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얘기하자면 당시 일본도 나치의 전략에 동조하는 육군파와 친 서방파인 해군파가 심각한 대립을 했습니다. 개전전까지 이 이견은 좁혀지지가 않죠. 다만 나치가 프랑스와 네덜란드를 제압하면서 네덜란드와 프랑스의 동인도회사아래 신음하던 동남아에 권력 공백기가 생기자 자원부족에 허덕이던 해군도 관점을 바꿔 육군의 계획에 가담하게 됩니다. 이소로꾸 해군총장같은 이의 저항이 있긴 했으나. 당시에는 독일이고 일본이고 떠나서 네덜란드나 프랑스의 식민통치도 가관이던 시점이라 일본해군이 진주만 타격이후 몇달간 동남아에서 거둔 성과는 대단한데가 있었습니다. 인도차이나 300년 유럽식민통치가 고 며칠 사이에 종막을 맞이했으니까요. 물론 그 다음 들어선 일본도 도낀개낀이었다는건 함정.
히틀러와 괴벨스, 공산주의자들과 다른 정당을 선동과 나치친위대를 이용하여 사건을 조작하고 국민의 여론을 조작하여, 나치는 최다 정당 최다 득표율 그리고 바이마른 공화국의 사망선고를 한다. 나치당의 상징은 독일 국기를 대신했으며, 독일국민들은서서히 나치에 동조한다. 히틀러는 1차대전에 참전했던 유능한 장군들을 자신을 지지하는것처럼 말했고 구미와 영국 프랑스등 1차대전이후 막대한 배상금요구에 지친 독일 국민들에게 감정적인 요소를 자극하여 득표율을 올리는데 성공하였다. 처음에는 천표도 안되던 나치가 훗날 미국경제대공황을 사태로 1천만과 훗날 절반이상의 국민들이 지지함, 힌덴부르크 대통령이사망할 무렵 히틀러는 독일을 나치가 지배하는 나라로 만들었으며 유대인을 몰아내야 한다며 유대인은 악의 근원이라며 민족적 증오를 이용하였다. 언론 의회 총통의 자리 국가의 모든 권력을 장악한 히틀러는 무솔리니에게 가서 오스트리아 합병 인정을 요구하고 서서히 전쟁의 서막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연설할때만큼은 열정적이고 광적이며, 극적이였으며,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하고 호소했다. 그것이 히틀러의 방법이었다.현재 일본이 반일감정과 혐한감정을 조장하는 일은 히틀러가 유대인증오를 이용하여 득표율을 올릴때 쓰는방법과 동일한 수단이 아닐까? 혐한,반일감정또한 이러한점을 경계해야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