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저는 12척의 배로 330척의 적이라는 불가능한 적을 박살낸 이순신 장군의 신기묘산과 탁월한 용병술에 감탄했지, 당시 그 분이 느꼈을 불안, 공포, 암담, 막막함..같은 절망과도 같은 감정에 관해선 사실 생각지도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명량 속의 이순신 장군님에 저를 대입시켜 보았더니, 정말 어떻게 저 상황을 견디고 지휘를 하여 적들과 싸울 생각을 하실 수 있었을까 그 부분이 더 크게 와닿더군요.
저라면 정말 미치지 않곤 못 견딜 것 같았습니다.
실제로 영화 중간에 공포로 미쳐버려 횃불을 화약 속에 집어넣고 자폭을 시도한 장군이 있었을 정도로 눈 앞에 새까맣게 진격해 오는 330척의 적 선단은 그야말로 공포와 절망 그 자체..
'워메 저 새까만 게 뭐시여?'
안개가 걷히며 모습을 드러내는 적 선단은 좌측 끝에서 우측 끝까지 빽빽하게 차있고, 공중에서 내려다 보여주는 적의 규모는 아주 벗겨도 벗겨도 계속 벗겨지는 양파와도 같았습니다.
그에 반해 이쪽은 듬성듬성, 띄엄띄엄.. 한 줄로 늘어서 있는 꼴랑 12척..
그나마도 11척은 도망가 버리고 이순신 장군님이 타고 계신 달랑 1척만이 닻을 내리고 외롭게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죠..
당랑거철, 계란으로 바위치기..?
도대체가 답이 안보이는 그 상황에서 당연히 두려움을 못 이긴채 따라오지 않고 도망간 11척의 배..
제 나름대로 비슷한 실제상황을 연상해 보았습니다.
저 쪽에서 날 죽이겠다고 '우와아~' 함성을 지르며 시퍼런 식칼과 망치를 들고 달려오는 330명의 조폭들..
그 앞에서 불안한 마음을 억지로 다잡고 장비를 점검한 후 싸울 자세를 잡는 저..
허어..정말 그건 공포와 절망, 막막함 그 자체더군요.
아마 백이면 백 다 '아 ㅅㅂ 좆댔다.' 내지는 '아..나 죽었구나' 라며, 자포자기하거나 도망갈 생각하거나 머리 하얗게 탈색된 채 근육 다풀려 오줌 지리고 그 자리에서 풀썩 주저앉기 바쁘지, 세상 어느 누가 330명이 달려오는데 '죽기살기로 한번 싸워보겠다' 나 '내 무슨 일이 있어도 저 놈들을 다 쳐부수고 말겠다' 라고 생각할 수 있겟습니까?
그런 희망도 없고 답도 안보이는 막막한 상황에서도 죽기를 각오하고 적과 맞서싸운 이순신 장군의 그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높은 정신력과 굳건한 용기가 저에게 가슴떨림, 감동과 함께 존경심을 더욱 자극하게 하더군요.
피난 가던 사람들과 두려움을 못이기고 도망가던 아군의 절망과 공포까지 용기와 환희로 바꾸신 이순신 장군님..
다른 게 신이 아닙니다.
다들 불안과 절망을 이기고 평안을 얻고 기대고 싶어 신을 믿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명량 속의 이순신 장군님은 그 순간만큼은 신이나 다름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