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중근 의사 자서전 >>
... 차츰 장성해서는 총을 메고 산에 올라 새, 짐승등을 사냥하느라고 학문에 그다지 힘쓰지 않았다. 그래서 부모와 선생들이 나를 엄하게 꾸짖기도 했으나 끝내 복종하지 않았다.
어느 날 친한 친구 동문들이 서로 타이르며 권면했다.
"그대 부친은 문장으로써 세상에 이름을 떨쳤는데, 자네는 어쨰서 장차 무식한 하등인이 되려고 자처하는 것인가?" 했다. 나는 이렇게 대꾸했다.
"자네들 말도 옳네. 그러나 내 말도 좀 들어보게. 옛날 초패왕 항우가 말하기를 '글은 이름이나 적을 줄 알면 그만'이라 했네. 그랬는데도 만고영웅 초패왕의 명예가 오히려 천추에 남아 전한다네. 나도 학문 가지고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네. 저도 장부요, 나도 장부라네. 자네들은 다시는 내게 학업을 권하지 말게."
그 때 내 나이 17,18세쯤이라 나이는 젊고 힘은 세고 기골이 뺴어나 남에게 뒤지지 않았다. 평생 특성으로 즐겨하는 일이 네가지가 있었으니 첫째는 친구와 의를 맺는 것이요, 둘쨰는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요, 셋쨰는 총으로 사냥하는 것이요, 넷째는 날쌘 말을 타고 달리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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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기생방을 노다니며 토론하고 유쾌하게 술을 마시고 춤추고 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때로 기생에게 " 너는 절묘한 자색으로 호걸남아와 짝을 지어 같이 늙는다면 그 얼마나 좋은 일이겠느냐. 너희는 왜 그리하지 못하고 돈 소리만 들으면 침을 흘리고 정신을 잃고 염치불구하고 오늘은 장씨, 내일은 이씨에게 붙어서 금수의 행동을 하는 것이야"
내 말을 계집들이 수긍하지 않고, 고까워하는 빛이나 공손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면,나는 욕을 퍼붓기도 하고 매질도 했기 떄문에 친구들은 나의 별호를 번개입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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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해방 이후 한국은 이런 인간형을 가르친 적이 없다. 왜 그랬을까? 실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한국에 이런 장사소년들이 많아진다면 이승만 이래 군사독재정권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 공부 못하면 차라리 건달을 만들지언정 이토록 당당하고 패기만만한 젊은이들을 양산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안중근 자서전 같은 자료들은 전문가들의 손이나 도서관 구석에 숨겨두어야 한다. 대신 안중근은 목숨을 바쳐 국가에 충성했다는 얘기만 떠들어야 한다.
- 일본, 사라지거나,해방되거나 중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분석이라서 가져와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중근은 학문의 깊이를 탐닉하지는 않았지만 인간으로서, 혹은 장부로서의 식견과 그 깊이에 있어서는 지식인의 태도를 유지했다고 하지요..
과연 여러분은 애국지사라는 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