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녁 있었던 JTBC 뉴스룸에서의 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 토론에서 이 문제를 둘러싼 논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토론 내용이 다소 미흡한 듯하여 여기에 내 생각을 정리해 올립니다.
일제가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으로 실어간 쌀은 1910년대 후반에 220만석에서 1930년대 후반에 980만석 수준으로 늘어났다. 당시 일본으로 쌀을 실어가는 것은 수출이 아니라 '이출'이라고 표현되었다. 수출은 일본 본국이 아닌 다른 나라로 보내는 것을 말하였다. 따라서 일본으로 쌀을 실어간 것은 ‘수출’이라고 표현하면 안 된다. ‘이출’이라고 쓰든지 그냥 ‘일본으로 실어간 쌀’이라고 표현해야 한다.
그럼 ‘쌀의 수탈’이라는 표현은 어떠한가. 일제말기 일본인 지주와 농장(농업회사)들은 조선에서 약 11%의 농지(논은 약 13%, 밭은 약 8%) 정도를 소유했다. 이들 일본인 지주와 농장들은 조선인 소작인들을 상대로 50~70%의 소작료를 징수했다. 이는 조선시대보다도 가혹한 고율소작료였다. 식민지 조선사회는 이미 일본 자본주의에 편입되어 있었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50%가 넘는 고율의 지대(소작료)를 받는 것은 ‘수탈’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일본의 경우에도 소작인들은 지주들에게 50% 내외의 소작료를 내고 있었는데, 이 또한 고율의 소작료였다. 때문에 당시 조선과 일본에서는 이와 같은 고율의 소작료에 저항하는 소작쟁의가 끊이지 않았다. 물론 조선인 지주도 이와 같은 고율의 소작료를 받고 있었다(해방 이후 미군정은 소작료를 3분의 1 정도의 수준으로 낮추어 농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1920년대 암태도 소작쟁의를 비롯하여 여러 소작쟁의에서는 소작료를 3할 수준으로 낮추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총독부 경찰은 이와 같은 농민들의 소작쟁의를 탄압했다. 결국 일제 말기까지 고율소작료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럼 왜 일제는 이와 같이 고율의 소작료를 거부하는 소작인들의 저항을 탄압했을까. 만일 농민들의 요구처럼 소작료율이 50%에서 30-40%로 낮추어진다면, 지주들의 몫은 10—20% 줄어들게 된다. 당시 일본인 지주나 조선인 지주들은 소작료를 받아서 시장에 내다 팔았고, 일본 무역상인들은 이를 사서 일본으로 실어가고 있었다. 따라서 만일 지주들의 몫이 10-20% 줄어들면 시장에 나오는 쌀이 그만큼 줄어들게 된다. 그러면 일본으로 실어갈 수 있는 쌀도 그만큼 줄어든다. 당시 일본은 인구가 매년 수십만 명씩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식량 부족을 겪고 있었고, 따라서 조선에서 다량의 쌀을 실어가야만 했다. 이런 연유로 일제는 소작료율을 낮추려는 소작쟁의를 탄압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1920년대 산미증식계획 이후 일본으로 쌀을 본격적으로 실어간 것을 설명할 때는 단순히 일본으로 많은 쌀이 실려간 것 그 자체를 설명하는 것보다는, 일제가 고율의 소작료를 유지하면서 지주들을 통해 농민들로부터 수탈한 쌀을 다량으로 일본으로 실어간 것을 강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산미증식계획을 설명하는 부분에는 ‘쌀의 수탈’이라고 제목을 붙이는 것이 적절하다.
백번천번억번 양보해서 쥐꼬리만한 돈으로 사갔다 하더라도 수출이 아닌 이출이 올바른 용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