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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2-20 03:43
고대 중국은 정말 최고네요.
 글쓴이 : 효자
조회 : 6,486  


기원전 3세기 진시황의 병마용갱에는 우리가 아는 병사들 조각뿐만 아니라 각종 직업의 사람들과 동물들이 실물조각으로 만들어져있다고 합니다. 그중에서 일꾼들이 일하는 모습을 조각으로 표현한걸 가져와봤습니다. 저런 조각들이 약 3만개가 넘는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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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풀 15-02-20 03:47
   
중국이 가진 역사란게 솔직히 마냥 무시할만한 수준은 아님
떼놈들이 동북공정등으로 꼴사납게 달려드니 까이는거지
     
효자 15-02-20 04:00
   
중국은 하나의 민족 역사가 아니죠 ㅋ 동아시아 여러 민족의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mymiky 15-02-20 03:47
   
중국 물량빨 따라갈수 있는 나라가 거의 없음
병마용 실물로 언젠가 꼭 보고싶음
박똘똘 15-02-20 04:22
   
병마용은 진짜 한번 보고싶다.
     
대지국밥 15-02-20 15:19
   
중국내 유적지 입장권 가격중에서도 손꼽히게 비싼편이지만 돈값을 하더군요..

삥마용 찱흙 아재들은 정말 볼만했슴 아직도 막파고 있는곳도 있슴..

근데 거기 근처에 비슷한 가격에 화청지라고 양귀비랑 당태종? 맞낭? 암틈 그두넘뇬이 아방궁으로 쓰던 궁전비슷한게 있는데 그건 욕쳐나옴 ㅋㅋ
바벨 15-02-20 04:26
   
당시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서 만든 병마용갱과 만리장성..
중국애들이 인류사적으로 업적이라고 대놓고 자랑하기엔 좀 그렇지 않나요.
지네 조상 피무덤위에 지은건데..

우리나라는 그런면에서 백성들 착취해서 만든걸 대놓고 자랑은 안하죠..
그저 설화 속 에밀레종 정도..
     
효자 15-02-20 04:28
   
근데 저 시대때 건축물들이 다 그러지 않나요..
          
바벨 15-02-20 04:36
   
계급이란게 생기고 나서 만든거니 어딜가나 노예를 부려먹거나 착취를 하지만..
만리장성이나 병마용갱, 대운하 정도의 사이즈는 노예가 아니라 일반 백성들을 끌어다가 무덤위에 지은거니 정치적으로 자랑할 만한 유물은 아니죠..
               
효자 15-02-20 04:40
   
정말 만리장성은 아직도 어케 그걸 다 지었나 신기하네요 ㅋ
드림케스트 15-02-20 04:30
   
저들은 상투를 하고있는데 상투는 중국애들이 하던게 아닌게 함정.
     
효자 15-02-20 04:32
   
저거 상투 아닐걸요..
듣보잡 15-02-20 04:35
   
저게 고구려 군대라는 설이 있던데.....
당시 기마 문화 복장 상투 위치등등..
     
효자 15-02-20 04:36
   
기원전 3세기에 고구려 있었나요?
듣보잡 15-02-20 04:36
   
ㅋㅋㅋ 어그로 죄송요 고조선이였나? ㅋㅋㅋ
     
효자 15-02-20 04:38
   
네 기원전 3세기는 고조선이에요 ㅋ
듣보잡 15-02-20 04:37
   
암튼 어디서 봤는데  댓글로 사람들에게 엄청 까이더라고요
듣보잡 15-02-20 04:38
   
저 연대도 잘못되었다는 주장도 있었고요.
중공이 국가적으로 너무 외곡을 심하게 해서 그들의 주장을 다 받아들이기기 힘든 부분도 있습니다.
     
효자 15-02-20 04:41
   
진시황릉하고 병마용은 왜곡 없다고 알고 있는뎅 ㅋ
     
mymiky 15-02-20 05:12
   
가설이지만
진시황의 증조모?고조모?뻘인 선태후 무덤이란 설은 있습니다
그렇다면 연대가 더 올라가겠죠
바벨 15-02-20 04:43
   
진나라 그뒤 왕망의 신나라 연대기가 고조선이랑 같이 물려 있죠.
북창 15-02-20 07:51
   
착취의 역사죠.
굿잡스 15-02-20 08:41
   
진 다음에 한나라 가서야

한족이라는 아이덴티티가 등장함.

그리고 저기 보이는 마차의 원형이 우리 고조선

이 있던 발해만일대에서 나옴.

사마천의 사기 진시황본기를 보면 불로장생을 위해

산둥 우사를 찾아가는데 이러한 술법이 발해만에서

흘러 내려왔다고 하고 있으며 춘추전국시절 편찬된

산해경엔 발해만의 위치와 조선(고조선)의 명칭이

뚜렷이 기록되어 서토 도교의 원류가 우리 고조선

문명권에서 흘러들어간걸 알 수 있는.
굿잡스 15-02-20 09:11
   
귀장(歸藏)》 ○ 《포박자(抱朴子)》에는, “황제(黃帝)가 동쪽으로 청구에
 
도착해서 풍산(風山)을 지나다가 자부(紫府) 선생을 만나 삼황내문(三皇內
 
文)을 받아 이로써 만신(萬神)을 불렀다.” 하였다. ○ 《회남자(淮南子)》에
 
는, “요 임금이 예(羿)를 시켜서 청구의 못에서 대풍(大風)을 돌리게 하였
 
다.” 하였다. ○ 《여씨춘추》에는, “우(禹)가 동쪽으로 가서 큰 나무가 있
 
는 곳, 구진(九津)에서 해가 떠오르는 청강(靑羌)의 들판, 나무가 모여 있는
 
곳, 하늘까지 닿은 큰 산, 조곡(鳥谷) 청구(靑邱)의 향(鄕), 흑치(黑齒)의
 
나라에 이르렀다.” 하였다. ○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는, “청구는 고
 
려의 경계 안에 있다. 자허부(子虛賦)에, ‘가을에 청구에서 사냥한다’ 하였으
 
니, 대개 이것을 말한 것이다. 복건(服虔)이 말하기를, ‘청구국은 해동 3백
 
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고, 《진서(晉書)》 천문지(天文志)에 ‘청구 칠성(靑
 
邱七星)은 진수(軫宿)의 동남쪽에 있는데, 청구는 만이(蠻夷)의 나라 이름이
 
다.’ 하였고, 당나라가 고구려를 토벌하고는 청구도 행군총관(靑邱道行軍摠
 
管)을 두었다고 한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곽박(郭璞)이 말하기를, “우(禹)가 수해(竪亥)에게 청구의 북쪽
 
을 명하였다.” 하였고, 《회남자》에 말하기를, “청구는 제(齊)의 바다 바깥
 
에 있다.” 하였으니, 청구라는 것은 대개 동방에 있는 나라이다. 《천문유초
 
(天文類抄)》에 “청구 칠성은 동방 삼한(三韓)의 나라를 주관한다.” 하였으
 
니, 이것 역시 지역으로 이름한 것이다.


- 서토사서에서 동이족 관련 기록등을 모아 만든 <해동역사>

우리의 자부가 삼황내문을 황제에가 주었다는 기록이 나오군요. 이 삼황내문은 도교의 경전의 일종.

최치원이 난랑비서문에서 유,불,선을 아우르는 우리의 고유한 현묘지도인 풍류가 있다고 전한 이유가

있음.
쿨맨 15-02-20 10:05
   
고대 중국이 아니고, 현재 중국 땅이라고 우기는 땅에 살던 옛날 다른 나라, 다른 민족들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발전된 것 중에 대단한 것이 좀 있었다.. 이렇게 말해야 정확한 것이죠.
굿잡스 15-02-20 10:26
   
하남박물원(河南博物院)

东夷人是中华民族先民的主干部分
동이인(東夷人)은 중화민족 조상의 주요한 줄기부분(主幹)이다.

张发颖在《凤图腾东夷人及其文化贡献》〈《社会科学辑刊》2001年第2期〉一文中认为东夷文化
  范围的遗存遍布燕山南北,包括辽宁阜新查海文化,沈阳新乐文化,山东大汶口文化,河姆渡文化
  以及其后的赵宝沟、兴隆洼、牛河梁及殷商文化,东夷文化以凤为图腾,不是统一的文化体系,
  而是对有记载以来生活在这地区先民的泛称,以凤为祖图腾,繁衍为以各种鸟为子图腾的北方凤图腾的
  东夷先民,都是在燕山山脉东夷文化圈中发展起来的。从伏羲到夏商二代,起主导作用的也是东夷文化。
  东夷族人发明了带羽毛弓箭,创造了文字,制作青铜器与冶铁,制造舟、车,发展农业与治水。
  为中华民族文化的发展和推进,起到了关键和决定性作用,华夏文明是龙凤后裔融合而后共同创造的。

장발영(張發潁)의 저서
<봉황토템 동이인 및 그 문화의 공헌>- <시회과학집간>2001년 2기- 에서

동이문화의 유적분포는

- 연산(燕山)의 남북과
- 료녕(遼寧)의 부신사해문화(阜新查海文化)를 포함해서
- 심양(沈陽)의 신락문화(新樂文化),
- 산동의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 하무도문화(河姆渡文化)와

그 후의
- 조보구(趙寶溝), 흥륭와(興隆洼), 우하량(牛河梁) 및
- 은상문화(殷商文化)까지

동이문화는 봉황(鳳凰)을 토템으로 하였다.

통일된 문화체계는 아니지만
문헌에 기록된 이후의 생활은 이 지구(地區)의 조상들의 범칭(광범위한 동이문화)이다.
 
봉황을 모(母)토템으로 삼고
각종 새들을 자(子)토템으로 하는 북방 봉황토템 동이의 조상들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들은 모두 연산산맥(燕山山脈)의 동이문화권을 중심으로 발전되어 왔다.
복희(伏羲)에서 하상(夏商) 2대까지 동이문화가 주도적인 역할을 해 온 것이다.

동이족 사람들은

- 깃털달린 활과 화살을 발명했으며,
- 문자를 창조했으며,
- 청동기를 제작하고,
- 철을 단련했으며,
- 배(舟)와 수레(車)를 만들었고,
- 농업을 발전시키고 치수(治水)를 하였다.

동이족이 중화민족의 발전과 진보를 위하여 주된 역할과 결정적 작용을 하여
화하문명(華夏文明)은 용봉(龍鳳)이 융합되어(화하족의 용과 동이족의 봉문화가 융합되어)
공동으로 창조된 것이다.


서토 최초의 실체하는 왕조인 상나라 자체가 당시 고조선 문명권이 있던 동북방에서 내려온

이민 동이족 정복사임. 이 동이족에 의해 서토의 제례,도성,정치체계와 문자등이 생겨남.
굿잡스 15-02-20 10:36
   
東海之內 北海之偶 有國名曰 朝鮮

동해지내 북해지우 유국명왈 조선

"동해(서토 동해안) 안쪽, 북해(발해) 모퉁이에 조선이란 나라가 있었다”

라는 설명이다

-산해경(춘추전국시절 편찬된 지리서)



<1968년 역사학자 천판(陳槃)이 펴낸 ‘춘추대사표열국작성급존멸선이(春秋大事表列國爵姓及存滅선異)’라는 책이었다. 기존 사서를 근거로 중국 중원에 산재했던 춘추시대 170여 소국의 역사를 비정한 역사책인데, 바로 선우라는 항목이 있다.

“선우는 일명 중산이라 한다. 회남자는 우(虞)는 혹 우(于)라 했다. 선우(鮮于)는 그 선조가 자성인데(其先子姓), 기자는 조선에 봉하고(以箕子封朝鮮), 기자의 둘째 아들은 우(于·핑산으로 추정)에 봉했다. 여기서 자손들은 조선의 선(鮮)과 봉지 우(于)를 따서 선우(鮮于)씨라 했다.(子孫因合 ‘鮮于’爲氏)”(천판)>

은나라의 후예 어쩌고 금석문이 발견되었고 여기에 기자의 후예

어쩌고로 이 선우씨의 유래가 참 재미있고 눈에 확띄는 대목이 선자가 조선의 선자와 봉지의 우자가

합쳐서 나오는 말이라는.  자세한 내용과 선우중산국의 위치까지 확인 바람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5021738135&code=210000

그외 고죽국의 경우도 눈여겨 볼 부분인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4041710515&code=210000


요서에서 발견된 두로영은(豆盧永恩)의 비문에

조선건국 고죽위군朝鮮建國 孤竹爲君’(조선이 건국을 하고 고죽이 임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