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15억 중국인들 대부분이 자기들을 한족이라고 부르잖아요? 근데 사실은 한족이 중국에서 가장 큰 민족이긴 하지만, 여러 민족이 섞인 상황이 현 중국인데. 원래 오리지널 한족이 정확히 어디서 온 민족인가요??? 양쯔 강 이남 지역 강남에 살던 애들이 본토 한족인 건가요? 그럼 지금 중국이, 아주 큰 비율의 남쪽에 살던 한족+여러 북방민족 = 현 중국. 이렇게 되는 건가요??? 갑자기 궁금해서 ㅇㅅㅇ
한족은 원래 황하 북쪽 강변 지역이 발원지이던가 그럴 겁니다.
중국 대륙을 보면 수평으로 가로지르는 큰 강이 두개 있습니다. 위쪽 게 황하, 아래쪽 것이 양자강입니다.
중국에서 강남 지방이라는 게 양자강 이남을 강남이라고 부르는 건 데, 이 지역은 한족이 원래 안살았습니다.
황하 근방에 살고 밑으로 내려가봐야 양자강 북쪽에서 살았는 데, 거란족(금나라)에게 밀려서 북쪽을 빼앗기고 남쪽으로 내려가 살 때(남송) 이후로 남쪽 지역이 개간되고 거기 몰려와 살기 시작한 거죠. 양자강 이남은 밀림 + 늪 지역이 많아서 신천지 개척의 형태였다고 그럽니다. 풍토병이 많았고 거기 살던 밀림 원주민들도 많았죠 (대표적인 게 묘족(몽족)).
지금 현재 수도 북경을 제외하면 최대도시가 상하이인데, 상하이나 다른 남동쪽 거대 해안 도시들은 전부 원래 중국 한족의 발원지가 아닙니다. 한족이 밀려와 남쪽을 개간하면서 한족 지역이 되어버린 거죠.
중국 한족이 밑으로 밀려내려와 강남을 개발하면서, 그쪽에 원래 살던 이민족들이 연쇄적으로 밀려내려가는 데요, 그렇게 해서 세워지는 게 베트남이랑 라오스, 태국 등의 동남아 국가입니다. 베트남 역사 로 검색해서 보시면 원래 베트남족이 살던 곳은 중국의 광서성, 복건성 그쪽인데 한족에게 패해서 밀려내려와 현재 지역에 사는 것입니다. 태국은 중국 운남성 근방에서 살다가 대리국이 망해서 중국에 흡수된 후 남쪽으로 이주해서 태국을 의 뿌리가 되는 나라들은 세웁니다. 라오스는 태국의 방계 민족이라서 역시 마찬가지구요.
중국 한족이 왜 밑으로 밀려내려왔냐 하면, 중국 본토 북쪽지역에 원래 한족외에도 다른 민족들이 많이 살았었습니다. 허허벌판에 한족 혼자 살았던 게 아니라 다른 강성한 이민족들이 많았죠. 예를 들어 한나라가 망하고 삼국시대 이후에 중국 5호16국시대가 열리는 데, 여기 보면 5호가 다섯개 이민족을 말하는 데 선비족, 강족, 흉노족, 저족, 갈족 이렇구요, 얘네들이 중국 북부에다가 나라들을 세운 거죠. 유명한 이민족 왕조로는 수나라, 당나라 등이 있습니다. 수나라는 선비족이 세운 중국 국가였는 데, 우리나라 고구려를 침범했다가 격퇴당했었죠. 이후 세워진 당나라는 중국 한족 국가로 인정받고 있지만, 당태조 이연이 선비족 혼혈인가 그럴 겁니다. 혼혈왕조 입니다.
이후에도 금나라(거란족), 원나라(몽골족), 청나라(여진족) 등 이민족 왕조들이 많았는 데, 상당수가 한족에게 흡수당했습니다. 무력으로는 이민족 집단이 더 강성했지만, 인구 쪽수가 워낙에 많고 문명의 지식 수준이 우월하면, 혼인관계로 엮이다가 결국에는 흡수되더군요. 여진족이 지배하던 청나라 시절, 엄연히 여진족이 한족보다 우대받았던 시대였지만, 결국 여진족은 다 한족에게 흡수되어버렸습니다. 여진족 말을 안쓰고, 여진족 문화를 버리고 스스로를 한족이라고 여기면 한족이 되어버린 거죠.
한족이 지금처럼 커져버린 과정에서 흡수한 이민족이 수십개인지라, 이거 관련해서 한족 문화가 어떻게 형성되고 변형되면서 커져왔나를 다룬 책들도 여럿 있고 그렇습니다. 한족 문화는 어느 한 민족문화가 계속 이어져온 게 아니라, 흡수 병합을 거듭하면서 다민족문화공동체 처럼 되어버린 특수한 케이스입니다. 원래 혈통 종족이 뭐였든 한족 문화를 따르고 스스로 한족이라고 여기면 한족인 겁니다 (미국이 전세계로부터 이민자를 받아들여 만든 코스모폴리탄 문화라고 하는 데, 한족이 그런 케이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간혹 우리나라의 근원이 어디인가 동북아 국가들끼리 DNA조사해놓은 것을 보면, 한족 같은 경우 북쪽과 남쪽, 동쪽과 서쪽이 꽤 다른 것을 알 수 있지요. 인구수가 큰 것도 있지만, 이민족을 많이 흡수해서 뒤섞이다 보니까 그런 점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한족의 중국어 발음은 원래 한족의 발음과 아주 크게 다릅니다. 이민족들과 섞이면서 언어가 달라져버렸습니다.
...현대의 중국어는 왜 그렇게 당나라 등 고대의 중국어와 달라졌을까. 예를 들어 중국어에는 혀를 말아서 내는 권설음이라는 것이 있다. 이 발음은 원래 권설음이 많았던 북방의 몽골족이나 만주족 발음에서 온 것으로 추정된다. 몽골족은 원나라를, 만주족은 청나라를 개국해 오랜 기간 중국을 지배했는데, 원래 언어란 지배층의 그것을 따라가게 마련 아닌가. 그러므로 현재의 중국어 발음은 원래 중국어 자체의 변화와 함께 북방민족의 영향이 수백 수천년을 두고 결합한 것이라는 얘기다.
그래서 북방에서 멀리 떨어질수록, 즉 남부지역으로 갈수록 중국 고대의 발음이 많이 남은 것으로 지적된다. 이를테면 광동어에서는 '三'을 '삼'으로, '學'을 '각'으로 읽는 등 우리와 비슷한 발음이 많고 받침(입성)도 상당히 많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후에도 금나라(거란족), 원나라(몽골족), 청나라(여진족) 등 이민족 왕조들이 많았는 데, 상당수가 한족에게 흡수당했습니다. 무력으로는 이민족 집단이 더 강성했지만, 인구 쪽수가 워낙에 많고 문명의 지식 수준이 우월하면, 혼인관계로 엮이다가 결국에는 흡수되더군요. 여진족이 지배하던 청나라 시절, 엄연히 여진족이 한족보다 우대받았던 시대였지만, 결국 여진족은 다 한족에게 흡수되어버렸습니다. 여진족 말을 안쓰고, 여진족 문화를 버리고 스스로를 한족이라고 여기면 한족이 되어버린 거죠. >??
19세기 말, 만주족 팔기군 병사가 한족 성주(시장)을 구타한 사건이 있었지만, 팔기군 병사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을 정도로 청나라 내내 만주족들은 정복자이자 지배자라는 신분적 특권을 누리고 살았다.
서구 열강과 일본의 공세에 몰려 위험한 상황에서도 청나라의 지배층들은 "나라를 외국에게 넘겨줄 지언정, 집안의 종(한족)에게는 절대로 줄 수 없다."라고 단언했을만치, 청나라는 엄연한 정복 왕조였다.
1850년대, 한족들로 구성된 태평천국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남경을 지키던 만주 팔기군 병사들이 태평천국군에게 모조리 살육당하자, 분노한 청나라 조정은 태평천국에 가담한 반란군 병사들이 항복해와도 절대로 항복을 받아주지 말고 전부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 바람에 태평천국의 난은 16년이나 오랫동안 계속되고 말았을 정도로 만주족과 한족 사이의 민족적 갈등은 심각했다.
- 청사 저자 임계순 -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강희제와 건륭제 등 청나라의 황제들은 자기 종족인 만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특히나 강희제 같은 경우는 만주족 장군과 대신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만주족끼리의 동질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으며, 누누히 "한인들의 잘못된 습관에 물들지 마라."라고 강조했다.
또한 청나라 황제들은 기회만 있으면 "만한일체"라고 하여 만주족과 한족이 평등한 관계라고 주장했지만, 마크 C. 앨리엇은 그러한 말은 공허한 선전 문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정말로 만주족과 한족이 평등한 관계였다면 어째서 청나라의 정부 기구는 만주족과 한족을 따로 분리해서 임명했는가? 또한, 만주족 팔기군 병사들은 대게 만성이라 불리는 독자적인 생활 공간 안에서 한족과 분리되어 자기들끼리만 살아갔다. 그리고 팔기군 병사들은 청나라 조정으로부터 매년 녹봉을 받고, 팔기군이자 만주족이라는 신분을 내세워 한족 상인들에게 물건을 외상으로 사기를 좋아했다. 이를 두고 어느 만주족 여인은 '물건을 외상으로 사지 않는다면, 만주족인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고 했을 정도로...
이밖에도 청나라 황제들은 피지배민인 한족이 만주족 행세를 하면서 정부 보조금을 타내는 현상을 무척이나 꺼려했고, 18세기 말에는 한족으로 구성된 팔기군인 한족 팔기를 강제로 해산시키고, 한족이 만주족처럼 꾸미고 다니지 못하게 철저히 감시했다
-마크 C. 앨리엇의 <만주족의 청제국>
만주족은 과연 한화(漢化)됐을까?
『최후의 황제들-청 황실의 사회사』
이블린 S. 로스키 저, 구범진 역
1635년 청 태종 홍타이지가 한 말이다. 그는 중원 대륙을 정복하기 직전에 이렇
게 말하며 ‘만주’라는 아이덴티티를 확립했다. 저자는 베이징 자금성에 있는 제1역사당안관에서 잠자고 있던 만주문 사료를 통해 ‘만주족 한화(漢化)론’을 조목조목 해체한다. 만주족 한화론이란 무엇인가? '신중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쑨원(孫文)은 일찍이 중국의 통치자인 만주족이 외래 민족이었기 때문에 중국이 구미의 침략에 저항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인들을 봉기에 동원해 만주족을 무너뜨리고 한족 국가를 세우고자 했다. “중국 인민은 공통의 피, 공통의 언어, 공통의 종교, 공통의 관습을 가진 한(漢), 즉 중화민족-단일하고 순수한 종족이다”라고 주장했다. 중국을 침공했거나 중국으로 이주해온 여러 민족들은 수백년에 걸쳐 한인 인구 속에 융합됐다는 논리였다. 이것이 쑨원의 ‘한화론’이다. 이것이 과연 역사적 팩트일까? 로스키는 ‘뿌(不, NO)’라고 말한다.
“모든 사회에서 치자(治者)의 시각은 피치자(被治者)의 시각과 크게 다르기 마련이다.” 게다가 국민국가가 등장하기 이전의 왕조국가에서 나라의 주인은 백성이 아니라 임금이었다. 따라서 한 왕조의 역사적 실체를 이해하려면 그 왕조의 주인이 누구였느냐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저자는 대중에게 공개할 의도가 없었던 만주어로 작성된 황실 내부의 당안 자료를 통해 ‘내부자의 시각’으로 청 황실을 해부한다. 논거는 다양하다. 우선 다중수도체제. 한인 신민의 천자가 머무는 중국 본토의 베이징, 만주인-몽골인의 칸의 거처인 만주의 성징(盛京, 지금의 선양), 티베트 불교인 라마교 신도들이 숭배하는 문수보살이 강림한 내몽골의 청더(承德)까지 총 세 개의 수도를 운용했다. 1762년 건륭제가 일 년 중 자금성에서 머문 시간은 1/3에 불과했다.
다음은 언어. 홍타이지는 앞에서 인용한 말과 같이 부족 아이덴티티 위에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만들기 위해 만주문자를 창제한다. 건륭제는 이에 덧붙여 사신들을 만나기 위해 스스로 몽골어와 티베트어, 위구르어 까지 익힐 정도로 코스모폴리탄형 군주였다. 특히 청이 러시아와 맺은 네르친스크 조약은 한자로 씌여진 문건을 남기지 않았다. 만주어와 러시아어만으로 기록을 남겼다. 러시아와의 외교는 한인들이 관여할 사항이 아니었다. 따라서 한자 사료만 보아서는 청나라 치자의 속내를 읽을 수 없다.
또 다른 에피소드. 어느날 건륭제는 너무 많은 한어가 만주어 상주문에 스며들었다고 불평했다. 대학사 나친을 우두머리로 태스크 포스팀을 만들었다. 낡은 한자 차용어를 대체할 새로운 만주어 단어의 목록을 만들었다. 이로써 한어에서 파생된 단어들이 만주어에서 대거 사라졌다. 대신 1,700개가 넘는 새로운 만주어 단어가 생겼다. 이를 통해볼 때 한국이 서울의 표기로 한청(漢城)을 버리고 서우얼(首爾)을 택한 것은 나쁘지 않은 시도다. 한족의 중국을 이웃한 민족의 현명한 ‘생존 노하우’인 셈이다. 자주 해볼 일이다. 한글이 영향을 끼친 한자어를 국어학자 이기문박사가 연구해 모시(毛施)와 삼(蔘) 정도를 찾아냈지만 그 조차 근거는 불분명하다.
저자는 이 밖에도 청 황실의 의복, 음식, 혼인제도, 기우제 등을 통해 한인왕조와 달리 청만의 독특한 제국통치술을 세세하게 논증한다. 한족의 왕조였던 송(宋), 명(明) 등의 왕조에서 빈번했던 황실의 반란, 외척의 발호 등을 어떻게 예방했으며, 광대한 이민족의 땅을 어떻게 아울렀던가에 대한 해법이 나온다.
이렇게 보면 청 황제들에게 유교는 제국의 일부분을 이루는 한족을 위한 이데올로기에 불과했다.청 제국은 몽골과 위구르, 티베트 등을 아우르는 이데올로기와 방법론을 갖췄다. 천자이면서도 칸이며 문수보살의 화신이었던 황제는 만주족이었기에 전체 제국의 통치가 가능했던 것이다. 시점을 현재로 옮겨 과거 청 제국의 영토를 물려받은 지금의 중국 공산당의 현실을 살펴보자. 그들은 효용이 다한 사회주의 대신 애국주의로 내부를 결속하고 ‘한족의 이데올로기’인 유교사상을 설파한다. ‘공자학원’이란 간판을 걸어 전세계에 중국어를 ‘선교’중이다. 얼마나 세계인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까? 청황실보다 발전된 전략이라고 자신할 수 있을까?
본서에 나오는 내용은 아니지만 넓혀보면 한화(漢化)의 허상은 조공(朝貢)에서도 똑같이 적용되지 않을까. 조공제도의 본질은 ‘실용적인 위계질서’였을 뿐이다. 종속의 관계가 아니었다. 즉, 중원의 황제 입장에서 보면 서쪽, 북쪽의 유목민들은 마냥 무력을 동원해 토벌할 수 없었다. 과거 중원왕조와 유목민족의 관계는 재물과 평화의 교환이 최선의 방책이었다. 심하게 말하면 비겁을 평화라 부른 셈이다. 중국 왕조는 대신 조공이란 이름으로 이를 보기 좋게 포장했다. 몐즈(面子, 체면)만 건지는 식이다. ‘아큐식 정신의 승리’의 과거 버전이었다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