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이러한 점에서는 조선은 완전히 탈락. 19세기 중반까지 군사력은 일개 지역 농민 반란 진압도 못할 정도였고 재정은 세도가들이 빨아먹어 엉망진창이라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하고 나서야 어느정도 숨통이 트였을 정도며 과학은 아오안이었고 기술자와 상인들은 천대 받음. >?? 이런 식으로 따지면
이건 잽의 에도 막부가 더 심했음. 미국 페리 제독의 흑선 대포 몇방에 쳐발려
불평등 조약으로 내부적으로 엄청난 인플레이션과 고통을 안겨주었고 결국 막번 체재
를 무너뜨린 메이진 유신 자체가 중앙정부가 권위의 추락고 허접에 캐털려서 나온
상황임.
만약 우리가 외세의 개입이 없이 농학 혁명이 성공했다면 우리도 프랑스 혁명처럼
이미 왕조가 전복되었겠죠.
그리고 대한제국은 기본적으로 이미 조선후기부터 신분제가 유명무실해지면서
철폐부터 근대적 공업화 과정과 보통 전국 의무교육제, 근대적 군사제도,
토지의 근대적 개인 소유권 인정과 근대적 금융 화폐인 백동화부터 중앙은행
출범시도(잽의 방해로 무산) 및 도시 정비사업과 전기 전차 근대적 우편제도, 서양식
자체 양의사와 병원 설립등 다방면에서 빠른 근대화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도리어
이걸 집요하게 방해하고 결국 러일전쟁에서 러샤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한 영미와의 연대가 맞아 영미가 12억엔이라는 천문학적 비용을 지원하고
20억엔의 전비를 소비하면서 주도권을 잡으면서 고종이 근대화의 기반을 만들어
논 대한제국의 근대적 조세권을 1905년부터 장악 수탈과 유출을 대대적으로 쳐하고 막대한 인적 자원 식량
만약 우리가 외세의 개입이 없이 농학 혁명이 성공했다면 우리도 프랑스 혁명처럼
이미 왕조가 전복되었겠죠.
--------------------------------------------------------------------------------------------------
동학 그 누구도
최시형 최제우 전봉준 손병희 그 누구도 절대왕권에 도전하지 않았습니다.
보은 취회 금구취당 1차 고부봉기 2차 봉기 그 어느때라도 왕권에 도전한적은 단 한번도 없습니다.
오히려 왕권은 그대로 존속시키고 부폐한 관리와 삼정문란 동학의 인정을 꾸준하게 내세웁니다.
동학에서 말하는 인내천이 인본사상과 초보적인 인권과 평등사상을 내제하고 있다고 하나
절대 단 한번도 절대왕권에 도전하는 인식이나 시도는 없었습니다.
철폐부터 근대적 공업화 과정과 보통 전국 의무교육제, 근대적 군사제도,
-----------------------------------------------------------------------------------------------
전국 의무교육제? 농담이 지나칩니다
도대체 19세기 어느 나라가 전국 의무교육제같은 걸 실시했다고 합니까?
토지의 근대적 개인 소유권 인정과 근대적 금융 화폐인 백동화부터 중앙은행
출범시도(잽의 방해로 무산) 및 도시 정비사업과 전기 전차 근대적 우편제도, 서양식
자체 양의사와 병원 설립등 다방면에서 빠른 근대화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
평소에도 판타지가 심한건 알았지만 이건 좀..
중앙은행 출범시도(잽의 방해로 무산)
---------------------------------------------------
중앙은행 설립합니다. 그리고 1899년 상업은행으로서 대한천일은행까지 설립하고
국고대여등의 방식으로 적극 지원합니다.
대한천일은행의 최고 간부들은 모두 당시 수구파 구 관료들이였습니다.
근대적 금융 화폐인 백동화
-------------------------------------------
당시 은행을 설립하고 1903년 중앙은행조례,일본 방해로 설립이 안된게 아니라 분명하게 설립한 중앙은행조례와 태환금권조례를 제정 반포하면서
주통화를 동전이 아닌 금본위 지폐를 발행합니다.;;;;;;;;;;;;;;;;;;;;;;;;;;;;;
물론 정치적 번복 어저고는 당시 어찌될지는 미지수이지만 그것의 성공 여부는 당시 조선왕조에 상당한 정치적 타격을 주었겠죠. 실제 이런 밑으로 부터의 동학혁명부터
위로부터의 지식층의 여러 개혁요구와 운동이 결국 고종에게 광무개혁을 이끈 사회적 주요 내부 요소중 하나였든 것이니. 이후 이런 개혁의지가 대한제국이 비록 잽에게 강점되기 까지 짧은 기간임에도 상당한 성과들이 빠르게 진행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
어디서 부터 손을 봐야할지 모르겠네요
동학을 처음부터 설명하기도 힘들고
갑오경장부터 대한제국 선포까지 일련의 사건 배경을 전혀 모르는 듯하니
그냥 한마디로 줄입니다.
아닙니다.
틀렸습니다.
일어난 사건에 대한 해석에 대한 이견차에 틀렸다고 말을 못하지만
사실관계가 엉터리라면 주저하지 않고 틀렸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일본이 빠른 근대화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은 에도시대 덕분입니다. 이때부터 일본은 상공업을 장려해서 상인들과 기술자, 장인들이 대접을 받기 시작했고, 국가 재정 규모는 같은 시기 조선의 13배에 달했으며, 중산계층인 조닌이 태어나 그들만의 문화를 만들 정도였고, 또한 나가사키를 통해 여러 국가들과 교류하면서 서양 학문을 연구하는 난가쿠란 분야도 생겨났을 정도로 국민적으로도 상당히 계몽된 상태였죠. 이미 배경이 갖추어진 상태에서 흑선 내항은 촉매제였을 뿐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신대로 조선이나 에도막부나 후기에는 둘 다 무능과 부패로 썩어들어갔지만 조선은 중앙과 지방이 같이 썩어버려 같이 공멸한 반면 일본은 오히려 지방정권이 개혁에 성공해서 중앙정부인 에도막부를 뒤집어 엎고 근대화에 성공했습니다.
조선은 동학농민운동이 성공했다고 해도 이 운동 자체가 근대화 운동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그 주축들이 부적을 붙이고 주문을 외우면 총알이 피해간다고 믿었던 말 그대로 순박한 농민들이라 프랑스 혁명 같은 계몽주의 혁명으로 이어지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그리고 이런 농민들을 진압하기 위해 조선 정부가 외세에 도움을 요청한 순간부터, 한반도의 근대화는 모두 물거품이 된 겁니다.
애초에 조선은 근대화가 불가능했습니다. 사상적으로도 청일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중화사상에 의해 서양의 것을 모두 오랑캐의 것으로 낮춰 봤을 뿐더러 그런 사상을 가진 지도층도 자신들의 권력과 부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하지 않았죠. 탐관오리에 의해 발생한 동학농민운동 이후에도 중앙 정부는 정신을 못차리고 비리를 저지르며 나라를 나락의 구렁텅이로 떨어뜨렸고 결국 3개월치 봉급 대신 겨와 모래 섞인 쌀을 받은 군인들이 봉기를 하죠.(임오군란) 그리고 이 난들은 둘 다 외세에 의해 진압됐습니다. 나라의 부는 왕실 척족들과 그들에게서 벼슬을 사 임명된 탐관오리들이 갉아먹고 거기에 반발해 일어난 반란은 외세의 도움을 받아 진압하는 나라가 과연 스스로 근대화를 달성할 수 있었을까요?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님한테 물어봐도 불가능하다고 답할 겁니다.
왜구들이 주로 애용하는 에도시대 드립이네요 ㅋㅋㅋㅋ
상공업 장려나 상인과 기술자들이 인정을 받기 시작한 건 일본만이 아니라 조선, 청을 비롯해 전세계적으로 왠만한 나라에서 다 이루어지던 겁니다 ㅋㅋㅋㅋ
조닌..? 조선에는 없었나요 ㅋㅋ 오히려 조선은 거상 임상옥, 이희저를 비롯한 대상인들이 즐비했고
한양의 강상, 개성의 송상, 의주의 만상, 동래(부산)의 내상 등이 서로 전국적인 상업적 교통망이 형성됬고
흔히 5일장이라고 부르는 장시 등이 열리는 등 상업이 빠르게 발전하는 곳이 조선입니다
난가쿠 ㅋㅋ 이건 그냥 네덜란드 의학 책 몇개 번역해놓은 거고요 ㅋㅋㅋ
실제 서양 학문을 연구하거나 개발한 게 있나요ㅋㅋㅋ
게다가 오히려 소현 세자가 청나라에 가서 독일의 선교사 아담샬과 만나 서양의 서적과 문물을 들여온 게 1640년 대, 난학의 대표적인 저서인 해체신서의 등장 1770년대...
누가 더 앞섭니까?
조선의 거상들은 근대적 유통체계로 거상이 된 것이 아니라 그저 청나라와의 거래 독점권을 따낸 어용상인들이었을 뿐이죠. 그리고 보부상 따위는 고대 시대에도 있었던 상업 종사자로 아주 기초적인 수준에 불과합니다. 반면 일본은 이미 오다 노부나가 때부터 금본위제를 채택해서 에도시대 이전부터 상업의 뿌리가 박혔고 에도시대에는 화폐경제와 시장질서가 잡히고 중산층까지 등장하면서 은행 같은 금융기관은 물론 기업집단까지 생겼습니다. 실제로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들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국가고 그 대부분은 에도시대에 설립됐지요. 또한 서양과의 교류도 활발해 조선이 청과 일본 단 두 나라와 교역할 동안, 막부는 120여개국과 교류했습니다. 그리고 소현세자는 왜 나오는지 모르겠군요. 그래서 소현세자가 왕이 돼 부국강병을 달성했습니까 백성들이 서양 학문에 관심에 가졌습니까? 오히려 벼루 맞아 죽고 조선은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잖아요?
에도 말기에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1866년 유럽에 원인 모를 미생물 전염병이 돌아 누에가 떼죽음 당해 양잠산업이 파탄날 지경에 놓인 일이 있었습니다. 이 때 네덜란드를 통해 소식을 전해들은 에도 막부가(당시 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 집권) 프랑스에 일본산 누에를 보냈고 당시 프랑스 국왕이었던 나폴레옹 3세는 루이 파스퇴르와 앙리 파브르의 조언에 따라 일본 누에의 연구를 지시해 전염병의 원인을 연구하고 품종개량을 진행해 극복했죠.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나폴레옹 3세는 뛰어난 명마로 알려진 아라비아산 명마 26필을 막부에 선물로 보내고 사육법도 알려줬다고 합니다. 이렇듯 일본은 오늘날과 다를 것도 없이 서양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조선은 뭘 했죠? 안동 김씨랑 풍양 조씨가 나라를 말아 먹고 있었죠.
그리고 또하나, 1763년에 일본인 유학자 다키 가쿠다이(瀧鶴臺)가 조선통신사를 만난 자리에서 이런 대화를 합니다. "시서예악(詩書禮樂)의 가르침을 입는 나라는 귀국과 우리나라, 오키나와, 베트남뿐입니다. 서양과 남만에서 우리 나가사키에 배를 보내는 나라가 120여개 국입니다. 이 나라들에는 각각 그 나라의 도(道)가 있어 다스려집니다. 이용후생의 도를 세우는 것은 하늘을 대신해 백성을 편안히 하는 것이니, 하필 중국만 유독 귀하고 오랑캐의 가르침은 버릴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세상에는 유교 말고도 수많은 다스림이 존재하고 있다’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학문이라도 유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으니 이제 중화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시대를 앞서간 주장이었죠. 그러나 원중거와 성대중 등 조선통신사들은 이 말을 듣고 일본이 행여 주자학을 버리고 이단의 길로 빠지지 않을까 우려했다고 합니다. 사상적으로도 이미 18세기 초부터 세계와 교류하던 일본은 개방적이었고 조선의 정신세계는 성리학과 중화사상 이외에는 모조리 차단돼 있었던 것이죠. 이미 양국의 근대화 역량은 정해진 수순이었던 겁니다.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자면, 소현세자가 1640년에 청나라 가서 아담샬 만나고 온 이야기를 자랑하시는데 일본은 이미 1540년대부터 포르투갈과 교역을 시작해서 조총 등 각종 문물을 들여왔을 뿐만 아니라 1563년에 포르투갈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가 일본에 방문해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대기 관찰하여 "일본사"를 저술했고 임진왜란 때는 역시 포르투갈 선교사인 세스페데스가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종군했죠. 그 이전에 오다 노부나가가 포르투갈 상인들과 교류하다가 얻은 흑인 노예 야스케를 사무라이에 봉했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아담 스미스라는 영국 출신 항해사를 가신으로 삼아 서양식 갤리선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또한 일개 다이묘였던 다테 마사무네도 독자적으로 서양식 갤리선을 건조하여 자신의 가신 하세쿠라 쓰네나가와 자신의 영지에 선교하러 온 스페인 선교사 루이 소테로를 태평양과 대서양을 거쳐 로마 교황청까지 보내 무역허가서와 각종 물건들을 얻어오기도 했죠. 조선은 청나라를 통하지 않으면 외국인과 소통하는 건 19세기 초까지도 꿈도 못 꾼 반면 일본은 전국시대부터 그들과 소통하고 교류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언어로된 책도 번역하면서 서양 문물을 연구해왔습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일본 근대화의 자양분이 된거죠.
일본이 실제 서양 학문을 연구하거나 개발한 게 있냐고 물으셨는데 당연히 있습니다. 에도시대에 서양에서 톱니바퀴와 태엽을 배워 초기 로봇이라 할 수 있는 가라쿠리 인형을 만들었고 환등기를 배워 초기의 영화라고 할 수 있는 우쓰시에란 그림자 연극을 만들었죠. 그리고 조닌들은 이를 즐겼습니다. 서양이 기술을 제공하고 일본의 장인들이 그 기술을 숙달해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면 중산층인 조닌이 이를 소비한 것으로 소비가 생산을 자극하고 서로 맞물려서 전개되는 시스템이죠. 서양과의 교류를 통해 이런 경제적, 문화적 자본주의가 에도막부부터 뿌리내리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원래 조선은 기본적인 유교 교리가 더 극대화되서 타 문물을 받아들일수가 없었어요..
조선후기능력자로 평가받는 정조 조차 천주교가 문제되사 싹 잡아서 다 사형시켜 버렸죠..
이러니깐 당한나라에선 군함보내서 화풀이한것이고...조공 이외에 조약이라는 국제질서를 알아차린게
1880년경입니다....청나라조차 1870년대에 조약을 이용해서 이권을 취득하거든요...
정조는 천주교에 대해서 미혼적, 중립적 입장이였고 도리어 우리 내부적 정학이 바로서면 이런 서학은 저절로
------------------------------------------------------------------------------------------
아닙니다. 정조가 조선 내부의 바로 선 학문이 있으면 사학은 스스로 멸할 것이라고 말한 것은 맞지만
정조가 미혼적 중립적 입장이 아니였습니다.
정조 역시 천주학 천주교의 사상을 용인하지 않았습니다.
과거에 대해 반성과 이유에 대한 분석은 필요하고, 현재와 미래를 위해서는 자기비하는 불필요하죠. 과거에 대해 비평적으로 보거나 분석해 보는 것은 자기비하라고 생각 되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완전 잘못된 시각에 근본을 두고 있거나 현재 부터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행동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냉정하게 보는 것은 나쁠 것 없지 않을까 합니다.
괜히 유교 탈레반이였겠습니까.., 공무원들이 전부 행정가가 아닌 유교철학자였고 조선을 움직이는 실무자들은 노비들이였죠 -_-;;
아무튼 조선은 그런 체제가 매우 철저한 나라였고 그 이유때문에 나라가 가난할 지언정 내부적인 문제로 망하지는 않았습니다. 망할뻔한적은 있어도..
일단 조선은 세수부터가 서구화 하기엔 노답..이였죠 인구는 폭발했는데 재정은 건국초 보다도 더 가난하니..
갈수록 늘어만 가는 세금을 내지않는 면세계층(양반,노비) 전 백성의 위장취업화..
이 모든게 먹는게 조선의 사기적인 농업법 덕분에 안그래도 인구부양에 탁월한 쌀에 생산량까지 높으니 풍요로워서 생긴 문제일수도 있습니다.
확실히 평화는 과학 기술 특히 무기 기술 발전에 마이너스 요인이 되긴 합니다. 임진왜란도 발생의 가능성은 일찌감치 알고 있었지만 임진왜란전 경상도쪽 축성 과정 중에 평민들의 불만도 상당했죠. 근 200년간 전쟁이 없다보니 임진왜란전 전쟁 대비에 대한 반대론자도 많이 나오게 됬죠.
그 중기가 아쉽다는거죠, 임진년때 충분히 조총의 존재를 알았으면 분명 서구의 기술력을 짐작했을테고, 나가사끼 항에 상시적으로 유럽인들이 정주한다는걸 알고있었을텐데, 정조시대를 2가지로 바라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하나는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 시대, 하나는 유럽은 끝없이 폭발적으로 팽창해 나가고 한중일 모두가 엄청난 발전을 이뤘는데 조선은 그들보다 발전하지 못했다는거죠.. 쉽게말해 정조시대는 전세계적인 성장기였음에도 조선은 그들보다 발전이 적었다는 겁니다.
사실 흥선대원군이 조선중기에 태어나서 서원철폐, 비변사 철폐, 양반에게 세금물리는등 이런 천지개벽할 개혁이 진작에 나와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죠. 그랬다면 유럽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건 일본이 아니라 조선이였을 껍니다.
다만, 한가지 바라볼 것은 세계흐름을 읽지 못했다거나 혹은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 무능으로 이어져야 하는가입니다. 이건 순전히 산업화시대 전후의 열강들의 입장에서 세계를 바라본 시각이었죠. 그들에겐 돈과 그것의 새로운 시장이 목표였기에 다른 나라들을 침략했고,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그들의 시각이 다른 나라들은 무능, 야만하기에 우리가 도와주러 간다는 것이었죠.
물론, 당시 임진왜란이나 기타 해외정세에 어두웠던 건 저 역시도 아쉬워 하는 부분이지만... 그렇다고 그걸 무능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조선 초기 최악의 실책은 상업을 천시하고 ( 아마 사실은 지방 호족의 대두를 막기 위해서였던 것 같지만 ) 해상으로서의 무역을 금지하게 된 바람에 은 제련 기술이 결국 일본으로 넘어가서 은광은 많았지만 제련을 통해 조선이 크게 이익 보던 부분이 결국 일본이 직접 운영 가능하게 되면서 국력이 그후 아주 크게 된 계기를 만들어줬다는 것이 무척 아쉽습니다.
임진왜란 끝나고 경복궁을 복원하지 못해 흥선대원군 때에 복원하였습니다. 백성들이 이 폭정에 많이 희생되었죠. 왕도 보릿고개에는 쌀밥 먹기 힘들었던 조선시대에 왕과 사대부가 깨어있어 개화하고 근대화를 이뤘다고 해도, 일본이나 중국과 국가자본이 될만한 것들이 없었기에 똑같은 결과가 되었을 겁니다. 개화된 조선이 매력적인 먹이감이 되어야 무역이 일어나는데, 조선은 농업국가로 매력적인 것이 없었습니다. 일본과 중국을 다니던 서양의 무역선들도 조선을 다니지 않았던 이유는 조선이 그만큼 가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멜의 표류기 등이 조선의 서양에 알렸는데도, 조선에 찾아오는 서양은 없었죠.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 반강제의 개화가 된 것도 있죠.
임진왜란 이후부터 조선의 발전은 정지 상태에 가깝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통신사의 기록에 보면 오사카에는 기와집이 아닌 집이 없었고, 많은 배가 오고가는 모습이 놀랄만큼 장관이다라고 묘사합니다. 임진왜란 이전 시점부터 개화하여 무역이 활발하고, 일본이 농업국가이긴 하지만 상업이 발달하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무역은 거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수요가 있는 물건이 있기에 교역이 되는 거라 생각합니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초기에는 귀금속류 칠기 등을 조총과 교환한 것 같습니다. 일본이 중국에 비해 적극적으로 무역을 하며 발전을 했습니다.
조선은 그 당시에도 포장된 도로도 적을 뿐더러, 대부분이 초가집입니다. 나라의 경제규모 및 서민의 삶을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랑 보는 시대가 틀린데, 시점은 임진왜란으로 보시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조선의 몰락의 중요한 연결고리가 임진왜란 입니다. 그 후로 조선의 식물인간이었습니다. 궁을 재건할 능력이 안되서 사택을 궁으로 지정하여 사용합니다. 정치적인 문제로 풀 수 있을 정도로 조선의 경제가 그 뒤를 받쳐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겨우 먹고 살았다고요.
참... 뭔 소리 하는지... 우선 오류 저 위에 정조가 천주교도 다 잡아 죽인게 이니고 정조 이후에 순조의 신유박해 입니다.
조선시대의 상업의 주로 조공과 함께 이뤄졌습니다. 뭐 의주 등의 교역지도 있었지만, 그리고 조선의 주 교역품의 뭔가요. 저는 그저 쌀 팔아서 책 사오는 걸로 밖에는 안 보였습니다. 나머지는 그냥 조공이죠. 청은 조선에 원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조공을 받으면 그만입니다.
영정조시대에 개혁을 통한 발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나열한 정부의 정책이 성공했다는 증거가 있나요? 제가 말하는 증거는 몇개의 수공업품이 새로 생겨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나라 전체에 영향을 줄 정도로 큰 변화를 말하는 겁니다. 그걸로 나라가 부국강병해졌습니까?
조선의 효율적 유통이라... 막대한 부라... 참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하십니다. 돈 번 사람도 있었겠지요. 국내 유통으로 돈 벌어 얼마나 벌었겠습니까...
책에 나온 이야기만 보지 마시고, 생각 좀 해보세요. 그냥 역사책 보고 상식 선에서 이야기 하는 겁니다. 님이야 말로 제가 보기에는 허접하고 무식합니다.
제가 말한 이야기는 제 말이 아니고 조선 통신사 김인겸이 오사카를 기술한 말입니다. 오사카의 예전 자료를 보면 집을 나무로 지붕이 초가는 아니더군요. 조선은 개화시기에도 초가집이 많았지요. 중국도 초가집은 아주 오래전 이야기고요.
참... 뭔 소리 하는지... 우선 오류 저 위에 정조가 천주교도 다 잡아 죽인게 이니고 정조 이후에 순조의 신유박해 입니다. >??
누가 뭐라고 하던가요 ㅋㅋ 그래서 정조는 미혼적 태도였다고 말하는 것이고
순종시대만큼 적극적 대규모 박해는 아니였다는 걸 말하는데 뭔 소리하심?
<조선시대의 상업의 주로 조공과 함께 이뤄졌습니다. 뭐 의주 등의 교역지도 있었지만, 그리고 조선의 주 교역품의 뭔가요. 저는 그저 쌀 팔아서 책 사오는 걸로 밖에는 안 보였습니다. 나머지는 그냥 조공이죠. 청은 조선에 원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조공을 받으면 그만입니다>???
임진왜란 이후부터 조선의 발전은 정지 상태에 가깝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통신사의 기록에 보면 오사카에는 기와집이 아닌 집이 없었고, 많은 배가 오고가는 모습이 놀랄만큼 장관이다라고 묘사합니다. 임진왜란 이전 시점부터 개화하여 무역이 활발하고, 일본이 농업국가이긴 하지만 상업이 발달하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무역은 거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수요가 있는 물건이 있기에 교역이 되는 거라 생각합니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초기에는 귀금속류 칠기 등을 조총과 교환한 것 같습니다. 일본이 중국에 비해 적극적으로 무역을 하며 발전을 했습니다.
조선은 그 당시에도 포장된 도로도 적을 뿐더러, 대부분이 초가집입니다. 나라의 경제규모 및 서민의 삶을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랑 보는 시대가 틀린데, 시점은 임진왜란으로 보시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조선의 몰락의 중요한 연결고리가 임진왜란 입니다. 그 후로 조선의 식물인간이었습니다. 궁을 재건할 능력이 안되서 사택을 궁으로 지정하여 사용합니다. 정치적인 문제로 풀 수 있을 정도로 조선의 경제가 그 뒤를 받쳐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겨우 먹고 살았다고요. >???
(일본)백성들이 고생스럽고 인색한 것은 아마 천하에서 최고일 것으로 비록 우리 배를 끄는 격졸(格卒)로 말한다 하더라도 매일매일 익힌 고구마 뿌리를 두 번 먹고 그 뒤에 밥을 먹는 사람은 오분의 일에 불과하다.또한 수저질 몇번에 나무 그릇 바닥에 닿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비록 같이 앉아서 먹는 사람이 (밥이)없다고 해도 양식 한 톨도 나누어 주지 않는다.
(우리)여섯 배에 타고 있는 왜의 사공들은 예에 따라 우리가 음식을 먹이는데, 모두 큰 통을 가지고 와서 반드시 음식을 많이 달라고 한다.(우리)격군들이 그들의 음식을 탐하는 것을 비웃으며 질책을 하여도 또한 부끄러움을 알 지 못하였다. 백성들은 날로 번창하는데(숫자는 많아지는데)살아가는 형편이 이와 같이 심하게 고통스러우니, 만일 그들의 배를 만드는 능력이 우리의 열배가 된다면 우리 앞날에 닥칠 근심이 또한 적지 않으리라 저어된다.
마을은 가히 백 호쯤 되는데 모두 초가집이었고 사는 것이 궁핍했으며 모두 남루했고 빗질도 안 했으며 씻지도 않았다. 여자들은 나오는 사람이 한명도 없었으니 의복이 깨끗하지 않아 다른 사람을 만날까 부끄러워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널로 덮은 3층짜리 집들이 있었는데 모두 신사(神舍)와 승사(僧舍)라고 한다.
고공사 아래에 머물렀을 때 작은 배에 나무 손잡이가 있는 둥근 어망을 실은 어부가 그 아내와 더불어 배를 저어 오징어를 잡고 있었다.
어부는 한 자쯤 되는 베로 음부를 가리었고 그의 아내도 한 자쯤 되는 베로 치마폭을 만들어 앞뒤를 가리었으니, 남녀가 온몸을 벌겋게 내놓고 있었다.
왜의 소동(小童)이 밥과 국 세 상을 내왔다. 모두 옷칠한 작은 그릇에 담아 뚜껑을 덮었다.나뭇조각을 겹쳐 접어서 마치 부채를 펼친 것 같은 데다가 생선회와 고래비계 등을 담았다.방어와 자포(煮泡)등 반찬이 거의 십여가지나 되었지만 시고 싱거워서 모두 먹을만 하지 못하였다.계속해서 건과를 내왔는데 역시 먹을 수가 없었다.
이키섬에 머물렀다.날이 개고 좋았다가 반나절만에 다시 흐려졌다.
..이 섬의 지공은 빠진 적은 없으나 그 조잡하고 더럽고 자질구레한 음식들은 먹을 수가 없었으며, 대통과 찬합의 비리고 누린내 나는 것은 웃을 수조차 없었다.
비전주의 일기도를 출발해서 축전주의 남도(藍島)에 정박했다....숙공(익힌음식)을 내왔다. 이른바 연근국이라는 것과 익힌 전복인데 모두 먹을 수가 없었다.
에도에 머물렀다...음식은 진무(振舞) 때와 다름이 없었으나 가히 젓가락을 댈 수가 없었다.
의복은 비단을 쓰기는 하지만 아래에는 바지가 없고, 또 겹으로 입거나 솜을 두툼하게 넣지 않는다.음식은 아침저녁 밥을 반드시 다 먹는 것은 아니다.음식에는 작은 그릇을 쓰는데 술잔만 하다.반찬도 많이 차리지 않는다.생선은 비리고 싱겁다.장 역시 짜지 않다.먹는 것은 쌀 몇 약(1홉의 1/10)에 지나지 않는다.입고 먹는 비용은 그다지 많이 들지 않는다.방에는 구들이 없고 재목은 이루 다 쓸 수 없는 정도이다. 사치스러운 것은 오직 방과 집뿐이다. 저들이 우리의 의관을 보고 흠모하는 마음을 가져서 빌려다 보고 제도를 상고하는 자도 있다.우리나라 사람은 풍토가 맞지 않아서 저들의 익힌 음식을 먹지 못하는데, 저들은 우리 종들이 이바지한 형편없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맛있다고 한다. 음식이 좋지 못한 것을 저들이 일찍이 알지 못했을 리가 없다.
에휴.. 말을 못 알아 듣는데... 조선통신사 김인겸이 했던 말이라고... 참...... 그리고 오사카 역사 박물관에 있는 그림에 보면 일본은 목조 주택이 발달되어 있고, 한국은 서민 집에 초가집이 많았습니다. 초가집 살아요? 거기서 열등감 느껴요?
뭔 헛소리 줄줄 떠들지 말고... 내가 쓴 글중에 나라 이야기 있어요. 오사카 말했지... 뭔 딴소리 엄청 열시히 하는데... 오사카성 짖고 난 다음 이야긴데.. 왜 자꾸 나라니 헤이안이니 뻘소리를 그렇게 해요.
아는 척 좀 하고 싶은 모양인데... 무식해 보여요. 시공간을 초월해서 사세요. 동네랑 시대가 전혀 틀리잖아요.
무능한 것도 맞지만 편가르고 헐뜯기 좋아하는 습성때문에 망한 것임. 다른 나라 다 발전하고 있을 때 서로 권력싸움에 나라의 수준이 정체된 것임.
남의 의견도 존중하고 서로 화합하는 맛도 있어야 하고 단결이 되야 나라가 발전되는 건데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수준의 사람들이 자기만 잘났다고 헐뜯고 있으니...이쯤되면 뭐한 말이지만 민족대대로 습성이 유전되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
넵. 당시의 사람들이 무능했다기 보다는 아마 권력적인 측면에서 알고도 안했을꺼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의 사람들도 그 환경 내에서는 할 수 있는 최선의 생각을 했지만 권력과 이익적인 측면에서 행동으로는 옮기지 않았던 일들이 많았겠죠. 결국 그 결과를 지금 돌아보면 무능해보이기만 하고.
그리고 한마디 더 하자만 임진왜란 이후에 훈련도감을 신설하여 외국인이나 국내 고수들을 모집하여 훈련도감을 만듭니다. 조총 및 대포등을 사용하고 신식무기도 개발합니다. 기록에 따리면 천리 정도의 거리까지 사격이 가능한 조총도 개발하고 하지만, 이 역시 의도는 좋지만 뜻대로 되지 못한 이유는 자금부족 때문입니다. 뜻이 있어도 조선이란 나라는 그것을 이룰 힘이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