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금동관은 대체로 한성 후기인 4세기 말~5세기 대로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한성기의 금동관모는 반원형 고깔 모양의 상투를 덮는 절풍형의 형태를 띄고 있는데, 상부에는 긴 대롱으로 반구형 장식이 달려있으며 또한 좌우 측면으로 새의 날개 모양을 한 장식을 갖추고 있는 등 특이한 형상을 지니고 있다. 관모에 쓰인 금동판에는 투조와 타출, 축조 등 다양한 기법을 통해 용문과 봉황문 등을 새겨넣기도 하였다.
이러한 백제 특유의 금동관은 대체로 지배계층의 고분에서 환두대도 및 금동신발 등과 같은 화려한 위세품과 발견되고 있는데, 당시 백제의 도읍인 한성 근방보다는 충남 일대 등 남쪽 지방의 고분에서 주로 출토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금동관을 지니고 있던 고분의 피장자가 누구였는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이에 대하여 학계에서는 대체로 금동관모의 소유자들이 지방 출신의 유력자로써 백제의 중앙 조정으로부터 왕(王)·후(侯)·장군(將軍) 등의 작호를 수여받은 이들이었다고 보고 있다.
*금동관모의 소유자, 백제의 중앙 조정에서 왕(王)·후(侯)·장군등의 작호를 수여.
* 지금까지 발굴된 백제의 금동관모 출토지.
공주 수촌리 고분군 등 중서부지역에서 5점, 전남지역에서 1점, 옥전 M23호분 등 가야지역에서도 2점이 출토. 일본 규슈의 에다후나야마(江田船山) 고분.
야인과 왜인들은 모두 우리의 번리이고 우리의 신민이니 왕된 자는 똑같이 대우하고 차별을 없이하여 혹은 무력을 사용기도하고, 내가 즉위한 이후에 남만, 북적, 이것은 하늘의 끌어들이는 바이지, 나의 슬기와 힘이아니다. 흑룡강, 속평강, 건주위, 올량합, 이만주 동창등 심처 야인과 삼위 달자가 관문을 두드리고 입조하기를 청하거든, 그 종인을 줄여서 후대하여 올려보내라
단종 10권, 2년(1454 갑술 / 명 경태(景泰) 5년) 1월 6일(무오) 5번째기사
김우을두합 등이 야인들이 세조를 알현하고자 원함을 아뢰다
요동 도사(遼東都司) 왕상(王祥)이 말하기를, ‘요동사람들이모두말하기를,
「수양대군(首陽大君)은 대장(大將)의 의모(儀貌)가 있었는데, 이제과연 발란 반정(拔亂反正)2142) 하였다.’ 하고 탄상(嘆賞)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그때 세조(世祖)가 농사에 힘쓰고 학교를 일으키고 군사를 양성하기를 일삼아서, 궁병(弓兵) 백만을 길러 오랑캐[夷狄]를 제압하려고 결심하고 진법(陣法)을 익히고 군사를 훈련하니, 왜인과 야인들이 모두 위덕(威德)을 흠모하여 다투어 와서 조현(朝見)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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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40권, 12년(1466 병술 / 명 성화(成化) 2년) 11월 2일(경오) 3번째기사
시무8조에 관한 대사헌 양성지의 상소문
우리 나라의 인민(人民)은 무려 1백만 호(戶)나 되는데 그 중에서 활을 잘 쏘는 병졸이 30만 명이고, 정예(精銳)한 병졸이 10만 명이며, 용감한 군사가 3만 명입니다.
◈성종 32권, 4년( 1473 계사 / 명 성화(成化) 9년)
일본국 인백단 삼주 태수 원교풍이 양영서당을 보내어 선물과 글을 올리다
“공경히 생각하건대, 황제 폐하(皇帝陛下)께서 보위(寶位)에 오르시어 천운(天運)을 이어받으시니, 구방(舊邦)이 유신(維新)하며, 덕(德)이 하(夏)나라·은(殷)나라의 초정(初政)보다 뛰어나시고 도(道)가 요(堯)임금·순(舜)임금보다 위에 짝하시니, 지극히 축하하고 지극히 축수합니다. 신은 선조(先祖) 이래로 가세(家世)에서 상국(上國)3198) 에 빙문(聘聞)을 통하지 아니한 적이 없기 때문에, 경인년3199) 가을에 일개 암자승(菴子僧)과 석도문(奭都聞) 등을 차견(差遣)하여서, 옛날의 맹세를 닦으며, 또 토의(土宜)의 미미한 정성을 바쳤습니다. 다행히 금상 황제(今上皇帝)3200) 께서 왕위(王位)를 이어받으시는 초정(初政)을 만나서, 눈으로는 한(漢)나라 관리의 위의(威儀)를 보겠고, 귀로는 주(周)나라 시(詩)의 가송(歌頌)을 듣겠으니, 아아, 성대(盛大)합니다. 실로 문무(文武)의 나라인지라 영우(榮遇)하기가 너무나 크옵니다. 전사(專使)3201) 가 일을 끝마치고 동쪽으로 돌아오게 되매, 화로 동반(火爐銅盤) 1개와 동경(銅磬) 1개를 더하여 내려 주시니, 이미 후한 은혜를 받았으므로, 감격하고 기쁜 마음이 지극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만복사(萬福寺)의 주지(住持) 양영 서당(亮瑛西堂) 등을 보내어 바다를 건너가서 박(薄)한 폐물(幣物)을 바치어 오로지 황제께서 왕위를 이으신 것을 배하(拜賀)하게 합니다.
현재 반쪽자리 국력의 대한민국이지만 군사력이 세계 최상위 그룹에 포진해 있듯 단순히 버틴 수준이 아니라 반만년 역사에서 우리의 국력은 기본 세계 최상위 그룹에 군사력도 이와 다르지 않았군요.
유럽을 제패한 로마제국이 정규 30만에 예비 합해서 60만 정도를 운용했다면
우리 고구려도 30만 정도에 전시 4,50만까지 뽑아냈고 중세 고려도 송나라 관광시킨 전사적 유목제국인 요와의 3차대전을 육박전에서 정예 요나라 10만을 쓸어버릴때도 기본 20만 이상의 대군을 조선도 중기로 가면서 문치주의 심화에다 수백년 평화에 젖어 나태해졌지만 전반기 실전을 거듭한 2,30 만 대군을 운용하던 군사 문화 선진강대국이였군요. 그런 평화에 찌든 조선 중기 조차도 실전을 거듭했던 왜구 수십만의 대규모 기습전에도 초기를 빼고는 수군뿐 아니라 육진에서도 왜구들을 몰아냈고.
그리고 우리나라는 짱개에게는 털린 역사는 없군요. 한번씩 당한게 북방 유목민족이지만 천년사직 고구려가 거닐고 있던 휘하 부용세력이였던 거란(후대 요), 실위(후대 몽골), 여진(후대 금,후금)등은 우리 태왕 앞에서는 고개도 제대로 못들고 깨갱하고 살았고 그리고 이들 세력이 서토 짱개들 다 말아먹으면서 정복하거나 일부는 인도 중동 유럽까지 가서 쓸어버리거나 제국을 형성. 왜 만주가 용담호혈 자리인지, 그런 만주에서 수천년간 군림 지배하며 고도의 문명을 낳고 발전시켜왔던게 우리 예 맥 한의 대한민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