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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3-29 23:19
조선시대 전성기라고 불리우는 시대에
 글쓴이 : aghl
조회 : 1,651  

뭐 태종과 세종시대이겠지요.. 근데 어떤 나라도 그 나라가 극강의 전성기를 맞이하면 반드시 영토적 확장을 꾀하게 되어 잇는데..(내부에서 폭발하는 에너지를 분출하기 위해..) 왜 조선은 그런것이 전혀 없엇을까요? 물론 간간히 군대의 출진이 잇엇지만..(4군 6진,대마도 정벌..) 영토의 대대적인 확장으로 까지 이어지진 못한듯 보이고..(상대국이 위협을 느끼지 않을 정도의 확장만 있엇던듯..)  물론 고려시대도 마찬가지이긴 한데.. 그래도 고려시대는 초반에는 지방호족의 힘이 너무 강했고.. 또 보면 꾸준히 영토를 확장해 왔거든요.. 근데 조선은 극 초반을 뺴면 그런것도 거의 없는거 같은데...

아무래도 명-청이라는 강한 세력의 등장과 사상적으로 사대주의를 신봉해서 일까요? 아니면 진짜 우리 조상들이 영토에 관심이 없엇나.. 항상 아쉬운 순간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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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우레탄 15-03-29 23:21
   
여진을 축출한 적은 있었지만 축출하고 보니 명나라와 인접하니까요...
명나라를 사대하는 국가였으니 그렇지 않을까요...
솔직히 그 때 남쪽으로 눈을 돌려서 열도 정벌을 했어야 했는데
왜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인지 지금도 아쉽네요...
     
aghl 15-03-29 23:25
   
근데 적어도 지금의 동북3성은 명나라 영토엿다고 보기도 힘들고 누루하치 통일 전까지 강하고 통일된 세력도 없었던것 같은데.. 적어도 조선이 동북3성은 어떻게 해볼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 항상 그 부분이 아쉬움..
          
폴리우레탄 15-03-29 23:29
   
정말 그 지역은 현대에 와서 생각해 보면 희토류의 총본산인데... 정말 아쉬운 지역이네요...
지린성까지는 어떻게 했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노홍철2 15-03-29 23:22
   
고려는 야금야금 꾸준히 확대해왔고, 공민왕 시절에는 요동성까지도 잠시 차지했었었죠..
Atomos 15-03-29 23:23
   
세종 때 영토확장했죠 4군 6진
대마도에도 정벌하러 갔고요
태종 때는 잘 모르겠네요
지금 우리가 한반도를 차지했기 때문에
아쉽게 보는 것인 듯
더 작아질 수도 있었다고 한다면 뭐..
이기야 15-03-29 23:24
   
고려도 마찮가지였어요.. 전성기때 국력은 송나라랑 필적했어도 영토는 한반도가 고작.. 그리고 만주가 척박하죠.. 좋은 땅은 아님..
     
aghl 15-03-29 23:27
   
그래도 고려는 국시가 고구려의 고토회복도 있었던 지라 꾸준히 진행은 해왔던거 같은데요..(뭐 요,금,원이라는 너무나도 강한 국가들이 있어서 쉽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그들과 대결하면서 충분히 자주성을 만방에 떨친거 같은데.. 조선은 가장 전성기라는 때 조차도 그런게 잘 안보이니까요.. )
감방친구 15-03-29 23:28
   
ㅡ 태조에서 세종, 길게는 세조에 이르는 근 100 여 년간 요동을 제한 만주는 조선의 세력권이었습니다. 여진족 세력이 복속돼 있었거든요

ㅡ 한반도 자체가 한반도에 거주하는 인구를 건사하기에 크게 부족하지 않은 곳입니다

ㅡ 성리학을 국가원리로 삼아 건국한 나라가 조선입니다 국제역학과 국가 내부 체계가 한 가족단위까지 내려간 구조가 조선입니다 명을 국제질서의 종주국으로 한 사대교린에 봉사한 나라가 조선이고 그 원칙을 깨뜨리면 내부 시스템까지 연쇄되는 체제의 나라가 조선이었습니다

ㅡ 따라서 이러한 질서 하에서 영토확장을 활발히 하기에 무리가 있지요
     
aghl 15-03-29 23:35
   
하긴 성리학이 태어난 송나라도 전성기가 됬어도 영토확장은 못했던거 같긴 한데.. 성리학의 사상 내부에 영토확장을 배척하는 뭐 그런 사상이라도 잇나봐요
          
노홍철2 15-03-29 23:40
   
실제로도 중국인들에게 가장 욕먹는때가 송나라 시대죠...
북창 15-03-29 23:28
   
정말 그시대를 살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가 없겠죠.
명 초반에 만주를 평정하지만...불과 수십년 세력을 떨쳤지...다시 여진족 손으로 넘어갔죠.
맨날 세수 타령허지 말고...여진족을 통합해서 영토 인구 늘려...세수 더 걷을 생각은 왜 못했는지...
제 생각에...기득권층은 안분지족 하기 때문에...지나친 폐쇄적인 신분질서 때문이 아닐지...
     
aghl 15-03-29 23:34
   
근데 님이 말하는 폐쇄적인 신분제도라는것도 사회가 보수화가 진행됨에 따른 산물이라는 얘기도 잇고 하거든요(유철 교수) 그러니까 제가 말한 전성기에는 그 신분제도라는 것도 약한 개념이지 않앗을까 싶은데.. 세종떄는 천민도 과학자가 되던 나라였으니 '지나친 폐쇄적인 신분질서'때문에 영토확장을 못했다는 얘기는 좀 지나치지 않나 싶네요
          
북창 15-03-29 23:40
   
장영실 벼슬 하나 주는걸로 얼마나 반대가 심했는걸요.
충분히 패쇄적이었죠.
모래곰 15-03-29 23:48
   
지금과 달리 당시 요동과 만주는 불모지라서 식량생산이 거의 안되는 땅입니다.
요동지역이 고구려가 망할 즈음에는 한랭화가 되서 그렇다더군요.
압록강과 두만강, 한반도까지가 노른자위인데 군사적 요충지로 요동은 중요하지만 대신 방어하는데 엄청난 자원을 소비해서(각종 유목민족과 명나라가 중요시하는 지역) 그렇게 탐이 나는 지역은 아니였을테고 굳이 한다면
건주여진을 회유해서 충성을 얻는건데 태종시절에 영락제에게 주도권을 뺐겼죠.
건주여진이 양쪽에서 줄타기를 하고 그래서 태종이 정벌, 세종도 정벌, 세조도 정벌해서 이만주도 죽이고요.
그리고 4군6진을 개척한 것도 대단한겁니다.
명나라와 담판을 통해서 외교적, 군사적으로 획득했죠.
게다가 영락제는 수도를 북경으로 옮겼는데 적극적으로 몽고, 여진족을 제압하겠다는 심산이라서 어림도 없죠.
한마디로 황제가 몸빵을 하더라도 확실하게 제압하겠다는 각오를 보여줬죠.
그러다 오라이트족에게 황제가 잡히기도 했고.
지금 정치인과 비교할 수준이 아닌 월등히, 압도적인 냉철한 시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고려 말에 왜구와 여진에게 침략을 당했던 것을 생각해보시죠.
그 짧은 기간에 국내문제를 해결하고 북진과 남벌을 한겁니다.
     
감방친구 15-03-30 00:05
   
아주 좋은 식견, 감사합니다
굿잡스 15-03-30 00:06
   
초기 시절에는 조선도 표전문 사건에 무역문제에(명은 3년에 한번, 조선은 1년에 3번하자)

국새 문제까지 얽혀 이성계와 정도전이 요동정벌을 강행하려고 했든.

(제가 보기에는 고려말 2차 요동정벌도 성공 가능성이 낮지는 않았지만  조선시대 사병의 철폐로 중앙군대

화에 새롭게 정비된 시점에서 요동정벌을 강행했다면 더 성공적이고 유지관리에 유리한 시점이

아니였을까 싶기도 한. 이당시 주원장 시절에는 요동까지 명의 세력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던 상황.)

그기에 이성계의 최측근 무력부대 중 이지란(퉁두란)외에 금고시첩목아등 10여 명

이상의 여진족 세력가들이 이성계 휘하 진용일 정도로 직접적 여진족 무력 동원이 가능했던 시절.

이게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이 도륙당하고 이성계는 함흥으로 들어가 버린.

그리고 여진족도 머리가 띨띨한 애들이 전혀 아닌게  길게 보면 앞서 대다수 발해인과 소수 신라계 연합의

잔재들로 대금이라는 동아시아 패자도 해봤던 전적이 있고. 이들은 조선과 명 사이를 오가면서 조선이 여진

족을 강렬하게 징벌하려고 하면 명에 붙어 조선을 견제시키고 때로는 양국간에 이익을 먹으면서 성장했던.

그기에 인구수는 적지만 전투력을 무시할 수 없던 세력이였지만

이들을 조선이 강성한 중기까지는 강온정책으로 잘 통제했던 집단이였으나 임진왜란의 7년 전란을

기점으로 점차 누루하치가 건주여진을 통합하면서 힘이 불어나자 명의 부패한 내분도 있었지만 제대로 공

략하지도 못하면서 잡아 먹힌.
굿잡스 15-03-30 00:15
   
-- 근자에 고려가 표문을 상주하는데 언사가 많이 부실하여 짐이 이미 담당 관청에 이를 규명하도록 명했다. 듣자하니 그들은 수도 개경으로부터 압록강에 이르기까지 요충지에 비축하는 군량이 매 역마다 1, 2만서 혹은 7, 8만석 혹은 십수만 석에 이르며 사람을 보내 동녕부의 여진을 유인하여 국경을 넘어오게 하고 있으니, 이는 그 뜻에 반드시 깊은 음모가 있는 것이다...(중략)...지금 요동은 군량이 모자라 군사들이 굶주리고 고단한데, 만약 즉시 사령창의 식량을 내어 그들을 구휼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고려로 하여금 도망병을 꾀어 드이려는 마음을 일으키게 할 것이니 좋은 계책이 아니다. 만일 고려가 20만 군대를 내어 쳐들어오면 여러 부대는 어떻게 막겠는가. 이제 건축과 보수를 잠시 정지하고 임시 막사를 지어 10년 간 거주한 후에 다시 공사를 시작하라. 옛 사람의 말에 사람이 수고로우면 화란의 근원을 막을 수 있다고 했으니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

1395년(위화도 회군 7년후) 4월, '태조고황제실록'


태종 9권, 5년(1405 을유 / 명 영락(永樂) 3년) 6월 27일(신묘) 1번째기사
영의정부사 평양 부원군 조준의 졸기


정축년에 고황제(高皇帝)가 본국(本國)의 표사(表辭)500) 안에 희모(戲侮)501) 하는 〈내용의〉 글자[字樣]가 들어있다 하여, 사신(使臣)을 보내 그 글을 지은 사람 정도전(鄭道傳)을 잡아서 경사(京師)로 보내게 하였는데, 태상왕이 준(浚)을 불러 비밀히 의논하니, 대답하기를 보내지 아니할 수 없다고 하였다. 도전(道傳)이 그때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로 있었는데, 병(病)을 핑계하여 가지 아니하고 음모하기를, 국교(國交)를 끊으면 자기가 화(禍)를 면할 것이라 하고, 마침내 건언(建言)하기를,
“장병(將兵)을 훈련하는 것은 군국(軍國)의 급무(急務)이니 진도 훈도관(陣圖訓導官)을 더 두고, 대소(大小) 중외(中外) 관리로서 무직(武職)을 띈 자와 아래로 군졸(軍卒)에 이르기까지 모두 연습하게 하여 고찰(考察)을 엄중히 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리고 남은(南誾)과 깊이 결탁하여 은(誾)으로 하여금 상서(上書)하게 하기를,
“사졸(士卒)이 이미 훈련되었고 군량(軍糧)이 이미 갖추어졌으니, 동명왕(東明王)의 옛 강토를 회복할 만합니다.”
하니, 태상왕이 자못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은(誾)이 여러 번 말하므로, 태상왕이 도전(道傳)에게 물으니, 도전이 지나간 옛일에 외이(外夷)가 중원(中原)에서 임금이 된 것을 차례로 들어 논(論)하여 은(誾)의 말을 믿을 만하다고 말하고, 또 도참(圖讖)을 인용하여 그 말에 붙여서 맞추었다


윗기록을 보면 고려 말 조선 초(조선의 국호개칭이 1393년)

정도전은 조선이 고려시대 사병들을 철폐하고 중앙군화 시켜

대군을 운용하면서 표전문 사건은 하나의 빌미이고 조명간의 날카로운 신경전에 대치 국면이 이어지고 있

었는데 명의 주원장이 이런 정도전 세력을 못마땅히 여긴 이유는

요동정벌을 강행할려는 대규모 군사훈련부터 요동지역으로 뻗어나가기 위한 군량 비축등의

움직임이 당시의 명 조정내에서도 정황이 포착되자 주원장도

우려와 걱정이 나오는 대목( 정도전도 조선 내부적으로 병사들의 조련과

군량미 완비, 동명의 옛 강역 회복의 정당성에 서토 정복 이민 왕조사까지 들먹이면서

강력한 주장을 보임. 명에 갔을때도 명의 태도에 적국에서 불만어린 소리를 하기도 했고)
칸쵸 15-03-30 00:30
   
북이 아니면 남쪽이라도 공략했어야하는데 많이 아쉽죠..제가 생각하는 조선의 최대 기회는 성종대였습니다..1469~1494년에 이르는 25년의 치세..당시 일본은 오닌의 난(1464년)이후로 중앙막부가 약해지고, 지방 영주들이 독립군벌화 된 시기입니다..이른바 일본전국시대죠..즉 일본 전국토가 수십개의 분국으로 나눠진 시기였죠..이때 최소한 대마도, 나아가 큐슈까지만 점령해놨어도 우리나라가 일본에 의해 2번이나 큰 침탈을 당하지 않았을겁니다..

일본의 전국시대는 오닌의 난(1464)이후 본격적으로 전란이 시작되는 1467년부터 시작해 오다 노부나가가 무로마치 막부를 폐하는 1573년까지 약 100년간이나 지속됩니다..그 당시의 조선을 보면 성종-연산군(막장)-중종(반정이후 왕권급락,신권대두)-인종(단명)-명종(문정왕후 수렴청정, 대윤과 소윤 외척다툼, 역시 단명)-선조(암군)으로 이어지며 조선전기는 임진왜란으로 끝나게 됩니다..일본 전국시대는 100년이나 계속되지만, 정작 조선의 기회는 성종 시기밖에 없었다고 보는 이유입니다..
굿잡스 15-03-30 00:32
   
역사에 가정이 없지만 이방원에 의해 정도전이 도륙당하지 않고 요동정벌이 강행되고 요동으로 뻗은

군량 비축 인프라를 통해서 강력한 요동 방어진을 구축 유지하면서 조선에 아직 복속

되지 않던 여진족세력을 강온으로 빠르게 규합해서

북원 세력과 연대했다면 과거 고구려 돌궐 연합처럼 이후 최고 피치 올리던

영락제라도 쉽게 공략하기는 힘들지 않았을까하는 가정도 해보긴 합니다.(그기에 조선이 왜까지

끌어들여 연합해서 삼각 동맹축하에 압박을 해버리면 더욱 명은 쉽지 않았을)

그런데 이게 이방원이 2차례의 왕자의 난 이후 태종으로 등극하고 명도 조선과 무역에서

이전까지 3년에 한번 하자는걸 1년에 3번을 해주는 상당한 혜택을 주면서 무마시키자 조선내에서도 명을

딱히 칠 명분이나 이전만큼 날카로운 대치를 할 소재거리가 급격히 사라져버린 점이 커죠. 그기

에 주전파의 핵심 주역이였던 정도전이 사라진 점도 그렇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