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강지변(靖康之變) : 1127년 송나라의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이 금나라 포로가 되어 북방으로 끌려간 사건
- 1114년 : 팔리성 전투 (출하점 出河店 전투) 아골타가 이끄는 1만 여진족이 10만 요나라 군대를 격파
- 1115년 : 아골타, 金 건국
- 1125년 : 요나라 멸망
- 1127년 : 송나라 수도 개봉(開封) 함락, 송나라 멸망. 휘종, 흠종 포로가 되어 북방으로 끌려감.
금나라가 북방의 패자로 군림하며 100여년간 대륙을 지배
송막기문
女眞酋長乃新羅人號完顔氏 혹은 송막기문 판본에 따라 女眞之主乃新羅人號完顔氏
여진 추장은 신라인이며 완안씨다
송막기문의 저자는 송나라 사람 홍호. 홍호는 포로가된 송나라 황제의 석방교섭을 위해 1129년 금나라에 파견된 인물.
그는 결국 금나라에 잡혀 억류생활을 하는데 그때 경험담과 견문기를 책으로 정리한 것이 송막기문.
여기 나오는 이야기가 100% 정확한 것은 아니겠지만 금나라 영토 내에서 10년 가까이 억류 생활을 했던 사람이 지은 책이라는 점에서 여진-거란-발해 관련 연구에서는 제법 신뢰성이 높고 비중있게 취급되는 자료.
발해 멸망 후, 발해유민들은 후발해와 정안국을 세워 나름대로 발해를 계승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통치력이 약하여 변방의 후발해 주민들은 반독립적인 상태에서 고려 등과 교섭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해 가고 있었다. 이들이 고려에 자주 왕래, 투화하는 여진인들이었다. 물론 정안국인이나 후발해인들이 부분적으로 여진으로 불리어졌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후발해가 약화되면서 이들은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형성하여 거란을 이용하여 후발해의 올야정권을 물리치고 금나라를 세울 수 있었다.
다수의 여진이 발해유민이었다는 사실은 그들이 금나라를 세우기 직적 후발해 정권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여진발해본동일가’라고 하였다든지, 완안 여진의 시조인 함보가 고려(고구려)인이었다는 사실에서 일정하게 입증되고 있다. 아울러 고려에 왕래하였던 다수의 여진이 발해유민이었다는 사실은 금나라 건국전 고려에 왕래하였던 다수의 여진을 통해서도 알 수 있었다. 많은 여진의 이름들이 발해인과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또한 고려에 왕래하였던 금나라 사신들에 있어서도, 다수의 사신들이 고씨 등과 같이 같은 성씨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금나라 조정에서 상당한 활약을 하고 있었다.
금나라와 발해가 일정한 역사적 계승관계가 있었다는 사실은, 금나라에서 발해 부흥운동이 없었다는 점에서도 생각되었다. 비록, 발해가 멸망한 지, 200년 이상이 지났고, 후발해가 멸망한 직후였으나, 이들에 의한 부흥운동이 없었던 것은 모두가 발해와 여진이 ‘본동일가’였다는 역사적 사실에 그 원인이 있었다고 보았다.
19세기 말, 만주족 팔기군 병사가 한족 성주(시장)을 구타한 사건이 있었지만, 팔기군 병사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을 정도로 청나라 내내 만주족들은 정복자이자 지배자라는 신분적 특권을 누리고 살았다.
서구 열강과 일본의 공세에 몰려 위험한 상황에서도 청나라의 지배층들은 "나라를 외국에게 넘겨줄 지언정, 집안의 종(한족)에게는 절대로 줄 수 없다."라고 단언했을만치, 청나라는 엄연한 정복 왕조였다.
1850년대, 한족들로 구성된 태평천국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남경을 지키던 만주 팔기군 병사들이 태평천국군에게 모조리 살육당하자, 분노한 청나라 조정은 태평천국에 가담한 반란군 병사들이 항복해와도 절대로 항복을 받아주지 말고 전부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 바람에 태평천국의 난은 16년이나 오랫동안 계속되고 말았을 정도로 만주족과 한족 사이의 민족적 갈등은 심각했다.
게 말하며 ‘만주’라는 아이덴티티를 확립했다. 저자는 베이징 자금성에 있는 제1역사당안관에서 잠자고 있던 만주문 사료를 통해 ‘만주족 한화(漢化)론’을 조목조목 해체한다. 만주족 한화론이란 무엇인가? '신중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쑨원(孫文)은 일찍이 중국의 통치자인 만주족이 외래 민족이었기 때문에 중국이 구미의 침략에 저항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인들을 봉기에 동원해 만주족을 무너뜨리고 한족 국가를 세우고자 했다. “중국 인민은 공통의 피, 공통의 언어, 공통의 종교, 공통의 관습을 가진 한(漢), 즉 중화민족-단일하고 순수한 종족이다”라고 주장했다. 중국을 침공했거나 중국으로 이주해온 여러 민족들은 수백년에 걸쳐 한인 인구 속에 융합됐다는 논리였다. 이것이 쑨원의 ‘한화론’이다. 이것이 과연 역사적 팩트일까? 로스키는 ‘뿌(不, NO)’라고 말한다.
“모든 사회에서 치자(治者)의 시각은 피치자(被治者)의 시각과 크게 다르기 마련이다.” 게다가 국민국가가 등장하기 이전의 왕조국가에서 나라의 주인은 백성이 아니라 임금이었다. 따라서 한 왕조의 역사적 실체를 이해하려면 그 왕조의 주인이 누구였느냐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저자는 대중에게 공개할 의도가 없었던 만주어로 작성된 황실 내부의 당안 자료를 통해 ‘내부자의 시각’으로 청 황실을 해부한다. 논거는 다양하다. 우선 다중수도체제. 한인 신민의 천자가 머무는 중국 본토의 베이징, 만주인-몽골인의 칸의 거처인 만주의 성징(盛京, 지금의 선양), 티베트 불교인 라마교 신도들이 숭배하는 문수보살이 강림한 내몽골의 청더(承德)까지 총 세 개의 수도를 운용했다. 1762년 건륭제가 일 년 중 자금성에서 머문 시간은 1/3에 불과했다.
다음은 언어. 홍타이지는 앞에서 인용한 말과 같이 부족 아이덴티티 위에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만들기 위해 만주문자를 창제한다. 건륭제는 이에 덧붙여 사신들을 만나기 위해 스스로 몽골어와 티베트어, 위구르어 까지 익힐 정도로 코스모폴리탄형 군주였다. 특히 청이 러시아와 맺은 네르친스크 조약은 한자로 씌여진 문건을 남기지 않았다. 만주어와 러시아어만으로 기록을 남겼다. 러시아와의 외교는 한인들이 관여할 사항이 아니었다. 따라서 한자 사료만 보아서는 청나라 치자의 속내를 읽을 수 없다.
또 다른 에피소드. 어느날 건륭제는 너무 많은 한어가 만주어 상주문에 스며들었다고 불평했다. 대학사 나친을 우두머리로 태스크 포스팀을 만들었다. 낡은 한자 차용어를 대체할 새로운 만주어 단어의 목록을 만들었다. 이로써 한어에서 파생된 단어들이 만주어에서 대거 사라졌다. 대신 1,700개가 넘는 새로운 만주어 단어가 생겼다. 이를 통해볼 때 한국이 서울의 표기로 한청(漢城)을 버리고 서우얼(首爾)을 택한 것은 나쁘지 않은 시도다. 한족의 중국을 이웃한 민족의 현명한 ‘생존 노하우’인 셈이다. 자주 해볼 일이다. 한글이 영향을 끼친 한자어를 국어학자 이기문박사가 연구해 모시(毛施)와 삼(蔘) 정도를 찾아냈지만 그 조차 근거는 불분명하다.
저자는 이 밖에도 청 황실의 의복, 음식, 혼인제도, 기우제 등을 통해 한인왕조와 달리 청만의 독특한 제국통치술을 세세하게 논증한다. 한족의 왕조였던 송(宋), 명(明) 등의 왕조에서 빈번했던 황실의 반란, 외척의 발호 등을 어떻게 예방했으며, 광대한 이민족의 땅을 어떻게 아울렀던가에 대한 해법이 나온다.
이렇게 보면 청 황제들에게 유교는 제국의 일부분을 이루는 한족을 위한 이데올로기에 불과했다.청 제국은 몽골과 위구르, 티베트 등을 아우르는 이데올로기와 방법론을 갖췄다. 천자이면서도 칸이며 문수보살의 화신이었던 황제는 만주족이었기에 전체 제국의 통치가 가능했던 것이다. 시점을 현재로 옮겨 과거 청 제국의 영토를 물려받은 지금의 중국 공산당의 현실을 살펴보자. 그들은 효용이 다한 사회주의 대신 애국주의로 내부를 결속하고 ‘한족의 이데올로기’인 유교사상을 설파한다. ‘공자학원’이란 간판을 걸어 전세계에 중국어를 ‘선교’중이다. 얼마나 세계인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까? 청황실보다 발전된 전략이라고 자신할 수 있을까?
본서에 나오는 내용은 아니지만 넓혀보면 한화(漢化)의 허상은 조공(朝貢)에서도 똑같이 적용되지 않을까. 조공제도의 본질은 ‘실용적인 위계질서’였을 뿐이다. 종속의 관계가 아니었다. 즉, 중원의 황제 입장에서 보면 서쪽, 북쪽의 유목민들은 마냥 무력을 동원해 토벌할 수 없었다. 과거 중원왕조와 유목민족의 관계는 재물과 평화의 교환이 최선의 방책이었다. 심하게 말하면 비겁을 평화라 부른 셈이다. 중국 왕조는 대신 조공이란 이름으로 이를 보기 좋게 포장했다. 몐즈(面子, 체면)만 건지는 식이다. ‘아큐식 정신의 승리’의 과거 버전이었다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몽골족인 원나라가 한족인 송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실질적으로 통치할 때, 한족의 반란이 두려워 가한 제재 중 하나이다.
그 당시 원나라가 가한 제재로는 여러 사람이 모이는 것을 금지하거나, 야간통금시간을 지정하기도 하고, 신분제를 만들어 한족을 노예 등급으로 강등시키는 것 등이 있었다. 또 다른 제재가 바로 초야권이다.
10가구의 한인(漢人) 당 1명의 몽골 병사의 시중을 들어야 했는데, 여기서 새로 결혼하는 한족 여성의 초야권은 시중드는 몽골 병사의 몫이 되었다. 실질적으로 한족의 신분이 노예와 다름없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처사였다.
<짱개를 노예로 부린 원나라 몽골족과 고려의 특수관계>
“짐이 보건데 지금 천하에서 자기의 백성과 사직을 가지고 왕위를 누리는 나라는 오직 삼한(三韓)뿐이다. 선왕 때부터 생각하면 거의 100년 가까운 기간에 부자가 계속 우리와 친선관계를 맺고 또 서로 장인과 사위관계가 되었다. 이미 공훈을 세웠고 또한 친척이 되었으니 응당 부귀를 누려야 할 것이다.”
-원 황제 무종(武宗)이 지대 3년(1310) 고려에 보낸 제서(制書) 중
『원사(元史)』 에는 세조(世祖) 쿠빌라이칸이 서거한 뒤 그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서 오직 몽골인과 고려인만이 출입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이 기록은 그대로 『고려사』에도 나타난다. 또 원나라 성종 테무르 황제(成宗, Temü)가 “고려와 몽골의 관계가 왜 이토록 특수한가”라는 것을 주변 신하들에게 반문한 적도 있다. 요수(姚燧)는 그의 문집(『목암문집(牧庵文集)』)에서 “몽골과 고려의 관계와 같은 특수한 밀착관계는 만고에 유래가 없다.”고 적었다.
고려사』의 기록을 보면, 고려왕은 세계 제국인 원나라 전체 종친(宗親) 서열의 4위에서 7위에 해당하는 강력한 세력이었다.117) 특히 충선왕(忠宣王, 1308~1313)은 세계 권력의 2인자로 군림하였다.118) 충선왕은 원 무종(武宗)의 옹립으로 일등 공신이 되었으며 심양왕(瀋陽王)으로 봉해졌다(1308년 5월). 무종이 충선왕에게 “아아! 그대, 추충규의협모좌운공신(推忠揆義恊謀佐運功臣)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 좌승상(左丞相) 부마(駙馬) 왕장(王璋 : 충선왕)은 세조(쿠빌라이칸)의 외손자요, 전대부터 귀한 사위(貴壻)로서, 짐이 선조의 사직을 계승하는 위업[纘承]에 처음부터 참여하여 짐을 크게 도와주었도다[參翊贊之功]. … 가히 개부의동삼사 태자태부(太子太傅) 상주국(上柱國) 부마도위(駙馬都尉)를 특별히 수여하고 심양왕을 진봉할 것이다.”라고 하였고 “또 중서성(中書省)에 들어가 정사에 참의하게 하고 김호부 옥대 칠보대 벽전금대 및 황금 500량 은 5000량을 하사하였으며, 황후나 황태자도 또한 충선왕을 극진히 대접하도록 하게 하여 보물과 비단 등 귀한 하사품들은 이루다 헤아리지 못 할 정도였다.”고 한다.119)
여기에서 유심히 살펴보아야 하는 부분은 충선왕이 도대체 무슨 지위를 받았는가 하는 점이다. 먼저, 충선왕이 심양왕과 고려왕(이 즈음 충렬왕이 사거함)이 다시 됨으로써 한반도와 요동을 장악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중서성(中書省)에서 원나라의 각종 국사에 참의하게 함으로써 원나라 조정의 실세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나아가 충선왕이 태자태부(太子太傅)가 되었다는 것은 황태자의 스승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주목할 부분은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이다. 개부의동삼사는 황제 다음 가는 지위이기 때문에 충선왕이 세계 권력의 제 2인자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문물과 예악이 흥행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며 장삿배가 연이어 내왕하여서 값진 보배가 날마다 들어오니, 중국과 교통하여도 실제로 소득이 없을 것입니다. 거란과 영구히 절교하지 않을 터이면 송 나라와 교통함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니 따랐다.
<고려사절요 문종 12년>
근자에 사신이 그곳에 가서 물어보고 알았지마는, 임천각(臨川閣)에는 장서가 수만 권에 이르고, 또 청연각(淸燕閣)이 있는데 역시 경(經)ㆍ사(史)ㆍ자(子)ㆍ집(集) 4부의 책으로 채워져 있다 한다.국자감(國子監)을 세우고 유관(儒官)을 선택한 인원이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었으며, 횡사(黌舍 학교를 말함)를 새로 열어 태학(太學)의 월서계고(月書季考)하는 제도를 퍽 잘 지켜서 제생(諸生)의 등급을 매긴다. 위로는 조정의 관리들이 위의가 우아하고 문채가 넉넉하며, 아래로는 민간 마을에 경관(經館)과 서사(書社)가 두셋씩 늘어서 있다. 그리하여 그 백성들의 자제로 결혼하지 않은 자들이 무리지어 살면서 스승으로부터 경서를 배우고, 좀 장성하여서는 벗을 택해 각각 그 부류에 따라 절간에서 강습하고, 아래로 군졸과 어린아이들에 이르기까지도 향선생(鄕先生 자기 고장의 글 가르치는 선생)에게 글을 배운다. 아아, 훌륭하기도 하구나!
-송나라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1123년의 내용)-
왜국은 일본국이다.
본래 이름인 왜를 부끄러워 했는데, 극동에 있어서 스스로 일본이라 부른다.
지금 고려에 신하로서 속하고 있다.
-도화견문지(1080년경에 송나라의 곽약허가 지은 책)
“옛 사서(역사책)에 따르면 고려의 풍속은 사람들이 모두 깨끗 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