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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8-09 11:19
일본의 역사에선 충무공을 어떻게 비춰지고있나요??
 글쓴이 : 아라비안
조회 : 1,610  

일본이나 중국에선 역사적으로 어떻게 비춰지고있나요?
 
제가검색해보니 저가판단하기에 신빈성이 없는것도 있는것같아서....
 
거북선과 조선 수군에대해서 좀 대단하게 여기드라고요 경험적으로 일드 고우공주들의 전국 에서  일본3대
 
영웅이라고 자뻑하는 풍신수길이 실패한 임지왜란을 표현당시 거북선에대해선 이런배는본적이 없다 대단하
 
다 이런식과 조선수군에 계속당하는 표현을 보여주더라고요 (이순신 이름이 않나워서 한국인입장에선 아쉽
 
지만.)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박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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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hou 14-08-09 11:45
   
예전에 일본웹에서 서핑했던 기억으로는, 근대까지의 다수의 일본 장수들은 이순신을 높이 평가합니다.
게다가, 일본사학자들또한 이순신은 높게 평가합니다. 
심지어, 이순신의 평가는 자신들이 발굴했다고도 하죠.(요게 사실 좀 미묘한게 있슴..)
단, 네티즌의 평가는 당연히 과대평가라며, 비하하고 있습니다.
요는 유리한 지형에서 몰래 기습한 비겁한 승리고, 실제로는 해군보단 지상의 게릴라전이 힘들었다는둥.
일개 병사의 화살 맞고 죽었다는 둥..머 여하튼 비하난무요 ㅎㅎ 알잖아요. 갸들 종특~
무엇보다, 이순신을 일반인들은 잘 알지 못합니다. 라기보단 한국역사 자체를 걍 몰라요 보통 ㅎ 안배우거든요.
     
아라비안 14-08-09 11:56
   
감사합니다.

알까 라는생각은했습니다.  지들역사도모르는데
     
중립적인 14-08-09 13:56
   
전투에선 당연히 유리한 진영에서 싸우는건 당연하고 전투중 기습하는 것도 전술 중 일부인데 어이가 없네요 ㅋ
김님 14-08-09 11:56
   
이순신/일본어 위키백과에서의 왜곡


일본 혐한들에게도 충무공은 주요 왜곡대상 1위로, 그 왜곡의 범위가 크고 심하다. 특히 일본어 위키백과의 일부 사용자들이 이순신 항목을 왜곡하고 있는데, 그 정도가 매우 심해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사용자들이 나서줘야겠다. 반대로 일본에 대해 그리 감정이 좋지 못한 중국의 바이두 백과의 사용자들은 이순신 장군에 대해 꽤 호의적으로 적어 놨다.

이하의 내용보다도 더 가관인것은 4년전의 경우 이순신의 사인이 닌자(...)에 의한 암살이었다고 기재된 적도 있었다.

1. 장문포 해전, 영등포 해전, 제2차 장문포 해전은 원균의 인척인 좌의정 윤두수의 주도로 계획되어 조선 육, 수군이 협력하여 진행된 전투로, 6일 동안 전투를 치뤘으나 일본군이 응전하지 않음으로 왜척 2척을 격침하는 전과를 올렸을 뿐, 그 외에 아무런 성과를 올리지 못한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을 비롯한 일부 장수들이 작전의 내용 등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그들에게 주도권이 없는 전투였으며, 비록 조선 육군과 수군은 어떤 피해도 입지 않았으나, 대규모의 군대가 동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을 토벌하지 못함으로써 실패한 전투였다.

일본 위키는 이에 대해 그저 수차례의 공격이 실패하고,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이순신이 격퇴되었다고만 설명하고 있다.

<원문>

李舜臣は休戦交渉期の1594年3月に水軍で巨済島を攻撃(第二次唐項浦海戦)したが日本軍に撃退され、開戦後に戦争を指導する明より和平交渉の妨害となるため交戦を禁じられた。また、同年9月から10月にかけて朝鮮陸水軍により再び巨済島を攻撃する作戦が発動されたが数次に渡る攻撃も失敗し、李舜臣は福島正則や島津義弘により撃退された(場門浦・永登浦海戦)。この結果、朝鮮王朝では査問を行い、李舜臣は留任となったが上司で体察使の尹斗寿は責任を問われて更迭された。(이순신은 휴전교섭기인 1594년 3월에 수군으로 거제도를 공격(제2차 당산포 해전)했으나 일본군에게 격퇴 당하고, 개전 후에는 화평 교섭에 방해당한다는 이유로 전쟁을 주도하던 명에 의해 교전을 금지 당하게 된다. 또한, 같은 해 9월부터 10월에 걸쳐 조선 육군, 수군에 의한 거제도 공격작전이 다시금 발동되었으나 수 차례에 걸친 공격도 실패하고, 이순신은 후쿠시마 마사노리나 시마즈 요시히로에 의해 격퇴 당한다.(장문포. 영등포 해전) 그 결과, 조선 왕조에서는 조사를 실시, 이순신은 유임되었으나 상사인 체찰사 윤두수는 책임을 묻고 경질 당했다.)
2. 명량해전에 대해서, 충무공은 일본 수군을 조류가 빠른 명량해협으로 유도하여 선진을 공격, 승리를 거두나 자세한 설명없이 왜군의 후속 부대가 강대하기에 후퇴하여 적의 침공을 허용한 것으로 되어있으며, 전투의 결과에 대해서는 전술에서 패배하고 전략에서 승리했다는 자위성 기술을 하고 있다.

명량해전시 13척의 대형배와 기타 100여척이 참전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틀린 말은 아니다. 본문에서도 '병력을 과장하기 위해 피난민의 배 수백척을 동원했다'라고 분명히 설명해 해당 병력이 전투병이 아니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원문>

日本陸軍によって全羅道や忠清道が掃討されつつある中、壊滅直後の残存艦隊を収容しながら後退した李舜臣の艦隊は、朝鮮半島西南端の潮流の激しい鳴梁海峡で日本水軍を誘導し、突入してきた日本水軍の先頭部隊に一撃を加えて勝利した(鳴梁海戦)。しかし後続の日本水軍は強大なため、海戦の夜には戦場海域からの後退を行い、日本水軍の侵攻を許した。(일본 육군에 의해 전라도나 충청도가 토벌되고 있던 중, 괴멸 직후의 잔존함대를 수용하면서 후퇴한 이순신의 함대는, 조선반도 서남안의 조류가 격심한 명량해협으로 일본 수군을 유도하고, 돌입한 일본 수군의 선두부대에게 일격을 가해 승리를 거둔다(명량 해전). 하지만 뒤에 있는 일본 군대가 강대하기 때문에, 해전이 벌어진 밤에는 전장 해역으로부터 후퇴하여, 일본 수군의 침공을 허락한다.)
3. 순천 왜교성 전투에 대해서, 조선, 명, 일본 3군 모두 적지않은 피해를 입었으나, 조명 양군이 피해를 크게 입고 패한 것으로 되어있다. 실제 이 전투에서 조선군 130명 전사, 명의 전선 30척 격침, 명 수군 2,000명이 전사하였으며 일본군은 전선 11척을 나포당하고 30척의 전선이 격침, 3,000명이 사상하였다.

<원문>

1598年、明・朝鮮軍が日本最西端の拠点である小西行長等が守る順天城を攻撃しだすと、李舜臣は明水軍の指揮下に入って水陸共同の順天攻撃作戦に参加し同時に順天城の海上封鎖を行った。しかし、水陸両面で明・朝鮮軍は損害を出しつつ苦戦し、厭戦気分が蔓延して攻撃は頓挫、海上封鎖を解いて古今島に後退した(順天城の戦い)。(1598년, 명, 조선군이 일본 최서단의 거점인 고니시 유키나가 등이 지키고 있는 순천성을 공격하기 위해, 이순신은 명 수군의 지휘를 손에 넣고 수륙군 공동의 순천 공격작전에 참가하는 동시에 순천성의 해상봉쇄를 행한다. 하지만, 수륙 양면으로 명. 조선군은 피해를 계속 내며 고전하고, 사기가 떨어지자 공격은 좌절, 해상 봉쇄를 풀고 고금도로 철퇴한다.(순천성의 전투))
4. 노량해전에서 조선, 명 수군이 일본군에 패퇴, 조선의 주요 장수들이 다수 전사하고 큰 피해를 입어 일본 수군을 추격하지 못했다고 설명되어있으며, 고니시 유키나가의 수군이 무사하게 일본으로 퇴각한 것으로 되어있다.

허나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83척, 명은 63척의 전선을 갖추고 있었고 일본군은 도합 500척의 전선을 배치하고 있었으나 일본군은 50여척만이 겨우 퇴각하는데 성공했으며 조선군은 충무공을 포함한 조선군 삼백여명, 명군은 오백여명의 사상자를 내었을 뿐이다.

<원문>

この露梁海戦では夜半からの戦闘が長時間続き、混戦の中で李舜臣が戦死し、他に明水軍副将を初めとする明・朝鮮水軍の主たる将が多数戦死し大きな被害を出したため、後退する島津水軍を追撃することは出来なかった。 一方、孤立していた小西行長は明・朝鮮水軍の出撃により封鎖が解けたので海路脱出に成功し無事日本へ帰国することができた。李舜臣はその死後に忠武と謚(おくりな)された。(이 노량해협에서는 야밤부터 전투가 장기화되어, 혼전 중에 이순신이 전사하고, 다른 명 수군 부장을 시작으로 명. 조선수군의 주요 장수들이 다수 전사하는 커다란 피해를 입었기에, 후퇴하여 시마즈 수군을 추격할 수가 없었다. 한편, 고립되어있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 조선수군이 출격함으로써 봉쇄가 풀렸기에 해로 탈출을 성공, 무사히 일본으로 귀국할 수 있게 되었다. 이순신은 사후 충무의 시호를 받았다.)
5. 충무공의 동상이 군사정권의 권력과 힘의 상징이라고 설명되어있다. 실제 세종로의 이순신 장군 동상은 세종로와 태평로가 뻥 뚫려있기 때문에 남쪽, 일본의 기운이 강하게 올라와 이를 제어해야 한다는 풍수지리학자들의 주장에 따라,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세워진 동상이다.
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 사항은 "일제시대 때 변형된 조선왕조의 도로 중심축을 변형하기엔 돈이 너무 많이 든다. 대신 세종로 네거리에 일본이 가장 무서워 할 인물의 동상을 세우라"였다고 한다.

목적이 실제 일본의 기를 억누르기 위한 것은 분명하나, 군사정권의 상징으로 사용된 것은 아니었으며 실제 군사정권 시기 동안 이순신 장군 동상 및 몇몇 애국선열상의 철거가 거론된 적이 있다고 한다.

<원문>

韓国ソウルの官庁街である世宗路には、李舜臣の銅像が建てられている。これは軍事政権下の力の象徴として設置されたと言われる。なお、外にも釜山龍頭山公園や木浦など、数多くの朝鮮半島南海岸に李舜臣の銅像が建てられている。(한국 서울의 관청가인 세종로에는, 이순신의 동상이 세워져있다. 이것은 군사정권의 힘의 상징으로 설치되었다고 말해지고 있다. 더불어, 그 외에도 부산 용두산 공원이나 목포 등, 다수의 조선반도 남해안에는 이순신 동상이 세워져 있다.)



http://mirror.enha.kr/wiki/%EC%9D%B4%EC%88%9C%EC%8B%A0/%EC%9D%BC%EB%B3%B8%EC%96%B4%20%EC%9C%84%ED%82%A4%EB%B0%B1%EA%B3%BC%EC%97%90%EC%84%9C%EC%9D%98%20%EC%99%9C%EA%B3%A1
붉은남작 14-08-09 11:58
   
조셉 커민스의 <전쟁연대기>라는 책을 보게되면 임진왜란이라는 섹터에 이순신에 관해 잘 나와있죠..거기에 일본인들의 이순신에 관한 평도 나와있구요..참고로 러일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도고는 이순신을 '전쟁의 신'이라고 표현했다고 설명되어있습니다.
darkbryan 14-08-09 11:59
   
우리가 일본역사 잘 안배우려 하듯이 걔네도 교과서에 몇줄 왜곡해서 나온 거 외에는 관심 없을거 같습니다.
     
아라비안 14-08-09 12:02
   
계들은 지들역사도 모르지요
설설설설설 14-08-09 12:14
   
일본인들은 진짜 역사에 무지합니다. 진짜 역사 자체에 관심도 없고 알고싶어하는것 같지도 않아요 ㅋㅋㅋㅋㅋ 고대사에서 자랑할만한 껀덕지가 있어야 뭐 역사 교과서를 기입할텐데 자랑할만한게 없음. 역사의 시작도 우리로 부터 시작이 되는 수준이고 기껏해야 지네들 끼리 치고 박은 역사뿐 ㅋㅋ 임진왜란도 큰 틀에서 보면 수십만 군대 동원하고 패배한 전투라 제대로 배우지도 않음 ㅋㅋ
아뒤도업네 14-08-09 12:15
   
에도시대 때는  이순신 장군보단 김시민 장군이 더 유명한걸로 알고 있습니다. 모쿠쇼(김시민의 관직이었던 목사의 일본발음)라는 괴물이 일본군을 닥치는 대로 죽여 이걸 토벌한다는 일본의 연극도 있었다더군요.
아리만 14-08-09 18:11
   
왜곡하거나 혹은 오히려 띄워줍니다. 왜냐면 이순신아린 사람이 대단할 수록 우리가 패할 이유가 있지! 라고 생각해서.. 실제로 거북선의 철갑선 설은 일본에서 나온 겁니다. 우리나라 기록에선 철갑선의 흔적도 없다고...
mymiky 14-08-09 18:35
   
철갑이, 지붕을 덥는 판을 옻칠을 해서 검게 보인게, 일본인들 눈에 철갑을 두른듯 하다고 그렇게 보였다는 설이 있고, 기타로는, 나무판위에 창칼을 촘촘히 꼽아서 그걸 보고 철갑을 두른듯 하다고 했다고 보기도 하고.. 또는 우리나라 갑옷처럼 앏은 비늘판을 지붕에 덮었을꺼라고 보기도 함. 대략 이 3가지 설이 있음.

글고, 원래 일본놈들은 한국사에 진짜 해박해서 있는 그대로 보거나, 또는 아예 모르거나..
지식이 있어도, 뭔가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해서 보거나 그러함..

추가하자면, 일본에서 임진왜란은 지들보기에도 병+맛인지라. 드라마화 잘 되지도 않고 왜란 건너뛰고 바로
세키하와라 전투?로 넘어가기 일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