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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9-05 13:26
일뽕애들 지네는 조선한테 조공바친적없다면서 중국한테 조공바친한국까대네요
 글쓴이 : dlaudqkr
조회 : 1,671  

암만봐도 지들이 우리한테 조공을 안바쳤을수가없는데말이죠 백제때만봐도 백제한테 주인니뮤하면서 꿀어댔는데 조공을 바친적없다느니

헛소리늘어놓네요 어떻게 반박하고싶은데 그 증거 링크나 구절댓글로달아주심안되나요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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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리자드 15-09-05 13:29
   
벡제한테 주인니뮤하다가 백제 망하고 비빌 곳이 없어서 발해와 교역이나 해볼려고 했는데 머리에 총맞은 왜구들이
발해에 건방떨다가 쫓겨남. 결국 통일신라 왕실에 기어들어가 엎드려서 조공함. 신라는 왜구가 불쌍해서 신하로 받아줌.
     
dlaudqkr 15-09-05 13:33
   
그거 구절좀 인용해주세요 링크나
블리자드 15-09-05 13:39
   
고조선, 삼한의 도래인들은 규슈로
가야의 도래인들은 오사카로
백제의 도래인들은 아스카와 나라로
신라와 고구려의 도래인들은 교토로

결국 일본지배세력의 싸움은 백제와 신라의 싸움이었음.

눈치 빠른 사람은 알겠지만 나열된 도시는 일본의 도시중에서도 핵심도시임. 애도막부에 들어서야 동경으로 천도했지만 전에는 한국에서 건너간 도래인들의 세력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소리임. 지들이 아무리 한국을 부정해도 한국이 없으면 지들 역사도 휴지조각이 되니까 완전히 부정을 못하는 것임.

고작 몇십년 식민지배가지고 건방떨다가는 과거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것을 방숭이들은 알아야함. 도래인들이 없었다면 원숭이들 털갈이나 할 수 있었을까?
mymiky 15-09-05 14:20
   
조선실록에 일본이 조공바친 기록만 해도 수두룩한데요 ㅋㅋㅋㅋㅋ

그리고, 옛날에 동아시아에서 조공시스템은 엄연한 룰이였기 때문에, 까는게 웃기죠 ㅋㅋㅋ

그런식으로 깔려면, 안 까일 나라 없습니다.
해달 15-09-05 20:52
   
일본국의 축주 관사(筑州管事) 평만경(平滿景)이 사람을 시켜 토산물을 바치니, 그를 접대하라고 명하였다. 그 서신(書信)에,
“만경(滿景)은 선고 황제(先考皇帝)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적에 하늘을 우러러보고 통곡했으며 땅에 몸을 던져 울었습니다. 크게 의지할 곳을 잃었으니, 불행한 일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었습니다. 우러러 마음을 상하여 평삼랑 좌위문(平三郞左衛門)으로 하여금 글을 받들어 슬픔을 고하오니, 삼가 아뢰어 드리기를 원합니다. 조그만 예물(禮物)로 올리는 토산물은 용뇌(龍腦) 50전목(錢目), 소향유(蘇香油) 2근, 당주(唐朱) 2근, 황련위(黃練緯) 2필, 유황(硫黃) 2천 근, 곽향(藿香) 10근, 기린혈(麒麟血) 2근, 감초(甘草) 20근, 부채[扇子] 20자루를 바칩니다.”라고 하였다. 예조 참의 유연지(柳衍之)가 답서하기를,
“사람을 보내어 위문(慰問)하니 깊이 감사한다. 바친 예물은 삼가 이미 위에 아뢰어 드리었으며, 지금 토산물인 면포(緜布) 4백 70필을 돌아가는 사람에게 부쳐 보낸다.”
라고 하였다.

○日本國筑州管事平滿景使人獻土物, 命饋之。 其書曰:
滿景承先考皇帝登遐, 初聞仰天痛哭, 投地泣血, 大失庇庥, 不幸無大於此焉。 仰惟衋傷, 使平三郞左衛門奉書告哀, 伏願聞達。 小禮土宜, 龍腦五十錢, (目)蘇香油二觔, 唐朱二觔, 黃練緯二匹, 硫黃二千觔, 藿香十觔, 麒麟血二觔, 甘草二十觔, 扇子二十把。
禮曹參議柳衍之答書曰:
專人陳慰, 深感深感。 所獻禮物, 謹已啓納。 今將土宜緜布四百七十匹, 就付回人。
> 세종 19권, 5년(1423 계묘 / 명 영락(永樂) 21년) 1월 12일(갑오) 7번째기사 - 일본국 축주 관사 평만경이 토산물을 바치다

일본 국왕(日本國王) 회수납정소(懷守納政所) 이세수(伊勢守) 정친(政親)이 보낸 입도(入道)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그 서계(書契)에 이르기를,
“정친은 삼가 글을 조선국 의정부(議政府) 합하(閤下)에게 바칩니다. 공손히 바라건대 나라가 크게 평안해서 금상 황제(今上皇帝)의 어위(御位)가 오래도록 가소서! 폐하(陛下)께서는 공손히 덕(德)이 건곤(乾坤)과 일치하여 당(唐)·우(虞) 의 어질고 장수하는 지역(地域)을 보전하고, 현성(賢聖)을 신하로 모아서 이(伊)·주(周) 의 순수하고 소박한 기풍을 회복하도록 원하며, 성의를 다하여 축복합니다. 그런데 부상(扶桑) 전하의 높은 명령에 응하여 같은 날에 서계를 봉하여 조선(朝鮮)과 유구(琉球)의 두 나라에 사선(使船)을 보냅니다. 이는 나의 개인적인 의사가 아니니, 이와 같은 간절한 뜻을 폐하에게 주달(奏達)하여서 허락하여 주시면 오직 다행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일본의 관령(管領) 세천(細川)과 산명(山名)은 사사로운 야심으로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므로 세천도 호군(胡軍)을 더해서 제후(諸侯)가 있고, 또 산명도 호군을 더하여 제후가 있어서 일본의 서울은 크게 어지럽습니다. 내가 토벌하여 비록 정지시키려고 하나, 아직 그치지 아니하니, 거듭 세천과 산명 두 사람의 태만한 죄과가 적지 않습니다. 지금은 세천이 이겨도 좋고 져도 좋으며, 또 산명이 이겨도 좋고 져도 좋은데, 서로 부상 전하의 높은 명령에 따른다고 하여 두 진영의 모든 군사가 내가 이긴다 내가 이긴다 하면서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접전하여 수만의 호군이 함께 죽어 갑니다. 이에 내가 부상 전하의 토벌 명령을 받들어 일본 나라 동남서북의 입도(入道)들에게 제후의 모든 군사를 모으게 하여 세천과 산명 두 사람의 큰 진성(陣城)을 향하여 출발시켜 포위하고 태평(太平)을 거두고자 하여, 사선(使船)과 부선(副船)을 건너 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귀국의 남은 힘을 입고자 하는데, 바라는 물건은 면주(綿紬) 3천 필, 면포(綿布) 5천 필, 백저포(白苧布) 1천 필, 쌀 5천 석이니, 자비로 살피소서. 오직 우리 나라의 태평을 거두고 더 나아가 번신(藩臣)으로서의 충성된 공훈을 세우기를 빕니다. 보잘것 없는 토산물을 별폭(別幅)에 갖추었습니다. 바야흐로 새 눈이 온 산을 뒤덮었으니 풍년이 들 길조(吉兆)입니다. 이만 그칩니다. 별폭은, 금(金) 2원(員) 21냥쭝[兩], 주(朱) 4포(包) 40냥쭝, 대도(大刀) 15파(把), 단자(段子) 1필, 수자(繻子) 1필, 부채[扇子] 50본(本)입니다. 받아주시면 다행하겠습니다.”
하였다.

○日本國王懷守納政所伊勢守政親, 遣入道等, 來獻土宜。 其書契曰:
政親謹奉書朝鮮國議政府閤下: 龔惟太平, 今上皇帝御位, 萬歲、萬歲。 陛下恭願德齊乾坤, 保唐、吳〔虞〕仁壽之域; 臣聚賢聖, 復伊、周淳素之風, 至祝、至祝。 爰應扶桑殿下貴命, 而同日封書朝鮮、琉球兩國渡使船者也。 聊余非私意耳, 如此懇切之意, 趣達上聞, 而許賜容者, 惟幸。 諭是日本管領細川與山名, 以私意, 烽起干戈, 故細川加胡軍有諸侯; 且又山名加胡軍有諸侯, 而日本京城大亂也。 余爲征伐而雖停止, 未休止, 則重重細川、山名兩仁之怠慢罪過不少。 于今細川勝好負好, 山名勝好負好, 依放扶桑殿下貴命。 而兩陣諸軍兵, 予勝哉, 予勝哉, 日日夜夜, 合戰數萬胡軍共死矣。 此則予承扶桑殿下之征夷, 日本國東南西北入道, 集諸侯、諸軍, 而發向細川與山名兩大陣城, 圍而欲收太平, 所以渡使船、同副船焉。 欲蒙大國之餘力, 所望物件, 緜紬三千匹、綿布五千匹、白苧布一千匹、米五千碩。 慈察惟禱。 收吾國太平, 而尙以可抽藩臣忠勳者也。 不腆之方物, 具于別幅。 卽新雪覆千山, 豐年嘉瑞。 餘事不宣。 別幅: 金二員二十一兩、朱四包四十兩、大刀十五把、段子一匹、繻子一匹、扇子五十本, 采納多幸。
> 성종 7권, 1년(1470 경인 / 명 성화(成化) 6년) 8월 24일(기사) 2번째기사 - 일본 국왕이 보낸 입도 등이 와서 서계와 토산물을 바치다

대마주 태수(對馬州太守) 종정국(宗貞國)의 특송(特送) 중 하선사(賀禪師)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그 서계(書契)에 이르기를,
“머리를 조아려 글을 조선국 예조 대인 족하(禮曹大人足下)에게 올립니다. 제가 정해년에 새로 국위(國位)를 계승하였는데, 다 음해 무자년에 선 황제(先皇帝)께서 보위(寶位)에 올라 서정을 친히 행하시니, 스스로 생각하기를, ‘존비(尊卑)는 비록 다르나, 같은 때를 만났으니, 마땅히 오래오래 장수하셔서 길이 경사를 함께 하도록 축원하여야겠다.’고 하였는데, 어찌 예측하였겠습니까? 흉보(凶報)를 금일에 들을 줄이야! 놀라고 마음이 떨려 애통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진강차랑좌위문(津江次郞左衛門)의 아들 중 하선사를 보내어 집사(執事)에게 조상을 드리고, 향(香) 3근과 감초(甘草) 15근을 올리니, 거두어 주길 바랍니다. 비록 황공하오나 함께 써서 계달(啓達)하는 것은 내가 축전주(筑前州)에 건너가서 강한 적이 에워싼 큰 진(陣)을 물리쳤으므로, 부상 전하(扶桑殿下)의 높은 명령을 받들어 종 형부 소보(宗刑部少輔)의 관직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서계에 ‘종 형부 소보’라고 써서 보내는 것입니다. 먼저 제가 벼슬을 한 자축(自祝)의 의미로 부선(副船)에 비록 사소하나 큰 칼 5자루를 진상하니, 받아주시면 다행하겠습니다. 비록 번거롭고 잡다하여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하나, 소망하는 물건은 면주(綿紬)·면포(綿布)·백저포(白苧布)·인삼(人蔘)이며, 또 제위(帝位)의 축례(祝禮)는 내가 관작을 받은 축의(祝儀)로 사선을 보내는 것이 조금 늦었습니다. 그리고 이 배의 주인이 나에 대해서 자주 바라는 것을 내가 족하에게 하소연합니다. 이 사선(使船)은 오래된 배이므로, 송판못[板釘]·거멀못[鉅未釘]·육지에서 나는 모든 부속품들을 내려 주시면 다행하고 다행하겠습니다. 건강에 조심 하소서. 이만 그칩니다.”
하였다.

○對馬州太守宗貞國特遣僧賀禪師等, 來獻土宜。 其書契曰:
頓首上書朝鮮國禮曹大人足下: 僕, 丁亥之歲, 新繼國位, 翌歲戊子, 先皇帝踐寶阼而臨萬機, 自謂: “尊卑雖異, 遇合時到, 當獻眉壽于億萬歲, 而永同斯慶。” 何圖聞晏駕于今日? 驚懼悸慄, 不勝哀痛之至。 謹爲專使津江次郞左衛門子僧遣賀禪師, 奉致下弔于執事, 準上香三斤、甘草十五斤, 照亮。 雖恐怖, 題一紙, 令啓達。 余是渡筑前州, 而退强敵圍大陣, 所以承扶桑殿下之貴命, 而賜宗刑部少輔官職, 此書契書宗刑部少輔而遣之者也。 先以小僕爲官祝, 而載副船, 雖輕微進上, 大刀五振, 采納多幸。 雖繁多不省汗顔, 所望件物, 綿紬、綿布、白苧布、人蔘。 且又帝位祝禮, 予賜官爵爲祝儀, 而可渡使船, 聊以遲遲者也。 次此船主就余頻望之, 余上訴足下, 此使船舊船也, 被賜板釘、鉅末釘、陸物諸緣具等者, 多幸多幸。 保調。 不宣。
> 성종 7권, 1년(1470 경인 / 명 성화(成化) 6년) 9월 11일(병술) 3번째기사 - 대마주 태수 종정국의 특송 하선사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일본국(日本國) 경극전(京極殿) 경조윤(京兆尹) 좌좌목씨(佐佐木氏)와 강기운 삼주 태수(江岐雲三州太守) 태선 대부(太膳大夫) 입도(入道) 생관(生觀)이 사람을 보내 와서 토의(土宜)를 바쳤다. 그 서계(書契)에 이르기를,
“황제 폐하(皇帝陛下)의 수(壽)가 남산(南山)처럼 높고, 덕(德)은 동해(東海)에 젖으시어, 부상(扶桑)의 물이 조회하고 계림(雞林)의 들[野]이 성대하기를 빌고 빕니다. 신(臣)은 선조 이래로 대대로 일역(日役)에서 사사(士師)가 되니, 마치 진(晉)나라의 범자(范子)와 같은 자이므로, 오로지 궁마(弓馬)를 맡아 부조(父祖)의 업(業)을 실추시키지 않았습니다. 본조(本朝)에서는 정해년 이래로 중원(中原)에 난리[風塵]가 나서 전쟁이 사방에서 일어나매, 신의 고을도 함께 싸움터 안에 들어가서 적을 많이 대하게 되니, 요역(徭役)에 나가느라 농상(農桑)을 폐기하여 피륙이 가장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사졸(士卒)들이 타지(墮指)의 재앙에 많이 곤고(困苦)하여 마치 백등(白登)의 포위를 당한 것과 같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귀국의 명주와 무명의 은혜를 내려 주시면, 삼군(三軍)에서 얼어 죽는 것을 구제하고 황제의 은혜를 만세토록 우러를 것입니다. 변변치 않은 토산물 몇 가지를 별폭(別幅)에 갖추어 적으니, 살펴주시면 다행으로 여기겠습니다.”
하였다.

○日本國京極殿京兆尹佐佐木氏ㆍ江ㆍ歧ㆍ雲三州太守大膳大夫入道生觀遣人來獻土宜。 其書契曰:
皇帝陛下壽聳南山, 德涵東海, 扶桑之水朝宗, 雞林之野盛大, 至禱至禱至祝至祝。 臣先祖以來, 家世士師日域, 猶如范子之於晋國之者, 專司弓馬, 莫墜箕裘之業。 本朝丁亥而降, 中原風塵, 干戈四起, 臣之敝邑, 江入戰圖, 雲接賊壘, 徭玆俗廢農桑, 最乏絺綌。 是故士卒多困墮指之厄, 若被白登之圍。 伏望忝蒙貴國家紬幷木綿之恩惠, 則救凍死於三軍, 仰皇庇於萬歲之者也。 不腆土宜, 件件具在別幅, 鈞察惟幸。
> 성종 28권, 4년(1473 계사 / 명 성화(成化) 9년) 3월 13일(계묘) 3번째기사 - 일본국 경극전 경조윤 좌좌목씨 등이 사람을 보내 와서 토의를 바치다

일본국(日本國) 옹아기월능 5주 총태수(甕何紀越能五州摠太守) 전산 우금오독(畠山右金吾督) 원의취(源義就)가 종상 서기(宗祥書記)를 보내어 와서 토의(土宜)를 바쳤다. 그 서계(書契)에 이르기를,
“삼가 금황제(今皇帝)께서 성수(聖壽)가 무강(無彊)하시기를 빌고 빕니다. 엎드려 아뢰건대 지난해 물건을 내려 주신 은혜는 산보다 무거워서 털을 뽑아 세어도 부족하니, 은광(恩光)이 중하고도 후합니다. 그런데 근래 당한 병란(兵亂)의 재앙으로 신(臣)의 할아비가 세운덕본사(德本寺)가 불타 없어졌습니다. 제가 전쟁하느라고 겨를이 없기는 하나, 절을 다시 일으키려는 뜻을 버리지 못하여, 세재(世財)를 다 써도 모자라서 이루기 어려우므로, 귀국에 힘입어 권진(勸進)합니다. 우러러 바라건대 녹물(祿物)을 많이 내려 주시는 은혜를 입으면 다행이겠으니, 살펴 주소서. 진상(進上)하는 물건은 별폭(別幅)에 적었습니다.”
하였다.

○日本國雍、何、紀、越、能五州摠太守畠山石金吾督源義就遣宗祥書記來, 獻土宜。 其書契曰:
恭惟今皇帝聖壽無彊至祝至禱。 伏啓前年品物之恩賜, 重於丘岳, 不足拔髮, 恩光惟重惟厚。 然近來所逢亂災, 臣祖父營立德本寺燒失矣。 吾雖不遑干戈, 未休再興志, 盡世財以少難成, 故憑貴國爲勸進。 仰冀蒙祿物之廣惠者多幸, 高察。 進上在別幅。
> 성종 45권, 5년(1474 갑오 / 명 성화(成化) 10년) 7월 3일(병진) 4번째기사 - 일본국 옹아기월능 5주 총태수 원의취가 종상서기를 보내 토의를 바치다

일본국(日本國) 방장섭천 4주 태수(防長攝泉四州太守) 대내 별가(大內別駕) 다다량 정홍(多多良政弘)이 사람을 보내 와서 토의(土宜)를 바쳤다. 그 서계(書契)에 이르기를,
“삼가 황제 폐하(皇帝陛下)께서 명덕(明德)이 일월(日月)보다 빛나고 성수(聖壽)가 장래에 장구(長久)하시기를 빌고 빕니다. 상국(上國)과 우리 선조(先祖)가 통호(通好)한 지 정홍(政弘)까지 26대째입니다. 상국과 대주(對州)와 아직 동맹(同盟)하기 전에 자주 전쟁하였는데, 그 때에 신(臣)의 선인(先人)이 상국을 위하여 구원병을 보내어 사졸이 죄다 전사하고 한 사람도 귀국하지 못한 것이 이제 80여 년 전의 일입니다. 게다가 존명(尊命)을 받들어 수우(水牛) 암수를 바치기도 하였으니, 그렇다면 선인의 상국에 대한 충성이 적지 않았다 하겠습니다. 정홍은 그 후사(後嗣)로서 임진년에 처음 사자(使者)를 보내어 선인이 맺어 온 구호(舊好)를 닦았는데, 그때 구례(舊例)에 어그러지는 일을 당하여 아껴 주시는 뜻이 매우 없었습니다. 집사(執事)가 옛 맹약(盟約)을 잊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또 사자가 변변치 못하였기 때문입니까? 정말 모를 일입니다. 그렇기는 하나 존명에 따라 곧 거듭 사선(使船)을 보내어 명을 받고자 합니다. 따라서 유구국(琉球國)에서 보내 온 사향(麝香) 1필(匹)을 존명을 받들어 바칩니다. 정홍이 몇 해 전부터 산명 좌금오(山名左金吾)의 군사를 돕느라고 경사(京師)에 머문 지가 몇 해 되었는데, 지난해 3월 18일에 금오가 서거(逝去)하고 그달 28일에 세천 경조(細川京兆)도 서거함에 따라 두 집안의 자제들이 점점 화목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 전하(殿下)가 대명국(大明國)에 사선(使船)을 보내고자 하매, 신이 명을 받들어 배를 꾸미는데, 공사간(公私間)에 그 비용이 매우 많습니다. 상국의 풍부한 재물의 나머지로 은사(恩賜)를 굽어 내리시기를 바라며 앞으로 갈수록 옛 맹약에 따라 충절(忠節)을 지키고자 합니다. 대명국과 유구국에서는 신에 대하여 은문(恩問)이 더욱 후한데, 상국만이 옛 맹약을 잊으신 듯합니다. 교맹(交盟)이 보탬이 없다고 생각하신다면, 보명(報命)에 따라 그 뜻을 알아서 엎드려 진정을 아뢰겠습니다. 변변치 않은 토의(土宜)나마 작은 뜻을 표합니다.”

○日本國防、長、攝、泉四州太守大內別駕多多良政弘遣人來, 獻土宜。 其書契曰:
恭惟皇帝陛下仰明德之超乎日月, 祝聖壽之富于春秋, 至禱至祝。 上國與我先祖通好, 至政弘, 二十有六代也。 因上國與對州, 未同盟之先, 屢及兵爭矣。 臣之先人, 爲上國遣救之兵, 士卒盡戰死而無一人之歸于國, 而今八十餘歲也。 加之承尊命, 水牛牝牡進之, 然則先人於上國, 其忠不少者歟? 政弘爲其後胤, 壬辰歲初, 以使者修先人之舊好, 寓合違舊而甚無愛惠之趣。 執事其遺忘舊盟歟? 抑又依使者之不肖者歟? 不審不審。 雖然猶依尊命, 卽又重遣使船, 伏聞命者也。 次自琉球國賜麝香一匹, 承尊命可進貢之。 政弘數歲之先, 救山名左金吾之戰而留京師者有年矣。 去歲三月十八日, 金吾已逝去, 同四月二十日細川京兆亦逝去, 因而兩家之子弟, 漸以和睦矣。 於玆我殿下將遣使船於大明國, 臣承命以粧船, 云公云私, 其費鉅多也。 偏仰上國之餘波, 俯垂恩賜, 自今以往, 愈以舊盟抱忠節者也。 其大明國、琉球國之於臣也, 恩問尤厚矣, 上國獨似忘舊盟。 交盟若爲無所益者, 依報命以得其心, 伏布腹心。 不腆土宜, 聊表微志耳。
> 성종 45권, 5년(1474 갑오 / 명 성화(成化) 10년) 7월 27일(경진) 3번째기사 - 일본국 방장섭천 4주 태수가 사람을 보내 토의를 바치다
해달 15-09-05 20:54
   
일본국(日本國) 대마주 태수(對馬州太守) 종정국(宗貞國)이 특별히 종무승(宗茂勝)을 보내어 와서 토의(土宜)를 바쳤다. 그 서계(書契)에 이르기를,
“공손히 생각건대 황제 폐하(皇帝陛下)는 거룩한 지위의 높음이 더욱 튼튼하시고, 거룩한 수명의 길기가 더욱 장구하시기를 극진히 축원하옵니다. 출우수(出羽守) 종정수(宗貞秀)에게 매양 해마다 한 척의 배를 보내도록 하여 숙배(肅拜)를 하게 하시니, 실로 성은(聖恩)이 매우 큽니다. 근년 이래로 그 사람됨이 순후하고 신중하여 다년간 일에 숙련하였기 때문에 저희 제종(諸宗)에서 뽑아 정병(政柄)을 맡기고 신(臣)은 이제 주로 획락(畫諾)만 할 따름입니다. 대저대마도(對馬島) 한 주(州)가 귀국(貴國)의 신하(臣下)가 아님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입은 은혜와 보내는 배[船]의 수효도 각각 차등이 있었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지금부터 이후로는 일본 사선(使船)의 수가 저희 제종(諸宗)이 소유하고 있는 것의 배(倍)가 되어 매년 10척의 배를 보내게 해주는 것은 얼마나 지나친 다행이겠습니까? 이미 신에게 허명(許命)하셨으니, 어찌 귀국(貴國)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인하여 병부 소보(兵部少輔) 종무승(宗茂勝)과 대호군(大護軍) 피고여문(皮古汝文)을 올려 보내어 구두로 거듭 개진(開陳)하게 하였으며, 또 삼포(三浦)의 쇄환(刷還)하는 일은 두 번에 걸쳐 이미 연락(然諾)을 드렸습니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수년 동안 상도(上都)로부터 하읍(下邑)에 이르기까지 군사 일로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 전과 같이 시행하게 되어 마치 식언(食言)을 한 것 같아서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이제 이미 종무승 등을 보내어 자세히 말씀드리니, 존명(尊命)을 받들어서 며칠 내로 쇄환이 이루어지게 하겠으므로 감히 글로써 아뢰옵고 다 갖추지 못합니다.”
하고, 또 서계(書契)에 이르기를,
“요전에 내이포(乃而浦)와 부산포(富山浦)의 주민의 가옥이 서로 연접하여 화재를 만나 모두 잿더미가 되었는데, 이에 황송스럽게도 관원을 보내시어 술과 안주를 갖추어 서로 위로하면서 먹게 하시고 거기다가 관곡(官穀)까지 더하여 서로 진제(賑濟)하는 데에 이르렀습니다. 비록 우리 백성이라도 바다가 막히고 땅이 달라서 완급(緩急)을 구원(救援)할 수가 없는데, 이제 성은(聖恩)의 지중함을 실감하고 그윽이 부끄러움을 품었으나 너무도 절실하고 황송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지난해에 귀국의 중[僧]으로서 표류(漂流)하여 오도(五島)에 이른 자를 만난 즉시에 귀국으로 보냈더니, 보답으로 하사(下賜)하신 것이 더욱 후하여서 건건(件件)이 진기(珍奇)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습니다. 특별히 내려 주신 숙상(驌驦)은 모든 말 중에 특출하고 빠르기가 월등하여 용(龍)이 물을 벗어난 것 같았습니다. 옛말에 ‘말 한 마리가 나가고 나니 기북(冀北)에 말이 없다.’란 말이 있는데, 이제 이 말이 오고서는 우리 한 고을[對馬州]에 또한 말다운 말이 없게 되었습니다. 기쁘고 섭섭함을 아울러 느끼며 감사하는 정성이 지극함을 견딜 수 없습니다.”
하였다.

○日本國對馬州太守宗貞國特遣宗茂勝來, 獻土宜。 其書契曰:
共惟皇帝陛下聖帝之巍巍也, 愈固愈堅, 聖壽之緜綿也, 可久可長, 至祝至祝。 宗出羽守貞秀每歲遣一船, 以令致肅拜, 實聖恩之鴻者也。 頃年以來, 以其爲人惇重而屢練于事, 特拔于諸宗而委以政柄, 臣今主畫諾而已。 大凡對馬之一州, 無非貴國之臣, 故所蒙之恩顧, 所遣之船數, 各有差品。 伏庶幾自今以往, 彼使船之數, 倍于諸宗所容每歲遣十船者, 何幸過之乎? 彼已許命于臣, 豈其爲貴國不竭忠乎? 因差宗兵部少輔茂勝、大護軍皮古汝文以遣之, 口實婁陳者也, 又三浦刷還之事, 兩回已致然諾。 雖然數歲之間, 自上都至下邑, 不遑軍事。 以是因循于今, 頗似食言, 不任慙汗。 今已遣茂勝等委悉, 以承尊命, 而致刷還于不日, 肯以書奏不備。
又書契曰:
于前乃而浦、富山浦民屋相繼, 以罹于鬱攸之災, 悉爲灰燼, 於玆忝遣官使, 具酒餚以相勞餉, 加焉家散官穀, 以至相賑濟。 雖爲吾民, 以海隔地異, 不得救急緩, 今感聖恩之重, 而竊抱愧羞, 不任激切屛營之至。 去歲貴國之僧漂流到五島者, 隨得而送之于貴國, 報賜尤厚, 件件無不奇珍。 特所賜驌驦, 逸群絶足, 如龍之脫水。 ‘昔一馬已去而冀北空其群’, 今此馬已來, 而吾一州又空其群者也。 喜懼交幷, 不堪謝忱之至。
> 성종 48권, 5년(1474 갑오 / 명 성화(成化) 10년) 10월 6일(무자) 3번째기사 - 일본국 대마주 태수 종정국이 특별히 종무승을 보내 토의를 바치다

일본국(日本國) 대내(大內) 대중 대부(大中大夫) 좌경조윤(左京兆尹) 방장풍축 4주 태수(防長豐筑四州太守) 다다량 정홍(多多良政弘)이 사람을 보내어 와서 토의(土宜)를 바쳤다. 그 글에 이르기를,
“조선국(朝鮮國) 예조 참판 족하(禮曹參判足下)께 복계(覆啓)를 드립니다. 삼가 살피건대 〈건강이〉 청승(淸勝)하시다니 기쁘고 위안이 됩니다. 저희 〈집안은〉 계통(系統)이 귀국(貴國)에서 나왔고, 대대로 구호(舊好)를 돈독히 한 지가 오래 되어 더욱 도타왔습니다. 이 때문에 빙사(聘使)가 끊임없이 왕래(往來)하여 덕으로 다스리는 정화(政化)가 하국(下國)에까지 미쳐 남달리 융성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여러 해를 계속해서 제장(諸將)이 도적[賊]을 토벌한 이래 옹희(雍熙)의 교화(敎化)에 회복됨을 얻지 못하였고, 편맹(編氓) 또한 농상(農桑)을 업(業)으로 삼음이 없으니, 절박하게 근심할 만한 바입니다. 전년[前歲]에는 공손히 양사(兩使)를 보내어 진제(賑濟)를 구(求)하였는데, 먼 곳의 사람을 회유하는 은택(恩澤)이 얕지 않은 것이겠습니까? 사자[伻]가 돌아오매, 배사(拜賜)하였습니다. 다만 부족되는 것은 동철(銅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보광원(寶光院) 요신(堯信)을 전개(專价)로 삼고 대조원(大照院) 종모(宗模)를 부사(副使)로 삼아, 삼가 원지(爰旨)의 흉도(凶徒)의 여얼(餘孽)을 아룁니다. 명(命)이 급히 내리니, 내년 맹동(孟冬)에는 장차 토벌할 것인데, 전포(戰袍)·기치(旗幟)의 비용(費用)인 동철(銅鐵)·면주(綿紬)·목면(木綿)을 인서(仁恕)하여 거만(鉅萬)을 상사(賞賜)하시면 진실로 다행하겠습니다. 간절하고 애틋한 마음으로 전개(專价) 요신(堯信) 등에게 명하여 발돋움하고 우러러보는 사사로움을 빨리 아뢰게 하면서, 변변치 못한 토의(土宜)를 별폭(別幅)에 갖추었습니다. 애오라지 양박(涼薄)의 정성을 나타내어 조빙(朝聘)하오니, 빌건대 갈마들여 통하게 해 주소서. 오직 황제 만세(皇帝萬歲)와 재신 천추(宰臣千秋)를 바랍니다.”
하였다.

○己丑/日本國大內大中大夫左京兆尹防長豐、筑四州大守多多良政弘, 遣人來獻土宜。 其書曰:
奉覆朝鮮國禮曹參判足下。 密審淸勝, 欣慰。 我系出貴國, 世敦舊好, 久而彌篤。 是以聘使, 往來不絶, 無爲政化, 延覃下國, 以爲隆異, 然連年諸將, 討賊以來, 未獲復于雍熙之化。 編氓亦無業農桑, 切以所可憂也。 前歲恭遣兩使, 求于賑濟, 懷遠之澤, 不淺乎? 回伻拜賜, 只欠銅鐵耳。故復以寶光院堯信, 爲專价, 以大照院宗模, 爲副使, 謹啓爰旨。 凶徒之餘孽也, 命頻下, 來歲孟冬, 將討之。 戰袍旗幟之費用, 銅鐵、綿紬、木綿, 仁恕賞賜鉅萬, 寔爲幸焉耳。 心曲命專价堯信等, 馳企仰之私。 不腆土宜, 具于別幅。 聊施涼薄之誠, 頫乞遞徹。 惟望皇帝萬歲, 宰臣千秋。
> 성종 296권, 25년(1494 갑인 / 명 홍치(弘治) 7년) 11월 4일(기축) 1번째기사 - 일본국에서 토의를 바치고 전포와 기치의 비용으로 동철·면주 등을 하사해 주길 청하다
크림 15-09-05 22:13
   
조선이 중국에 조공한건 사실이구요. 주기가 정해져있다고 들었음.
일본도 조공을 해야했구요. 일본은 조공할 기회가 적었죠

헌데 조공이 지금 생각하는 조공하고 느낌이 좀 달랐습니다..  그냥 갔다바치는게 아닙니다.
일종의 무역비슷한 느낌이 있어요.

일단 조공을 하면 중국에서 그에 상응하는걸로 다시 내주는데  이게 조공물량보다 훨씬많았습니다.
대국이라서 체면이있었죠. 그래서 주변국가들이 조공할려고 진짜 있는거없는거 다박박긁어서 갔다줌....
그러면 양이 뻥튀기 되서 돌아오니 서로 하려고 난리였죠.

중국은 그상황을 부담스러워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