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후반 개성을 중심으로 시작된 환거래는 19세기 이후 점차 일반화되어갔다. 1895년 '일본공사관기록'에 의하면, 함격북도 경성, 명천, 길주지역에서는 일본은화, 러시아 은화, 조선 동전이 유통되고 있었지만,
조선상인들의 거래는 어음을 통해 대부분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지역에 진출한 초기 일본상인들은 이와 같은 환어음거래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낳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조
선상인들의 신용거래에 적응한 일본상인들도 점차 어음을 사용하게 되어 4천원에서 5천원정도의 거래는 어음으로 결제한다고 애기하고 있다. 일본상인들의 어음거래 규모는 일본, 러시아 은화 유통규모의 5% 이상이었다. 일본상인들의 일상적 거래에 어려움을 초래할 정도로 조선 상인들의 거래에서는 신용거래가 일반적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어음 유통은 19세기 이후 확대되어갔지만, 개항이후에 훨씬 더 보편적으로 유통된 것으로 보인다. 그 쓰임도 상거래에 국한되지 않고 임금지불, 여행경비지불, 벌금납부, 조세납부 등 매우 다양한 분야에서 유통되고 있었다.
조선후기~한말 신용거래의 발달 (고동환) 논문
뿐만 아니라, 광무제(고종)도 어음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본 논문의 맺음말을 인용하면.....
근대적 화폐, 은행제도, 장기채와 공채 등 금융과 보험과 같은 신용을 기초로 전개된 상업거래는 물질생활과 시장경제,, 자본주의라는 층위에서 제일 상층을 차지하는 자본주의의 핵심요소이다. 이러한 신용에 토대를 둔 거래가 어느 정도 활성화되었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118세기 이후 상업 발달의 질적 지표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기준이다.
(중략)
19세기말 20세기 초 육의전 역인청에서 어음교환소를 운영하고, 현금을 맡은 대신 어음을 발행하여 유통시켰고, 이러한 어음교환과 매매에 종사하는 사람이 수백 명에 달했으며, 전국 각지에서 당오전과 상평통보의 호나전은 물론 외국 화폐와의 교환도 큰 불편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신용거래가 얼마나 보편화되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앞서 바츨라프의 언급처럼 19세기 말 조선에는 근대적은 금융기관인 은행은 없었지만, 이를 충분히 대체할 수 있는 메카니즘은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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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으로 생각해보면 은행이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그과 같은 역할을 하는 시스템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은행의 필요성을 못 느꼈을 수도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