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0년(선조 13)에 북방 오랑캐를 제대로 방비하지 못한 죄를 물어
탄핵을 받고 선전관에서 파직되었으나 그 해 겨울 다시 복관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1582년(선조 15)에 비국랑(備局郞)을 겸임하고 이듬해 4월에 강진현감에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강진의 지역 토호 호족(豪族)과 부자들에게는 강경책을 펼쳐,
그들과 마찰을 빚어 모함을 받아 1585년(선조 18)에 파직당하였다.
1588년(선조 21)에 부친상을 탈상하고 의주판관(義州判官)으로 발탁되어 명나라 사신 수행업무를 맡게 되었다. 이때 사절단의 행차시 뇌물을 요구하는 것을
노자돈만 주고 모르는 체하자
명나라 사절단이 귀국길에 문책하려 함에
군무를 잠시 떠났다가 탄핵당하여 파직됐다.
1589년(선조 22)에 함경도 혜산진첨사(惠山鎭僉使)에 임명되어 여진족의 침략을 막으러 나갔으나 부임 도중 발병하여 적군이 관하(管下)의 운총벽(雲寵壁)을 네 차례나 침입함을 막지 못하여 함경도 조방장 한극성(韓克誠)의 문책을 받았으나 선조가 특별히 그가 병중임을 감안하여 은전을 베풀어 감율(減律)을 명했다.
그러나 전 상사인 한극성과의 계속된 불화로
부하관과 함께 삼수(三水)로 가게 되자 선조는 그를 파직하여 귀양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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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조공 뇌물 건 일도 있었고...
아무튼... 본인이 너무 곧이곧대로인 성품이다보니...
상관이나 주위 유력자들과 자주 대립해서 파직당하는 스타일이었죠...
비리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는 것도...
주위 사람들 다들 뇌물 주고 받고 있는데, 자기혼자 고고한 척 딱 버티고 있으니
괴씸죄로 모함받아 털린거죠...
실제..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 기록을 보더라도...
[ 입부는 성격이 지나치게 강직하고 타협을 모르기에, 오히려 그것이 그의 발목을 잡게될까 걱정이 된다. ]
는 표현이 등장하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