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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4-12 19:57
신라부흥운동은 과연 없었을까?
 글쓴이 : 벨카
조회 : 450  


2. 역사[편집]

신라와 같은 삼국,남북국시대에 병존했던 고구려/백제/발해부흥운동 등과는 반대로 거의 교육되지 않는다. 신라의 멸망 과정이 외침(당나라, 거란)에 의해 멸망한 고구려/백제/발해와 반대로 평화적인 투항으로 막을 내린 게 이유며, 그만큼 신라는 부흥운동이 없었다고 생각하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그러나, 신라 투항 이후에 고려가 삼한일통의 대업을 완성한 건 사실이지만 고려신라를 그대로 계승한 나라는 아니었다. 또한, 그 전에도 신라는 고려를 정식 국가로 인정하고 사신을 교환하고 있었기에 신라의 모든 구성원이 이런 통합에 찬성할 수는 없었고, 따라서 부흥운동의 불씨는 남아있었다. 만약 신라가 경순왕대에 안 망했다면 고려 초기 탐라국처럼 고려의 부용국이 되었을지도[1]

2.1. 고려 초기[편집]

935년에 후삼국시대의 패권이 고려 쪽으로 흘러가자, 신라는 경순왕이 고려에 나라를 바치면서 멸망했다. 당시 신라 조정 내에서는 마의태자 등 신라의 고려 병합을 반대하는 세력들도 있었으나 이미 국운이 다한 상황에서 이들의 주장은 힘을 얻지 못했다. 신라가 고려에 귀부한 이후에도 1000년 간 국체를 존속한 신라를 하루아침에 없앤 데에 대한 이런저런 반발이 있었고 옛 신라 지역이었던 경상도 지역에선 고려에 대항하는 일부 계층들의 반란들도 있었지만, 신라의 국가적 역량은 견훤의 서라벌 함락 후에 사실상 회복이 불가능하게 망가져 있었다. 게다가 왕건은 이미 이런 일을 아주 일찍부터 예상하고 강원도와 경상도 북부 요소요소에 정예 부대를 배치했었고, 때문에 소소한 소요 사태에 그치고 만다.

그러나 신라 진골들 중 다수는 일찍부터 고려에 투항한 6두품들에게 망한 나라 신하 취급을 당해야 했고, 누구나 김부식 형제처럼 과거로 출세해서 중앙 정계에 진출할 수 있었던 건 아니었기에 상당수는 지방 향리로 떨어져 기득권이 이전보다 확실히 못한 상태로 떨어진다. 때문에 적어도 옛 서라벌 일대의 이런 부류들은 고려 정부에 대한 충성심이 다른 부류들보다 떨어질 수밖엔 없었다.

2.2. 동경의 반란(동경민란)[편집]

1170년에 무신정변이 일어나면서 고려의 정상적인 국가 운영은 일단 멈추게 된다. 이러한 전국의 혼란한 상황을 틈타 고려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특히 과거 신라 영토였던 경상도 일대에서도 반란들이 터지는데 1190년에 경상도 동경에서 신라부흥을 기치로 내건 백성들의 반란이 시작되면서 고려에 대항하는 신라부흥운동이 전개되었다. 6, 7차에 걸쳐서 반란이 진행되었으며 반란 지도자였던 이비와 패좌가 주도하는 무리가 가장 막강하였다.

이에 당시 무신정권의 집권자인 최충헌은 대장군직문하 김척후를 초토처치병마중도사로, 대장군 최광의를 좌도사로, 섭대장군 강순의를 우도사로 삼아 신라부흥운동 반란군 세력을 치게 하였다.

이에 반란군 세력들은 운문·울진·초전의 무리를 모아 3군을 편성, 스스로 정국병마(正國兵馬)라 칭하고, 관군을 위협하면서 해를 넘겨가며 대항하였다. 그러나 김척후 대신에 새로 임명된 중도사 정언진이 지휘하는 관군에 의해 기양현(基陽縣: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에서 패하면서 기세가 꺾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성황에서 기도 중이던 이비가 정언진의 꾀에 속아 체포되었고, 운문산으로 피신해 기회를 노리던 패좌 또한 대정, 함연수, 강숙청 등에게 잡혀 죽음으로서 신라부흥운동은 사실상 좌절되다시피했다.

이 난의 실패를 계기로 이전에 고려 3경 중 하나로 꼽혔던 신라의 옛 수도 동경(東京)의 이름이 지금까지 쓰이고 있는 경주로 격하되며, 주변 군현에 상당히 많은 영역을 빼앗기게 되면서 규모도 대폭 축소된다. 그리고 동경의 자리는 대신 남경(지금의 서울특별시)이 들어가게 된다.

2.3. 김사미 · 효심의 난[편집]

당시 무신정권의 수장이자 십팔자위왕 소문에 의거해 왕좌를 노리고 있었던 이의민과 내통하여 일어난 반란.

3. 평가[편집]

대체적으로 고려시대에 있었던 신라 부흥을 명분으로 내건 신라부흥운동은 고구려/백제/발해의 부흥 운동들과 반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고구려/백제/발해의 부흥 운동들은 이전 국가의 지배 계층이 일으켰고, 멸망한지 오랜 시간이 지나지도 않았기에 역사를 잘 모르는 대중의 입장에서 봐도 부흥 운동임이 명백해 보인다. 그렇지만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지 오랜 시간이 지나갔던 대조영발해 건국도 고구려 부흥운동의 일부로 인정받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이 주장은 어느 정도 논란의 여지가 있어보인다.나라 건국이 하루아침에 된줄아냐?[2]

이유가 어떻든 신라의 부흥운동은 신라 자체가 어쨌든 평화적인 교섭을 통해 고려에 흡수되었고, 또 해당 부흥운동은 신라의 원영역 내의 주민에게 어느 정도 광범위하고 일관된 지지를 받지 못한 측면에선 고려나 후백제로 상징되는 나말~후삼국 시기의 고구려, 백제 부흥운동, 요나라 시기의 발해부흥운동보다도 쳐지는 측면이 명확하기에, 금방 생생하게 감이 오진 않는다. 당장 보면 신라부흥운동이 일어나자, 경상북도 내에서 이 부흥군에게 반대하는 자발적인 근왕군들도 조직되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고려 체제에서 신라뿐 아니라 백제와 고구려조차도 그 부흥을 명분으로 내건 반란이 일어났고 그 기치 아래 고구려와 백제, 신라에 속해 있었던 지역 주민들이 이들의 반란에 공감대를 얻었기에, 부흥 운동으로 보기에 결코 손색이 없다. 망한 나라의 복국 운동은 꼭 해당 망한 나라의 왕족이 참여해야 하고, 망한지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야 하며, 민란이나 지방반란의 요소가 없어야 한다는 일각의 인식은 아예 전제부터가 대단히 잘못되어 있다. 해당 조건들을 다 지키고 성공하는 복국-독립 운동은 성공 사례가 거의 없으며, 애초에 망한 나라를 접수하는 국가부터도 이런 조건들이 불가능하게 철저히 관리한다.[3] 당장 후삼국시대의 후고구려와 후백제 역시 제 국가들이 망한지 벌써 230년이 넘은 고구려, 백제의 부흥을 기치로 내걸고 지역 호족과 민중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아 수립에 성공한 케이스들이다. 특히 후고구려의 경우는 바로 북쪽에 고구려 계승국을 자처하는 발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는 고려가 후삼국이 통일된 이후, 고려인이라는 단일민족의식이 자리 잡은 뒤에도 한반도 각 지방에 옛 삼국 유민 의식이 아직도 남아있었다는 반증이다. 실제로 이비-패좌의 난, 김사미-효심의 난과 같은 고려시대 신라 부흥을 명분으로 앞세운 경상도 일대의 반란들이 고려 정부군에 의해 토벌된 뒤에도 꾸준히 옛 경상도 지역에서 신라 부흥을 앞세운 반란들이 끓임없이 일어날 정도였다. 하지만 고려가 몽골의 침략을 받고 몽골과 싸우면서 단일민족 의식이 확고화되면서 신라를 비롯한 고구려, 백제 등의 옛 삼국 유민 의식은 희석되었고 결국 사실상, 고려 내부에서 신라부흥운동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


고구려,백제,발해만큼은 아니어도 존재했다는게 함정..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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