "검재"를 한역(漢譯)한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떠돌이 중국인들이 고조선 고구려 백제 등으로 이민하여 들어오면서 그들에 의하여 날조되었고 사대사상이 강한 중세 조선에 이르러 사실인 것처럼 묘사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고려사 지리지 황주목 곡주 협계현조를 예로 들어 신라 경덕왕이 협계현을 단계(檀溪, 단군골)라 고친 것은 이 곳에 기산(箕山), 즉 "검재"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17]

정황상의 근거[편집]
상나라가 멸망하고 주나라가 세워지던 시기의 중국은 그 세력이 황하 유역에 불과하였으며 기자가 조선까지 이동하려면 먼 거리와 다른 이민족들의 영역을 거쳐야 한다는 점이 지적된다. 또한 당시 조선에는 단군조선으로 알려져 있는 토착세력이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망명자에 불과한 기자가 조선의 왕이 되는 것은 어렵다는 점도 부정론의 근거로 제시된다.[1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발행한 《고조선력사개관》에서는 기원전 12 ~ 11세기에는 고조선이 대릉하, 요하의 상류지역까지 거의 대부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기자가 스스로 와서 왕이 될 수 없었으며, 중국 사학자들은 예부터 주변 이민족의 시조를 모두 중국의 고대 성현으로 기록하는 중국 특유의 중화의식을 지적하였다.[11].

기타 주장[편집]
춘추좌씨전에서는 기국이 주나라 초기의 제후국으로 기록되어 있고 기(箕)자가 새겨진 은·주 시대의 청동기가 중국 각지에서 출토되어, 기국은 중국에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18] 한편 윤내현은 ‘기자가 조선으로 망명하자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기록은 기자가 지배를 거부하고 조선으로 도망친 것을 배반으로 다루지 않고 기자의 조선 거주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중국식 표현이라 주장하였다.[19]
돼지콜레라 16-02-21 12:30
   
중국의 기록에만 존재하는 게 기자라는 인물이죠.
3천년 전의 역사라는 걸 감안하면 정확한 기록이라 보기 어려워요.
중국의 사서에는 여러번 등장하지만 기자가 은나라 사람이고 조선으로 가서 통치를 했다는 기록이 아니라 그냥 조선의 왕으로 존재 자체만 언급하다가 이후 중화사상이 가미된 역사서에 중국인으로 등장하는 걸 보면 그리 신뢰할만한 기록은 아닌듯 합니다.
     
aghl 16-02-21 12:38
   
그러면 중국계 코리언이라는 것도 아닐수도 잇겠군요.. 그럼 당시 시대에 기자라는 사람이 존재하긴 했던건지도 궁금하네요
멍게 16-02-21 12:35
   
근데 과거 책봉이라는게 실제 자기들 땅도 아니면서 형식적으로 책봉하는 경우도 많지 않나요? 그리고 실제 통치를 했었으려면 전쟁을 했겠죠
산사의꿈 16-02-21 12:44
   
따라서 이를 근거로 한 기자동래설은 기원전 3~2세기 무렵에 중국인들이 중화사상에 입각하여 조작해낸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실제로 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면, 황하유역과 만주 ·한반도 지역의 청동기문화가 긴밀하게 관련되어야 함에도, 동북아시아의 청동기문화는 비파형(琵琶形)동검문화로 특징되듯이, 계통상으로 중국 황하유역의 것과 뚜렷하게 구분된다. 뿐만 아니라 기자가 조선에 와서 예의범절과 문화를 전하였다면, 은나라에서 사용된 갑골문(甲骨文)이 고조선지역에서 발견되어야 함에도 현재 발견된 예가 전혀 없다.

이처럼 기자동래설의 모순점이 밝혀지면서 이에 대한 여러 가지 새로운 해석이 제기되었다.

먼저 기자조선을 고조선 내부에서 등장한 새로운 지배세력, 즉 한씨조선(韓氏朝鮮)의 등장과 동일한 것으로 파악한 견해가 있었다. 즉 후한 왕부(王符)의 《잠부론(潛夫論)》에 “주나라 선왕(宣王) 때 한후(韓侯)가 연나라 근처에 있었다. 그후 한의 서쪽에서도 성(姓)을 한(韓)이라 하더니 위만(衛滿)에게 망하여 바다로 옮겨갔다”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바다로 간 자는 바로 준왕(準王)이므로 그의 성은 기씨(箕氏)가 아니라 한씨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기자조선은 중국인이 세운 나라가 아니라 바로 한인(韓人)이 단군조선을 이어 세운 국가로 볼 수 있다는 주장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기자조선 [箕子朝鮮] (두산백과)

---------------------------------------------------------------------------------------------------------------------
족보를 보면

기씨,한씨,선우씨,  하나의 성씨에서  갈라졌다고 나옵니다.
이건 한씨 족보를 보면 나옵니다.

기자조선은 그냥 중화사상으로 조작한 거 같아요.
고조선은 한씨가 통치한거로 나오는데..
그놈32 16-02-21 13:14
   
-고조선 멸망전 역사서에 기자라는 인물에 대한 단순한 언급이 존재함.(XX라는 똑똑한 놈이 있었다.)
-고조선 멸망 이후 기자가 고조선으로 와서 왕이 되었다는 기록이 언급되기 시작함.
-기자는 중국인임.
-당시 고조선과 중국은 인접한 이웃나라가 아님.
-기자 조선을 인정하는 한국의 일부 사서는 사실상 믿을 것이 못됨.(만동묘 따위를 만드는 것들임)
-즉, 고조선 멸망 이후 한사군을 설치하는 과정에서 토착민을 쉽게 지배하려고 나중에 끼워맞춘 거짓역사라는 것이 결론임.


또한 중국계 코리언을 언급하는 것을 보면, 위만에 대한 착각으로 보여짐.

연나라에게 침략을 받은 고조선이 이동을 하고 피난가지 못한 고조선인의 후손 중에 위만이 있었다고 생각됨.

근거는 위만의 복장과 상투에서 볼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