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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9-15 19:50
일본이 고대 중국이랑 직접 교류를 할 수 있었나?
 글쓴이 : 햄돌
조회 : 1,009  

다 한반도 거쳐간거 아님?

무슨 중국이랑 직접 교류해서 문화 받았다고

하는데 웃김

항해술도 읎었을텐데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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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장이 16-09-15 19:52
   
한반도에서 일본 갈때도 목숨 걸고 갔었는데...중국을 다이랙트로 갔었다?
아주 일부는 갔을 수도 있었겠지만 정기적인 교류는 불가능 했죠...
     
햄돌 16-09-15 19:54
   
한반도에서 열도 갈때도 목숨걸고 갔나요?

그렇군요
          
대장장이 16-09-15 19:59
   
그 당시에는 배타고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한다는 것 자체가 목숨걸고 하는 것이었죠..
바다위에서 언제 풍랑이 일어 배가 침몰할지 몰랐으니까요..
지금처럼 배타고 몇시간이면 가는 것이 아니라 몇일이 걸렸으니까요....
전쟁망치 16-09-15 19:55
   
일단 인간 같지도 않은 아무런 법식이나 격식도 없는 원숭이와 어떻게 교류할 생각을 할까요?

저때 대륙은 대륙 자체만으로도 이미 여러 왕국과 제후국들로 나뉘어 있고 서쪽으로 인도와의 교류로 바빴을텐데.
아무런 이득도 안되는 원숭이들과 교류하고 싶겠나요?

우리조상님들이 너무 착했음... 아무런 이득도 안되는 원숭이와 교류를 해가지교
왜인들은 걸핏하면 주는 조공 선물이 열도 토종 원숭이라 잖음...
     
햄돌 16-09-15 19:56
   
그냥 열도에 터잡고 살면서 문화가 흘러들어갔죠
aghl 16-09-15 19:57
   
어쩄든 제가 보기에는 백제 멸망후 한반도와 인연이 끊어졌고,  견당사를 직접 당에 파견했던 걸로알고 있습니다(호사카 유지 왈)
     
굿잡스 16-09-15 20:11
   
남북국시대로 가면 남국의 패자가 된 신라가 열도에 대한 정치적 입김과 문화는 더욱

강해지게 됩니다.

실제 이건 왜국의 견당사에 비해 신라 왜, 발해 왜간의 교류횟수가 더 압도적인데에서 확인

가능하군요.

왜국의 견수,견당사에 대한 횟수는 몇가지 의견이 있긴 한데 대체로 20여회 미만으로

6세기에서 9세기 사이 신라 왜간에는 합친 방문이 120회에 이르고 발해 왜간에도 46회에

이를 정도로 압도적이죠. 그기에 신라의 융성기에는 왜는 당에 직접적 방문은 아예 없는.
빼에엑 16-09-15 20:00
   
중국에서 어디 지역에서 배를 뛰우면 해류때문에 자동으로 일본에 도착한다는 소리는 들어봤어도
직접적인 서로 교류는 없는걸로 아는데...
그래서 중국 4대 미인 한 명이 일본에서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다큐멘터리는 본적은 있네요.
근데, 이름이 기억이 안나네... 그 이름과 비슷한 여자가 일본 사당에 모셔져있던데...시기도 비슷했고..
     
대장장이 16-09-15 20:11
   
그게 달기라고 합니다...
구미호 전설중에 하난데...중국의 전설인 봉신연의에 보면 달기가 구미호였고 사람으로 둔갑해서 은나라 30대 군주 주왕을 폭군이 되게 만들어서 세상을 혼란하게 만들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본은 이 봉신연의에 자신들의 설화를 붙여서 구미호 달기가 일본으로 넘어와 그 당시 일본의 왕을 홀려서 세상을 다시 어지럽혔다고 하죠....
          
빼에엑 16-09-15 20:15
   
아 그럼 4대 미인은 아니군요.
하두 오래전에 봤던거라서... 덕분에 정확히 알아갑니다.
굿잡스 16-09-15 20:14
   
남북국시대(발해-신라)

동북아 해상무역을 장악한 신국(神國)의 신라.

성덕왕(聖德王) 30년,
일본국 병선 300척이 바다를 건너 우리의 동쪽 변경을 습격하였는데, 왕이 장수를 시켜 군사를 내어 이를 크게 깨뜨렸다. (日本國兵船三百?, 越海襲我東邊, 王命將出兵, 大破之.)
 
- 제대로 상륙도 하지 못하고 박살난 일본, 결국 용서를 빌기 위해 서기 742년에 사신을 파견하지만‥

애장왕(哀莊王)
5년 여름 5월에 일본국이 사신을 보내와 황금 300량을 바쳤다. (五年夏五月, 日本國遣使, 進黃金三百兩.)

- 이를 기특하게 여긴 신라는 드디어 일본을 용서하고 속국으로서 인정한다. 서기 806년 속국에게 하교하는 신라.

애장왕(哀莊王) 7년,
봄 3월에 일본국 사신이 왔으므로 조원전(朝元殿)에 불러 접견하였다. 교서를 내려 말하였다. 『절을 새로 짓는 것을 금하되, 다만 수리하는 것은 허락한다. 또 수놓은 비단을 불교 행사에 사용하는 것과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의 사용을 금한다. 마땅히 담당 관청으로 하여금 이를 널리 알려 시행하도록 하라.』(七年春三月, 日本國使至, 引見朝元殿. 下敎禁新創佛寺, 唯許修葺. 又禁以錦繡爲佛事, 金銀爲器用, 宜令所司, 普告施行.)
 
- 사찰을 수리하는 것조차 '종주국' 신라의 허락이 없으면 감히 하지 못했던 일본. 이후 '속국' 일본에 대한 종주국 신라의 사랑은 계속되고… 신라의 어버이와 같은 사랑에 감동한 일본은 서기 882년, 보답한다.
 
헌강왕(憲康王) 8년,
여름 4월에 일본국 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 300량과 야광주[明珠] 10개를 바쳤다. (八年夏四月, 日本國王遣使, 進黃金三百兩·明珠一十箇.)


우리나라는 문물과 예악이 흥행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며 장삿배가 연이어 내왕하여서 값진 보배가 날마다 들어오니, 중국과 교통하여도 실제로 소득이 없을 것입니다. 거란과 영구히 절교하지 않을 터이면 송 나라와 교통함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니 따랐다.
 <고려사절요 문종 12년>


 

왜국은 일본국이다.
본래 이름인 왜를 부끄러워 했는데, 극동에 있어서 스스로 일본이라 부른다.
지금 고려에 신하로서 속하고 있다.
-도화견문지(1080년경에 송나라의 곽약허가 지은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