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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7-30 22:41
자본주의 핵심요소인 신용거래가 조선 후기 엄청 발달 했군요..
 글쓴이 : 솔루나
조회 : 659  

18세기 후반 개성을 중심으로 시작된 환거래는 19세기 이후 점차 일반화되어갔다. 1895년 '일본공사관기록'에 의하면, 함격북도 경성, 명천, 길주지역에서는 일본은화, 러시아 은화, 조선 동전이 유통되고 있었지만, 조선상인들의 거래는 어음을 통해 대부분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지역에 진출한 초기 일본상인들은 이와 같은 환어음거래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낳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조선상인들의 신용거래에 적응한 일본상인들도 점차 어음을 사용하게 되어 4천원에서 5천원정도의 거래는 어음으로 결제한다고 애기하고 있다. 일본상인들의 어음거래 규모는 일본, 러시아 은화 유통규모의 5% 이상이었다. 일본상인들의 일상적 거래에 어려움을 초래할 정도로 조선 상인들의 거래에서는 신용거래가 일반적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어음 유통은 19세기 이후 확대되어갔지만, 개항이후에 훨씬 더 보편적으로 유통된 것으로 보인다. 그 쓰임도 상거래에 국한되지 않고 임금지불, 여행경비지불, 벌금납부, 조세납부 등 매우 다양한 분야에서 유통되고 있었다.

조선후기~한말 신용거래의 발달 (고동환) 논문

뿐만 아니라, 광무제(고종)도 어음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본 논문의 맺음말을 인용하면.....

근대적 화폐, 은행제도, 장기채와 공채 등 금융과 보험과 같은 신용을 기초로 전개된 상업거래는 물질생활과 시장경제,, 자본주의라는 층위에서 제일 상층을 차지하는 자본주의의 핵심요소이다. 이러한 신용에 토대를 둔 거래가 어느 정도 활성화되었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118세기 이후 상업 발달의 질적 지표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기준이다.
(중략)
19세기말 20세기 초 육의전 역인청에서 어음교환소를 운영하고, 현금을 맡은 대신 어음을 발행하여 유통시켰고, 이러한 어음교환과 매매에 종사하는 사람이 수백 명에 달했으며, 전국 각지에서 당오전과 상평통보의 호나전은 물론 외국 화폐와의 교환도 큰 불편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신용거래가 얼마나 보편화되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앞서 바츨라프의 언급처럼 19세기 말 조선에는 근대적은 금융기관인 은행은 없었지만, 이를 충분히 대체할 수 있는 메카니즘은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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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으로 생각해보면 은행이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그과 같은 역할을 하는 시스템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은행의 필요성을 못 느꼈을 수도 있겠네요.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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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갱 17-07-30 22:44
   
지폐의 시초라 할만한 어음이 송나라에서 생겼고
주 거래 대상국이 고려였죠.

하지만 조선은 당시 국제통화라 볼수있는 은이 통용되지도 않았습니다.

파운데이션은 존재했지만 사농공상이라는 유교논리때문에 자본주의는 발전하지 않았다고 봐야됩니다.
     
솔루나 17-07-30 22:58
   
논문에 뻔히 발전했다고 나와있는데 발전하지 못했다고 하는건 ㅋㅋㅋㅋㅋ

그리고 전국적으로 장려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국지적으로 장려했구요.

개성의 상업 장려에 관한 논문도 있는데 ㅎㅎ
     
굿잡스 17-07-30 23:15
   
근세 조선이 비록 서구의 기계동력 기술과 무기의 교류가 늦어진 부분은 크지만

사회 전반적 문화상은 이미 다방면에서 선진적이였군요.


고려 '사개송도치부법' 서양보다 무려 2세기 앞선 근현대적 복식부기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94185&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C%A1%B0%EC%84%A0+%EB%B3%B5%EC%8B%9D%EB%B6%80%EA%B8%B0&sop=and
 

조선시대 회계문화.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lord2345&logNo=220490650000
전쟁망치 17-07-30 22:45
   
음 이미 신용으로 돈을 빌리고 갚은 것에 대한 개념은 잡혀 있었다란 이야기 군요.
저는 조선의 안타까운게  농사만 짓지 말고

상업으로 돈맛을 알았으면 어땠을가 합니다.

저의 개인적인 생각인데 조선은 스파르타가 같음

스파르타  =  농사만 짓고 육군훈련에 몰빵
조선 = 농사만 짓고 글읽는데 몰빵

고려의 특징을 너무 배척 하지 말고 좀 어느정도 융통성 있게 받아 드려서 계승 하였으면 어땠을까 궁금하네요

확실히 고려때는 무역을 많이 한거 같은제 자체적으로도
     
솔루나 17-07-30 23:00
   
고려가 말기에 너무 막장트리여서

그 반작용으로 어쩔수 없는 면이 있네요.

그래도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상업은 발달했네요.
     
메론TV 17-07-30 23:00
   
산이 많기도 하고 유목민들의 침략이 잦다보니까 도로망같은거 깔지 않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상업이 상대적으로 덜 발달한듯

해상교역쪽으로는 활발했지만..
굿잡스 17-07-30 23:28
   
참고로 중세 고려는 4경 즉  60여만의 거대 개경(개성)을 수도로 서경(평양)을 동급으로

남경(조선시대 한양. 지금 서울) 및 동경(신라 100만의 서라벌)을 전쟁없이 흡수하면서

유럽 최대도시라는 로마 이상급이나 대등한 대도시들 및 중소 도시를 거닌 나라였고

이후 조선은 이런 고려 개성의 정치적 입김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존 고려시대 남경인 서울로

옮기게 되는데 그래도 여전히 조선시대 개경은 중요한 대도시로 무엇보다 상업 대도시(개성 외

평양, 의주등도)로 유지됩니다.(물론 조선의 수도인 햔양 역시 정치적 수도이자 대도시 중

하나로 상업도 활발)

이는 기존 고려시대의 발달된 도시 인프라뿐 아니라 명과의 사신 왕래에서 사신들의 제반 경비를 충당

하는 역할 및 고려의 기존 호족들이 조선시대로 오면서 정치적 투사에서 제한을 받자 이후 학식있는

똑똑한 사대부들도 상계에 뛰어들면서 지금과 다를게 없는 이런 근현대적 완벽한 자본주의 방식에 의거한

세계적으로 발전한 현대형 복식부기를 이미 만들어 사용했고 조선 시대 이런 개경등은 대부분의 세금이 이런

상인들의 활동에서 충당될 정도로 상업대도시였군요. 이런 조선시대 모습을 모른채 마냥 조선을 상업

등한시 어쩌고는 오늘날 학계에 연구가 발전하면서 점차 변화되는 추세이기도 합니다.(조선의 초기에

농업을 강조한 것은 고려 말기 대규모 홍건적의 침입과 원명 교체기에 따라 다국적 대규모 왜구들이

침범하면서 국토가 피폐해진 가운데 인구 증대와 실질적 먹거리등 삶의 안정이 중요해진 현실적

시대상황 때문이였지 마냥 상업을 등한시 한 것은 아니군요)

무엇보다 이후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대동법의 시행에 따라 상업은 조선 후기에 더욱 규모화, 발전함으로

이미 사농공상의 신분 질서 마저도 형식화 와해되는게 조선 후기의 사회상.

그에 반해 도리어 왜국은 중앙집권화 자체를 제대로 해본적이 없다가 지배계급인 무사 자체도 칼질만

하다보니 까막눈들이 많았고 그래서 에도시대에 조선통신사를 통해 에도 막부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이런 내치를 위한 조선의 선진 관료를 도입하기 위해 막대한 예산을 붓게 된 것이고

도리어 이때문에 에도시대에 가면 왜의 신분제는 더욱 고착화 되는 현상이 나옵니다. (조선이 신분제가

점차 와해 되는 양상과는 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