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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7-02 00:42
폴란드와 한국 역사
 글쓴이 : 흑요석
조회 : 2,715  

사람들이 폴란드를 한국이랑 역사가 비슷한 국가로 비교 많이들 하지 않나요? 뭐 비극적인 역사 그런 걸로..근데 말이 좀 안되는 게;; 우리나라는 이웃 국가를 이유 없이 침공해서 전쟁 일으키고 피해준 적이 없잖아요?? 제가 알기론 폴란드는 한동안 폴란드-리투아니아 제국으로 러시아, 스웨덴, 독일이랑 패권주의 경쟁하면서 다른 나라 침공하고 전쟁도 많이 일으킨 걸로 아는데...특히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엄청 가혹하게 굴기도 했고..우크라이나 랑 벨라루스 영토도 빼앗은 적 있는 걸로 알고 있거든요. 게다가 독일이랑 짜고 체코슬로바키아를 나눠먹기도 하고...그 후론 다들 아시다시피 독일과 소련에게 침공 받아 갈가리 찢어지지만. 이것만 봐도, 폴란드는 그냥 자기들 힘 있을 땐 이웃 국가 침공하고, 힘없으니 역으로 침공 받아 나라 사라지고, 자기들 역사 비극적이니 뭐니 하면서 감성팔이 하는 걸로 밖에 보이지 않나요? 도대체 폴란드가 다른 유럽 국가들이랑 다른 게 뭐죠?;;;폴란드는 그저 패권주의 경쟁에서 밀려 비교적 최근 역사가 안 좋으니 징징대는 걸로 밖에 안보이네요..자신들이 강한 시절에 전쟁일으키고 다닌 건 자랑스러운 역사고, 경쟁에서 밀려 침략당한 역사는 슬픈 역사다? 사람들이 폴란드랑 한국 역사 비슷하다고 비교할 때마다 좀 기분이 언짢은 ㅇㅅㅇ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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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빠주의 15-07-02 02:04
   
베트남 전쟁 민간인 학살 반성해야죠
     
Banff 15-07-02 02:23
   
전시 민간인에게 피해주지않은 군은 없습니다. 6.25때 희생자의 80%가 민간인이었고, 2차대전때도 과반이상이 민간인. 

원글 주제는 나라의 흥망성쇠얘기지, 군의 전략실수에 대한 얘기가 아닌듯하군요.
     
잠깐만 15-07-02 10:54
   
한국은 반성하고 있어요. 베트남 사건 모르는 사람도 있나요?? 일본처럼 잘못 가르치지도 않고, 부정하는 사람도 없죠.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인가가 베트남에 위령탑 세웠고, 그때 1차로 풀어지고, 박근혜 대통령이 2013년에 호치민을 위해 조문함. 박근혜가 베트남 파병한 박정희 딸로 알려지면서, 베트남 국민들의 한이 2차로 많이 풀렸어요.

베트남은 승전국이기 때문에, 그리고 한국군은 주체가 아니라, 미국 군대에 꼽사리 낀 군대였기 때문에, 딱히 한국군만 별로 신경 안 썼었어요. 베트남인들은 주체가 미군임을 잘 알고 있음. 그리고 한국 정부의 노력으로, 이제는 원한이 거의 없어요.

베트남 전쟁. 쪽바리들이 자신의 침략전쟁을 양비론 물타기 위해 잘 쓰는 것이죠.
비좀와라 15-07-02 02:13
   
베트남 전쟁 민간인 학살에 대한 획실한 증거는 있나요? 확실한 증거없이 전범자로 몰아 붙이는 것은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런 댓글이 왜 여기에 달립니까?
     
엄빠주의 15-07-02 02:17
   
우리나라는 이웃나라에 피해 입힌 적 없다고 말씀하시길래...
https://ko.m.wikipedia.org/wiki/니·퐁넛_마을_학살_사건
          
비좀와라 15-07-02 02:49
   
링크는 잘 보았습니다만 그 사건은 아직 확정이 되지 않고 있지 않나요?  그 사건은 한겨레에서 처음 보도 하였고 이에 해병전우회에 월남전 사건 당사자들에게 반론이 나온것으로 압니다.  거기에 나온 상황이나 인터뷰가 틀리다고요. 예를 들면 당시 청룡부대가 가자 않았는데 갔다고  하고 이를 바탕으로 기사를 작성했다고요.  반론 정정보도를 요청 했지만 한겨레 신문이 응하지 않아 해병 전우회에서 대규모 시위도 했지요 아마.

관련 기사나 내용을 올리고 싶은데 한겨레의 내용은 위키에 올린내용이고 그 반대의 내용이 올리졌던 사이트가 없어져서 올리지 못하겠습니다.  하여간 위 학살사건은 아직도 규명이 안된 사건으로 확정 된 것 같이 하면 안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확정되었다면 전범자로 처벌이 되어야 하는 것이고 아니라면 국가를 위해 봉사한 분을 모욕한 것이 되니까요.  혹시 이 사건에 대한 정부의 언급이나 입장 표명 관련 자료가 있으시나요?
          
헬로가생 15-07-02 05:26
   
그건 한 나라가 국가적으로 이웃 나라를 침략해 약탈하는 거랑은 많이 다르죠.
Banff 15-07-02 02:17
   


폴란드 한때 잘나갈때 영토. 물론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도 따지고보면 고구려 팽창의 역사가 있긴 하죠.
     
흑요석 15-07-02 03:50
   
와 :0 상당히 컸군요..이 정도 크기면, 거의 독일+프랑스 영토급인데 ㄷㄷ

우리도 고구려 때 팽창의 역사가 있기야 하죠..그 과정에서 중국 심기를 건드려서 많이 충돌했었고..하지만 그건 중국도 마찬가지라서 ㅋ 중국도 우리쪽으로 꾸준히 팽창하려했고 우리를 많이 침략하지 않았나요? 근데 정말 우리나라는 딱히 이웃나라를 이유 없이 침공해서 전쟁 일으킨 역사가 없지 않나요??? 조선 시대 때 여진족들 여러 번 혼내준 것 빼고는 대부분 한반도 내에서 신사적으로 지내지 않았나..
          
남성연대리 15-07-02 06:49
   
중국심기를 건드려? -_- ㅎ 그리고 어느나라든 영토팽창떄는 타국이나 땅을 침략한겁니다.
               
흑요석 15-07-02 09:44
   
그게 제 글이 말하고자 함이었는데...님 말대로 어느나라든 영토 팽창 때는 타국 땅을 침략했죠. 폴란드도 한 때 영토 팽창하면서 괴뢰국도 세우고 그랬구요..제가 볼 땐 동유럽에서 우크라이나가 제일 불쌍한데...
중국 입장에선 짜증났을 테니 심기를 건드린 거 아니겠나요? ㅋㅋ 짱깨들이 항상 내세우는 말이, 우리는 세계의 중심! 이러니까요 ㅋㅋㅋ
     
굿잡스 15-07-02 08:52
   
고구려는 팽창기가 아니라 고조선 후기 열국시대(북만주의 강자 부여부터 동예,옥저,

남부의 삼한등)의 분열된 우리 강역을 회복했다는 게 맞군요.

애초에 우리의 주활동무대와 근간은 만주일대입니다. 고구려가 압록강 상류에서

평양일대로 내려오고 신라의 서라벌이 융성해지면서 남부일대의 문명이 촉진된거지

이전의 문명의 발달은 우리의 만주 요하에서 북한 북부지역이 일찍히 더 발달.


고조선과 밀접한 방어형 밀집 석성들이 요서일대 기원전 2000년 경에 이미 나오고

있고 학계에서도 고조선시대는 요서 산해관일대의 난하쪽을 기준으로 해서 요동

으로 보는 견해도 어느 정도 나오는 주장입니다.

소위 하한족들은 서토 내륙에 쳐박혀 고작 수백리를 점유하다 북방, 동이족의

남하에 도리어 소멸되어 버린 종족들이고.


신석기 시대고 청동 철기등 북방 초원길을 따라 유라시아와 동북방의 문화 교류의

촉진이 더 빠르고 두드러지게 나타남.(이를 통해 북방지역에서 남하하는 Y벨트를

타고 서토 내륙의 하한족들이 영향을 받아 채도토기등이 이후 500여년 늦게 나오면서

문명이 발전하고 서토 최초의 실체하는 상나라 역시 동북방 동이족이 내려와 정복한

왕조사)


우리나라의 역사는 폴란드처럼 일시 어쩌고도 전혀 아니군요.

요하 만주 일대를 고조선 고구려 발해, 후발해, 금(신라계와 발해인 연

합)와 중세 고려까지 수천년간 요동 만주 일대를 직접 지배나 자치권을 가진

강대국이였고

도리어 고려 말기 2차 요동정벌에서(이미 앞서 이 요동은

고려의 자치권으로 상당수의 고려인들이 거주하고 활동하든 공간임)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고 정도전의 요동정벌 계획등이 무산되면서

남북한 일대로 축소되어 버린 상황이고(이것도 15,6세기 조선은 동만주의

여진족부터 왜,류큐, 동남아등에 독자적 황제적 직간접 세력권을 구가하며

정치,외교, 무역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여진족, 왜등을 조선의 신민으로 봤음) 요동일

대에 짱국의 실질적 지배는 최근 수십년동안일뿐.
          
흑요석 15-07-02 09:06
   
약 2년간을 눈팅만 하면서 굿잡스님 글을 많이 읽어 왔는데요. 많이 알아가네요!
그럼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면서 결정적으로 한반도 일대로 축소되어 버린 거네요? 이거 되게 안타까운 거 맞죠? ._. 과거 조상님들이 달리던 만주벌판에 현재 중국인들이 바글바글한 거 생각하면 참... 되게 안타까운 ㅠ
               
굿잡스 15-07-02 09:15
   
고조선 시대는 느슨한 후국들을 거느린 시대로 보는데

이게 귀한 청동기의 독점적 권위가 철기시대가 도래하면서 각지에 더 흔하게

구하고 강한 금속인 철기로 무장되자 점차 따로 세력화 됩니다. (각지에

왕을 자처) 이건 서토의 춘추전국시대도 다르지 않고.

그런 가운데 위만이 고조선으로 넘어오면서 말기 위만

조선으로 정권 교체가 되면서 준왕이 남으로 내려와 삼한등 북방의 부여부터 본격적

열국시대가 도래하고 이후 이런 열국중 하나인 서북방의 위만조선이 한무제 시기에

무너지고 한나라의 세력이 요동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자

고구려가 다시 고조선재지 5부를 기반으로 옛 강역을 회복하고자 하는

다물정신을 국가 이념으로 초기부터 한나라와 격렬한 투쟁을 하게

된 것이죠. 즉 고구려는 초기부터 이런 우리의

분열된 옛강역을 회복하기 위해 한나라와 당당히 투쟁하면서 성장하고

본래의 강역인 만주를 석권한 천년사직이였음.

이후 발해, 후발해등으로 이어진 역사이고. 중세 고려도 금나라가 무너진

남만주일대에 원시기 자치권을 행사하면서 고려인들이 활동하고 있던 공간.



그리니까 지금 우리가 무슨 정치적 어느 정권의 치정을 넘 부각하기

위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어쩌고 전파시키다 보니 세계사람들이

우리를 마치 졸부 이미지처럼 착각하고 우리 역사를 오해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미 우리는 수천년간 동북방의 패자로 혹은 최강대국의 반열에서 패권을

행사해왔던 나라였고 근대시기라는 세계사적 거대한 물결시기에 잠시

패권을 잃고 잽이 근대 서양 무기에 혈안이 되어 무장한채 대한제국을

강점하면서 악랄한 수탈과 6.25로 인해 일시 약해지고 가난했던 것일 뿐.
                    
흑요석 15-07-02 09:35
   
섬나라 원숭이들이 우리나라보다 잘 나간 적은 그럼 백년도 안되겠네요 ㅋㅋ
일본이야 말로 역사상 대부분 우리나라보다 가난했죠? 예전에 어떤 분 글 보니깐 조선시대 때 전란중이거나 극심한 가뭄이 생기지 않는 이상 밥 굶는 일도 없었고, 일본은 막 자기 자식까지 죽이고 그랬다는 글을 본 기억이..ㅋ
굿잡스 15-07-02 09:03
   
장발영(張發潁)의 저서
<봉황토템 동이인 및 그 문화의 공헌>- <사회과학집간>2001년 2기- 에서

동이문화의 유적분포는

- 연산(燕山)의 남북과
- 료녕(遼寧)의 부신사해문화(阜新查海文化)를 포함해서
- 심양(沈陽)의 신락문화(新樂文化),
- 산동의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 하무도문화(河姆渡文化)와

그 후의
- 조보구(趙寶溝), 흥륭와(興隆洼), 우하량(牛河梁) 및
- 은상문화(殷商文化)까지

동이문화는 봉황(鳳凰)을 토템으로 하였다.

통일된 문화체계는 아니지만
문헌에 기록된 이후의 생활은 이 지구(地區)의 조상들의 범칭(광범위한 동이문화)이다.
 
봉황을 모(母)토템으로 삼고
각종 새들을 자(子)토템으로 하는 북방 봉황토템 동이의 조상들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들은 모두 연산산맥(燕山山脈)의 동이문화권을 중심으로 발전되어 왔다.
복희(伏羲)에서 하상(夏商) 2대까지 동이문화가 주도적인 역할을 해 온 것이다.

동이족 사람들은

- 깃털달린 활과 화살을 발명했으며,
- 문자를 창조했으며,
- 청동기를 제작하고,
- 철을 단련했으며,
- 배(舟)와 수레(車)를 만들었고,
- 농업을 발전시키고 치수(治水)를 하였다.


東海之內 北海之偶 有國名曰 朝鮮

동해지내 북해지우 유국명왈 조선

"동해(서토 동해안) 안쪽, 북해(발해) 모퉁이에 조선이란 나라가 있었다”

-산해경(춘추전국시절 편찬된 지리서)



<1968년 역사학자 천판(陳槃)이 펴낸 ‘춘추대사표열국작성급존멸선이(春秋大事表列國爵姓及存滅선異)’라는 책이었다. 기존 사서를 근거로 중국 중원에 산재했던 춘추시대 170여 소국의 역사를 비정한 역사책인데, 바로 선우라는 항목이 있다.

“선우는 일명 중산이라 한다. 회남자는 우(虞)는 혹 우(于)라 했다. 선우(鮮于)는 그 선조가 자성인데(其先子姓), 기자는 조선에 봉하고(以箕子封朝鮮), 기자의 둘째 아들은 우(于·핑산으로 추정)에 봉했다. 여기서 자손들은 조선의 선(鮮)과 봉지 우(于)를 따서 선우(鮮于)씨라 했다.(子孫因合 ‘鮮于’爲氏)”(천판)>

은나라의 후예 어쩌고 금석문이 발견되었고 여기에 기자의 후예

어쩌고로 이 선우씨의 유래가 참 재미있고 눈에 확띄는 대목이 선자가 조선의 선자와 봉지의 우자가

합쳐서 나오는 말이라는.  자세한 내용과 선우중산국의 위치까지 확인 바람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5021738135&code=210000

그외 고죽국의 경우도 눈여겨 볼 부분인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4041710515&code=210000


요서에서 발견된 두로영은(豆盧永恩)의 비문에

조선건국 고죽위군朝鮮建國 孤竹爲君’(조선이 건국을 하고 고죽이 임금이 되었다)
굿잡스 15-07-02 09:06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주몽의 나이 22세였으며, 한 나라 효원제 건소 2년, 신라 시조 혁거세 21년 갑신년이었다. 사방에서 소문을 듣고 와서 이곳에 살고자 하는 자가 많았다. 그곳이 말갈부락과 인접하여 있었으므로, 그들이 침범할까 염려하여 물리쳐 버리니, 말갈이 두려워 하여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왕은 비류수에 채소가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산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따라 왕은 사냥을 하며 그곳을 찾아 올라가 비류국에 이르렀다. 그 나라 임금 송양이 나와 왕을 보고 말했다. "과인이 바닷가 한 구석에 외따로 살아와서 군자를 만난 적이 없는데, 오늘 우연히 만나게 되었으니 또한 다행스런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대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모르겠다." 주몽은 "나는 천제의 아들로서, 모처에 와서 도읍을 정하였다"라고 대답하였다. 송양이 말했다. "우리 집안은 누대에 걸쳐 왕 노릇을 하였고, 또한 땅이 비좁아 두 임금을 세울 수 없는데, 그대는 도읍을 정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나의 속국이 되는 것이 어떤가?" 왕이 그의 말에 분노하여 그와 논쟁을 벌이다가 다시 활 쏘기로 재주를 비교하게 되었는데, 송양은 대항할 수 없었다.
 
 
 
2년 여름 6월, 송양이 나라를 바치며 항복했다. 그곳을 다물도로 개칭하고, 송양을 그곳의 군주로 봉했다. 고구려 말로 옛 땅을 회복한 것을 다물이라 하기 때문에 그곳의 명칭으로 삼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