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의 긴 전란 끝에 살아남은 고구려인 대다수는 그냥 그 자리에 남아 발해인이 됐다고 봐야 합니다. 신라로 귀부한 고구려인 인구는 기록상으로 보면 그다지 많지 않아요. 후에 태봉이 세워지고 고려가 세워지지만 어디까지나 지배층이 고구려계인 것이지 그 밑의 백성들 모두 고구려계라고 보긴 힘듭니다. 물론 고구려 정체성을 강하게 지닌 고구려계 신라인들이 분명히 모여 살았으니 후에 고려도 세워질 수 있었던 거고요.
꼭 신라인이라고 해서 신라를 위해 목숨 바쳐 살라는 법은 없습니다. 견훤은 전라남도 쪽에서 해적들을 소탕하고 크게 입지가 올라가 있던 상황이고 당시 신라는 나라가 개판이던 상황입니다. 지방에서 경주로 세금이 안 올라올 정도로요. 신라가 낮은 단계 두품 백성들을 일일이 챙겨주던 나라도 아니고요.
견훤 입장에선 신라인으로서 대우받으며 살던 것도 아니고 충분히 반란을 도모할 법했습니다. 실제로도 아주 성공적으로 그게 먹혔고요. 백제계 신라인들을 모아 놓고 의자왕의 복수를 하자고 천명하니 천하의 백성들이 호응했다고 하죠.
궁예가 신라를 '멸도'라고 부르며 극히 혐오했는데 견훤이 궁예만큼 신라를 증오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신라에 대해 좋은 감정이 있진 않았습니다. 경주로 전광석화처럼 기병들을 이끌고 가서 왕을 죽이고 사람들 보는 앞에서 왕비를 겁탈할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신라는 당시 한반도에서 가장 역사가 길고 정통성이 쩌는 국가였기에 견훤도 함부로 멸망시키진 않고 후백제의 왕이긴 했지만 공공연히 왕을 칭하지는 못하고 신라 왕의 아래 단계 관직명을 자칭했습니다. 신라가 싫어도 신라의 정통성을 무시할 순 없었거든요.
후백제는 신라를 적대적으로만 대하다가 결국 신라라는 세력 자체가 고려로 귀부하게 만들었고 육지에서는 고려보다 잘 싸우던 후백제가 고창 전투에서 완패하고 완전히 기울어버린 데다가 견훤 아들이 쿠데타까지 일으키니 후백제는 결국 멸망.. 왕건은 정치를 알았고, 견훤은 몰랐던 결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