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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3-06 15:55
강동원 외증조부가 북한애국열사릉에 묻힌 이유(펌)
 글쓴이 : 두리네이터
조회 : 1,398  

http://dvdprime.com/g2/bbs/board.php?bo_table=comm&wr_id=16931057&sca=&sfl=wr_subject&stx=종&sop=and&scrap_mode=


이종만, 과연 친일해서 돈을 벌었는가에 대하여.
賣香人
29
  4689 1일 전
1. 이종만의 삶.
 
이종만은 조선 말기 (1885년) 울산 대현면 용잠리에서 7남매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고향은 가난한 반농반어의 마을이었고, 인근에 있는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에게 수탈을 당하는 마을이었습니다. 이종만은 어려서 한학을 배웠는 데 몸이 약해서 서당도 제대로 다닐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3년을 병을 앓고, 나았다가 다시 병이 재발했습니다. 그렇게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한 채 스무살이 되자, 이렇게 살다가 죽고 싶지는 않다는 욕망에 뛰쳐나옵니다. 논밭을 팔아 부산에 나와 어물상을 차렸습니다.
그런데 어물상을 차린 후에 보니까, 일본 사람들이 와서 미역을 자꾸자꾸 사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시는 러일전쟁중이었는 데, 미역이 옥도정기(요오드팅크의 일본말, 별칭 머큐롬, 빨간 소독약)의 원료로 쓰이고 있어서 일본에서 고가에 팔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종만도 미역을 엄청나게 사다가 쟁여서 한 몫 볼려고 했는 데, 러일전쟁이 바로 끝나버리면서 미역 재고를 떠안고 망합니다 (1905년).
 
망해버린 이종만은 빚을 갚기 위해 남의 고깃배에 어부로 타서 일을 합니다. 2년남짓 해서 어부 일에 익숙해지고 빚을 갚자 1907년 23세였던 이종만은 어선을 빌려 어업에 뛰어듭니다. 그러나 명태를 잡으러 갔다가 울산 앞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배가 전복되고 맙니다. 이제는 배 값마저 선주에게 물어주어야 하게 되었습니다.
 
실패가 거듭되자 다음해 (1908년)에 고향으로 돌아온 이종만은 농사를 짓기 시작합니다. 농사를 지으면서도, 피폐한 고향을 보다못한 이종만은 1912년 인근에 흩어져 있는 서당을 통합해서 대흥학교를 설립합니다 (28살).
 
돈도 없고, 신학문도 모르는 그였지만, 독학으로 신학문을 깨우쳐 고향 아이들을 가르칩니다. 하지만 한학을 아직도 믿는 동네 노인들 눈밖에 나고, 마을 사람들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게 됩니다. 1년만에 학생이 한명도 안남고 학교는 망했습니다 (1914년). 돈도 없고, 학력도 없이 학교를 열어봤자 망한다는 것을 깨달은 이종만은 나이 30살에 돈을 벌러 다시 밖으로 나갑니다.
 
당시는 세계 1차대전중이었고, 광물 값이 비쌌습니다.
강원도 양구로 가서 중석광을 시작한 이종만(1915년)은 시운을 타고 2년만에 5만원 (현재 가치 50억원)의 거금을 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918년 전쟁이 끝나자 광물 값은 폭락했고, 이종만은 광산에 투자한 기자재 값을 치르느라 벌었던 5만원을 날립니다.
 
광산업에 실패한 이종만은 금강산으로 가서 목재상을 시작하는 데, 그해에 폭우가 쏟아져 수해가 나면서, 개천물이 불어나 쌓아놓은 목재를 쓸어가버리면서 또 망합니다 (1918년).
 
실패에 지쳐버린 이종만은 고향으로 낙향합니다.
 
고향에 돌아갔던 이종만은 그래도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며 다시 서울로 무작정 상경합니다.
그는 이준열, 허언 등의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과 어울려 경성고학당을 설립하고 고학생들을 가르칩니다. 경성고학당은 무산자 교육이라고 해서 가난한 조선 아이들에게 무료/헐값에 교육을 베풀었습니다.낮에는 중등교육을 하고, 밤에는 야학을 열어 초등교육을 하였습니다. 이종만이 빵공장을 해서 돈을 대기로 하고 이준열이 학교를 맡았습니다. 이종만의 정식 직함은 고학당 운영위원 겸 협회 간사였고, 이준열이 초대 교장 겸 설립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종만의 빵공장은 경영난에 시달려 금방 문을 닫습니다.
 
이종만은 다시 또 시도를 합니다. 1920년 조선의 농촌을 개혁하겠다며 세운 조선농림회사는 일제의 방해로 문을 닫습니다. 이종만은 이후에 함경남도 영평평야 개척사업, 함경남도 북청의 개간사업도 시도하지만 모두 실패하였고, 함경남도 영흥에서 동창광산을 경영하다가 또 망하고, 1928년 함경남도 신흥에서 다시 광산을 해보다가 또 망합니다. 
 
당시 조선은 금광시대였습니다. 1923년 최창학이 평북에서 노다지 금광을 발견한 데 이어서, 1926년 방응모가 역시 평북에서 금맥을 발견하여 대부호에 오릅니다(방응모는 금광으로 돈을 벌어 1931년 조선일보를 인수합니다). 나도 한번....? 이라는 꿈을 안고 사람들이 너도나도 광산업에 뛰어들고 있었습니다.
 
거듭된 실패로 주머니에 27전밖에 안남은 이종만은 또다시 광업개발회사를 차립니다. 29번째 사업이었습니다. 돈도 별로 없이 돌아다니던 이종만은 1932년 일본인 기다시마가 내놓은 폐광의 권리를 450원 (현재 가치 4500만원)에 사들입니다. 폐광에서 금 나오기만을 꿈꾸며 착암기로 파고 또 파기를 거듭한 결과, 드디어 운이 터졌습니다. 폐광에서 노다지 금맥이 터진 것입니다 (1934년). 1936년 한해에만 40만원(현재 가치 450억원)의 금이 생산되었습니다.
 
이렇게 대박을 터트린 이종만이 그 금광을 팔아서
대동농촌사를 설립하고,
대동공업전문학교를 설립하여, 조선에도 대학급 기술인력을 양성, 배출합니다 (이 학교는 후에 김일성대학 공학부를 거쳐 김책공업대학으로 이름이 바뀝니다).
 
금광이 터진지 4년째되는 1938년 즈음해서는 대동광업주식회사, 대동광산조합, 대동농촌사, 대동출판사, 대동공업전문학교 이렇게 5개 사업체를 갖고 있었지만, 저 중에 돈이 나오는 것은 광산밖에 없고 나머지는 다 돈나가는 일들 뿐이라서, 적자를 견디다 못해 1942년 결국 차례 차례 망합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이종만은 다시 또 도전합니다(30번째). 적산기업인 삼척탄광을 불하받아 사업하던 이종만은 미군정 혼란기에 광부들 파업이 일어나고 미군정측 운영대리인을 몰아내자고 요구사항이 나오자 광부들 편을 듭니다. 미군정의 미움을 사고 얼마안가 쫓겨나지요. 1948년 분단이 되자 월북을 합니다. 노동자, 농민과 지주가 함께 사는 세상이라는 게 이종만의 꿈이었으니까요. 북한에서 혹시나 가능할까...? 하고 기대를 하고 간 것이었지요.
 
 
 
 
2. 이종만의 꿈, 그리고 민족 계몽운동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종만의 인생은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29번째 시도끝에 1934년 폐광에서 노다지가 터져서 대박이 났지만, 바로 그 돈을 대동농촌사와 학교 설립하는 데 쏟아붓다가 적자를 감당못해서 1942년 망합니다. 이종만의 황금시대는 불과 8년을 가지 못했습니다.
 
이종만의 일생은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30전 1승 29패.
그 1승의 기쁨 또한 몇년을 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끊임없이 도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끊없이 도전하며 꿈 꾼 것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이종만의 말을 빌리자면) "원시상태"의 생활을 하던 고향마을의 가난과 빈곤, 무지가 지긋지긋했었고, 그래서 신학문을 익혔고 20살에 세상으로 나왔습니다. 그는 고향에 남아서 빈곤과 무지에 시달리는 마을 사람들에게 세상의 넒음과 신지식을 알리고 싶어했습니다. 고향에 돌아가 28살에 서당들을 합쳐서 학교를 세웠던 이유도 그것이고, 마을에서 학교가 망하자, 서울로 올라와 민족운동가들을 만나 다시 또 학교(경성고학당)를 세웁니다.
이후 목재상, 농업, 광산업을 전전하며 떠돌던 이 공상가는,
천운으로 금맥이 터지자, 바로 그 돈을 헐어 다시 또 학교를 세웁니다 (대동공업전문학교- 오늘날의 김책 공업대학).
 
 
금맥이 본격적으로 터진 게 1936년입니다.
다음해인 1937년 이종만은 자신과 경성고학당을 같이 했던 사회주의자 이준열, 허헌 등과 다시 뭉쳐서 '대동' 사회를 이루겠다고 결의를 맺고 있었습니다. 돈 벌자마자 자기가 하고 싶었던 민족계몽운동, 농민운동,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불과 5년뒤인 1942년 다 망해버렸지만요.
 
이종만이 한 일들이 그럼 한낱 이상적 사회주의에 물들었던 얼치기의 일장춘몽이었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구글에서 경성고학당으로 검색해보시면,
경성고학당에서 교육받은 독립운동가들 이름도 튀어 나옵니다.
 
 
독립유공자 공훈록: 정현수 (1909-1952) - 경성고학당에서 교육받고 나와 야학 활동
 | https://www.mpva.go.kr/
 
전북 남원(南原) 사람이다. 고향에서 1928년 운봉보통학교(雲峰普通學校)를 마친 뒤 서울에서 경성고학당(京城苦學堂)을 다니던 중 고향의 일가(一家)인 정운태(鄭云台)·정운종(鄭雲宗) 등과 함께 사회주의 사상에 공명하여 1930년 8월 사회주의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농민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15세 이상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항일의식을 고취하였으며 일제 식민지 통치의 부당성과 모순을 폭로하기 위해 동년 8월경부터 야학(夜學)을 열었다. 이 때 정현수는 야학의 강사를 맡아 20여 명의 학동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독립운동가 이종률:
경성고학당 교사로 일하면서 광주학생운동 건에서 '식민지 노예교육제도 반대, 제국주의 침략에 반대하여 궐기하라'는 동맹휴업 격려문을 작성, 인쇄, 반포하여 일제에게 구속됨. 이종률은 이외에도 우리말연구회 사건을 주도하여 투옥당했고, 해방이후에는 민족일보를 창간
 
산수 이종률 선생을 아십니까
 | http://legacy.www.hani.co.kr/…
 
광주학생운동 역사자료실-경성휘문고보생에 맹휴격려문발송 및 반포사건
 | http://gsim.gen.go.kr/
 
 
무엇보다도 이종만과 도원결의를 맺고 '대동' 운동을 함께한 사람들이 네임드급 독립운동가, 민족운동가들입니다. 허헌은 일제시대에 독립운동가를 변호하고 다닌 3대 변호사 (이병로, 이인, 허헌)중 한명이었고, 독립운동가와 가난한 노동자들을 무료로 변호해주고 다녔습니다. 1927년 신간회 사건 당시에는 신간회 간부였고, 1943년에는 일제가 전쟁에 지고 있다는 미국의 소리 방송을 국내에 전파하는 '단파방송 밀청사건'으로 잡혀 투옥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가 허헌을 잘 모르는 이유는, 허헌이 사회주의 계열이어서 월북한 독립운동가이기 때문입니다.
 
 | https://ko.wikipedia.org/
 
 
경성고학당도 사회주의 계열이어서 우리나라에 잘 알려져 있지 않고,
김책공업대학교는 북한에 있으니까, 역시 우리가 받은 교육에서는 삭제되어 있습니다. 
 
 
교육사업에 공헌을 했다 한들, 일제를 찬양 고무한 죄는 지워지지 않는다고 말할 지도 모릅니다.
'대동'사업체들도 자기 사업을 한 것이지, 민족을 위해 일한 게 아니지 않느냐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종만과 함께 한강변에서 '대동' 사회를 이룩하자고 도원결의를 한 독립운동가 송강 이준열의 회고록을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1937년 초 어스름이 밀려올 때, 얼어붙은 겨울의 한강 강변에서 남호와 송강, 허헌, 이성환, 이훈구, 정현모, 민정기, 이영조, 김용암, 박창식, 문원주, 한장경 등이 도원결의를 맺었다. 서로의 팔뚝을 맞대며 대동을 향한 새 출발을 약속한 것이다. 아름다운 동행은 거기에서 시작되었다.”
 
 | http://www.hani.co.kr/
 
허헌이 대동사업체의 상임감사를 맡고, 농촌운동 지도자였던 이훈구는 대동농촌사의 기획을 맡고, 신간회 간부였던 정현모는 대동사업체의 경리를 맡았으며, 신간회 정치부 간사였던 이관구는 대동출판사의 주필을 맡았습니다.
 
아시다시피 신간회는 1927년 물산장려운동을 하던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계열의 서울청년회 등이 좌우합작으로 민족계몽운동을 하다가, 광주학생사건이 터지자 이를 전국적 항일운동으로 발전시키고자 서울에서 민중대회를 조직하다가 일제에 적발되어 구속된 곳입니다.
정현모는 안동출신 우파계열 민족운동가로서 신간회 안동지부 부회장이었습니다.
 
 | https://ko.wikipedia.org/
 
대동출판사 주필을 맡은 이관구는 1910년대 대한광복회 황해도 책임자였었으며, 1927년 신간회 중앙위원을 맡았었고, 1939년 대동출판사 주간이 되어 1941년 3월까지 재임하였습니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사전:  이관구
 | http://encykorea.aks.ac.kr/
 
독립운동가 이관구 선생을 아십니까.
 | http://www.yonhapnews.co.kr/
 
 
이렇게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민족운동을 펼치던 이종만이 무슨 일제에 아부하여 돈을 벌고 성공했단 말입니까.
 
이종만이 일제에 2천원을 기부하고 임전보국단에도 가입한 친일행위를 한 것은 사실인 데, 그것은 1930년대 후반에서 40년대 초반의 일입니다. 그 시기에도 민족운동을 저버리고 일제로 확 돌아선 변절도 아니었습니다.
 
1938년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폐교 위기에 처한 숭실전문학교를 인수하려다가 일제에 거부당한 이종만은, 일제에 황군위문금으로 천원을 기부하여 인사치레를 한 다음 대동공업전문학교를 설립합니다. 
독립운동가 이관구는 다음해인 1939년 대동출판사 주필로 옵니다. 이종만이 일제에 황군위문금을 낸 그때 변절한 거였다면, 독립운동가 이관구가 대동으로 왜 건너오겠습니까.
 
1941년 임전보국단이 만들어지자 이종만은 임전보국단에 들어가 친일행위를 하는 데, 이때는 일제가 금 생산 장려정책을 중단하고 금광사업을 조이기 시작하던 시점이었습니다. 앞서 적었다시피 대동사업체 5개는, 금광으로 번 돈으로 교육계몽운동, 농민운동, 노동운동 하던 곳이었습니다. 돈줄이 위기에 처하자, 이종만과 총괄전무 이준열, 경리담당 정현모 등은 임전보국단에 가입해 친일 활동을 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불과 2년뒤인 1943년 일제는 금광을 강제로 문닫아버리고, 대동은 망합니다. 대동농촌사는 농민들에게 모든 토지를 나눠준 후 해산하고, 대동출판사는 팔려서 대동공업전문학교 경비로 쓰입니다.

 
이게 이종만의 친일행각입니다.
 
민족사관 홈페이지 알자고: 공유경제의 바탕이 된 이종만의 대동사상
 | http://www.aljago.com/
 
 
우리가 신간회 간부였던 정현모를 독립운동가로서 잘 못 들어본 이유는, 저때 대동사업체 살리겠다고 임전보국단 들어갔기 때문일 겁니다. 송강 이준열이야 3.1 운동에도 참여하고, 상해임시정부 군자금 모집활동도 했었고, 광주학생운동에도 참여했던 네임드 독립운동가이니까, 저 건 가지고 차마 매도를 못하는 듯 하고...
 
허헌에 대해서 제가 잘 모르는 데, 1941-42년 이종만이 임전보국단 할 적에 허헌이 여전히 대동의 상임감사였다면, 이종만의 변절의혹은 좀 더 엷어지지 않을까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허헌은 1943년에 단파방송 밀청사건으로 일제에 잡혀가니까요. 허헌이 1943년까지 변절안하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고, 1941-1942년에도 이종만과 함께 였다면 이종만이 변절한 거라는 의혹은 좀 더 엷어지겠지요.
 
 
 
'일제 시대에 거부가 될려면 일제에 아부하고 부역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종만도 그런 놈일 겁니다.' 하고 대뜸 지레짐작하고 까면 안됩니다. 그런 놈은 금광으로 대박나자 조선일보 사서 해먹고 있는 방응모가 그런 놈이고, 이종만은 오히려 교육과 농민운동, 노동운동, 물산장려운동의 흐름을 잇는 쪽에 가깝다고 할 것입니다.
도대체 금광업주가 독립운동가들하고 모여서 도원결의를 하고, 민족계몽운동에 돈을 퍼붓다 망한 케이스가 또 누가 있습니까.  다들 자기만 돈 벌어 배불려 잘먹고 잘 살았던 자본가들, 광산업자들이 넘쳐났던 시절인 데, 그 시절에도 특이할 종자다 라고 할 정도로 조선민족을 위해서 기부하고 살았던 이종만을 친일로 몰다니..
 
 
이종만이 진짜로 속마음이 민족운동에 있었던 것인지, 금광으로 돈 벌었으니 대충 학교 차려서 이사장 해먹고 싶었던 것인지 어떻게 아느냐 고 하실 분이 있을실지 모르겠습니다. 이종만이 금광 대박나기 전에 가난하던 시절에 함께 경성고학당을 열었던 송강 이준열의 글로 그 정신을 갈음하겠습니다.
 
 
"내가 기미 3.1운동 때부터 검거되기 시작하여 신의주 경찰서와 종로서에 3회, 서대문서 경찰부 2회, 동대문. 중부서 2회 등 60여세까지 생긴 사건 내용은 일일이 쓰지 아니하고자 한다.
...내가 일생을 두고 잊지 못할 큰 것은 (경성)고학당에서 고학생들을 교양하던 과정이다. 기개가 있고 사상을 배우고 여러 가지 인고,  수련하던 그 모습들이다. 유산자 교육기관에 대항하여 세운 유일의 무산자 교육기관인 (경성)고학당은 광주학생사건으로 하여 8년만에 강제폐교되는 운명을 당하였으나, 고학생들의 정신이 얼마나 위대하였고, 우리들의 숙원을 달성하기 위하여 희생된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가는 오직 새로운 역사가 알아주리라.
대한민국의 청년들이여, 씩씩하고 용감하여 후진성으로부터 속히 탈피하여 국제적 고위의 기술과 공업입국으로 완전히 발전하여 낙후가 없이 가위 지식 공력으로 협소한 이 강토에서 평야의 십분지칠이나 되는 산들이 농업단지로 또는 공업단지로 병행 발전하여 세상에서 말하는 낙원이 하루속히 기성되를 천번 만번 기원할 뿐이다"
 

신남연
17
1일 전
 그런데 돈문제는 차치하고 일군에 자원하라고 기고한 건 어떡게 봐야 하나여
읽는 사람이 아 저 분은 민족을 의해 돈도 많이 기부하고 훌륭한 분이니
이건 걸러봐야 한다든지 반어적으로 따져야 하는 거라고 생각해야 하는지
아니면 그냥 내선일체의 일부로서 한반도의 민중에만 기여할 생각이엇는지

 trisam
3
1일 전
뼛속까지 친일이어서 자발적으로 했을 수 있겠죠. 하지만, 매향인님께서 올려주신 내용을 보면 그런것은 아닌것 같습니다. 뼛속까지 친일이 농민에게 노동자에게 조선 학생들에게 그렇게 헌신할 수 있었을까요?
 
무언가를 위해서 그랬다고 보는데요, 기업인이 그런 행각을 할때는 보통 '돈'때문에 하죠. 푼돈주고 큰 돈 벌려고요. 뇌물이죠.
 
그런데... 뇌물이라고 하기에는 얻어낸게 없거나 너무 적다는 거죠. 일제에 2천원 헌납하고, 100배인 2십만원쯤 벌어서, 그보다 몇배 몇십배 큰돈을 민중을 위해 쾌척?? 이것도 말이 안되죠. 즉, 사업을 위해 제공한 뇌물이라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는 민중운동을 더 잘하기위해 일제에 최소한의 부역을 했다고 보여지네요. 지금 시점에서도 상상하기 어려운 거부의 머리속에는 온통 조선의 농민, 노동자, 학생들이 들어있었던거죠.
 
동의 못하는 분들도 계실테고, 저같은 생각을 박사모로 비교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전 그렇게 봅니다.
대한역사상 최고의 민중운동가였다고요.

신남연
3
1일 전
글쎄여 전후 월북햇다는 거 보면 민족주의자라기보단 사회주의자엿구나 싶네여
원래 사회주의 모토가 국경을 넘어 계급끼리 연대하자 뭐 그런 거잔아여
저도 머 재드래곤님보단 미국의 서민에 더 동질감을 느낀달까
 
레닌도 그렇게 연대를 강조하며 계몽햇는데 1차대전 터지니까 젊은이들이 불시에
국가,민족주의자(우파져)가 되어 자원입대하고 막 그래서 황망햇다 그러고요
(요건 사실 누구나 그렇겟져 바로 내 이웃 내 가족 내 땅을 지키고 위하고픈 마음..)
체 게바라도 쿠바혁명 완수후 다른 나라에서 운동하다 죽은 거구여
 
그러니까 당시 민중을 도탄에 빠트렷던 무능한 지배계층 그리고 그로 상징되는 구체제
국가를 복원하려기보다는 그저 내 이웃민중을 생각하는 마음이 더 컷달까
 
어쨋든 소위 우리가 말하는 민족주의 독립운동가상이라곤 볼 수 업는 거 같네여
 ♡

 trisam
1
1일 전
어떤 말씀인지 이해합니다. 그래서 저도 '민중운동가'라고 표현한거고요.
민족주의 관점에서 보면 친일파로 볼수 있죠. 하지만 민중운동관점에서는 영웅으로 볼수있는거죠.
 
독립운동을 민족주의 관점에서만 해석하는 것은 반쪽짜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賣香人님은 아직 프로필 이미지를 등록하지 않으셨습니다. WR 賣香人
12
1일 전
내선일체 운운하기 전에,
조선 민족을 위해 평생을 일하고, 평생 벌은 돈을 털어넣은 민족주의자를,
조선민족을 위해 설립한 사업체가 망하게 생기니까 일제에 살려달라고 빌고 임전보국단 글 써준 것을 가지고 물어뜯고 또 뜯고 하는 것은, 너무 하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대동운동을 함께 한 총괄전무 이준열은 3.1운동 참여에 상해임시정부 군자금 모집까지 했었던 독립운동가이지만 대동살리겠다고 이종만과 같이 임전보국단쪽으로 넘어갔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남한에 남았고, 아들 이기준이 서울대 총장, 교육부총리까지 역임하니까 이준열은 대충 눈감아주고 자서전까지 내면서 네임드 독립운동가로 떵떵거리고,
월북한 이종만은 만만하니까 친일파라고 까는 겁니까.
 
다 같이 민족운동한다고 평생을 바친 사람들인 데 일제 압박에 못이겨 잠시 고개를 숙이고 빌빌 거린 일이 있다고 해서 까대고, 하다못해 그것도 누구는 남한에 남았으니 봐주고, 누구는 월북했으니 가차없이 까고.... 너무들 하잖아요.
 
애시당초 이준열도, 이종만도 민족을 위해서 살았던 사람들이고 남부끄러운 인생을 산 사람들이 아닙니다. 자랑스러워하면 했지.
친일 행위한 이완용이나 박정희, 방응모 같은 놈들이 부끄러운 삶을 산 것이지, 민족을 위했던 이준열이나 이종만은 부끄러운 사람들이 아니에요.  진짜 깜도 아닌 걸 가지고 꼬투리 잡아 까대고... 인간적으로 이래도 되는 겁니까.
'핑계 없는 무덤 없다' 따위 말을 하며 까대기 전에,
우리들은 이준열이나 이종만 정도로 민족을 위해서 삶을 던지며 살고 있습니까.

strbrshtck
7
1일 전
이종만이 혁신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비즈니스맨이었고 흥미로운 사람이었다는 점은 확실하군요. 그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으로서(특히나 남들보다 감각이 뛰어날수록) 고뇌가 더 많았으리라는 점은 확실히 알 것 같습니다.

다만 친일과 반일을 확실히 구분짓기 힘든 사람들에 대한 평가는(ex.본문의 이종만처럼 민족의식이 있었고 독립운동을 많이 후원했지만 일제 말기에 자의반타의반으로 친일에 가담했던 사람들) 어떤 뚜렷한 정답은 없는 것 같습니다.

공과 과를 비교해서 독립운동에 많은 무게를 두어서 평가하는 사람의 입장도 일리가 있고(매향인 님처럼), 독립운동의 순결성을 중시하는 분들의 입장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습니다. 즉, 귀막고 욕만하는 건 아니라는 거죠.

해박한 지식을 나누어주셔서 감사합니다.

D Shade
1
1일 전
일제 시절 잘 알려지지 않은 분들은 몇몇 단편적인 정보를 기초로 잘잘못을 해석할수 밖에 없기에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겠습니다만...

저는 적어도 큰 돈을 만진 사람이 자신이 아닌 주변사람을 위해 큰 돈을 쾌척했다면 좋은 사람이라고 판단합니다.

돈 생기면 친구나 가족도 적으로 돌리는 사람이 천지인데 저렇게 큰 돈 생기고도 주변 사람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뼛속까지 친일행위를 하며 나라를 배신할 사람이 아니라 생각되네요.

마지막으로 계속 함께한 사람들을 보면 친일파가 아님이 더 분명한것 같습니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하죠. 독립운동가가 친일파하고 친구먹자 하진 않았겠죠.)

친일파를 숙청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같은 동포를 피해입히거나 나라를 팔아 자신의 잇속을 챙겻기 때문 아닌가요?

성룡최고
9
1일 전
 그 시대에 저 정도 일을 했다면....친일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뭐도 안하면서  입만 나불거리는 사람들이 많다는게 더 현실이죠.
비판만 즐겨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쵸...

텅빈거리
2
1일 전
이게 참 미묘한게 이종만의 경우는 우리나라에서는 친일파로 규정하지만 월북한 자본가요 북한에서 여러 고위직을 역임한 후 애국열사묘지에 묻혔다고 하는군요. 친일파를 모두 단죄했던 북한에서는 저리 평가받았습니다.


대한민국에선 빨갱이보다 차라리 친일파러 낙인찍히는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좀 듭니다.

WR 賣香人
6
1일 전
미담을 전해줘봤자 뭐합니까. 올려주신 대로 민족문제 연구소 측에서는 이미 이종만의 미담에 대해서 입장을 내놨습니다.
'독립운동 한 게 아니니까 고려해줄 바가 없다.' 이겁니다.
 
시야가 너무 좁아요.
만주가서 독립운동 한 것만 애국애족이고, 계몽운동, 교육사업, 빈민구제사업, 농민운동은 애국애족으로 못쳐주겠다니.. 너무 하잖아요. 경성고학당만 하더라도 일제 탄압으로 문닫은 학교인데...

WR 賣香人
5
24시간 전
자료가 없는 게 아니라,
있지만 독립운동 범위 밖이니까 인정안하겠다고 하는 게 문제인 겁니다.
 
자꾸 민족문제연구소측에 자료를 제출하면 알아서 고쳐줄 것이다 는 말씀을 반복하시는 데, 민족문제연구소 측에서는 이종만이 기부하고 사회에 공헌한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은 독립운동 범위가 아니니까 못쳐주겠다는 겁니다.
민족문제 연구소를 무슨 정의의 판단기관으로 여기시면 안되어요. 저도 민족문제연구소를 좋아하고 후원하는 사람중 하나이지만, 거기는 친일문제만 전문으로 다루는 곳입니다.
 
워딩을 잘 보세요.
민족문제연구소 측에서는 '이종만이 한 것이 독립운동이 아니다' 라고 말하고 있지, '민족운동이 아니다' 라는 말은 안합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의 과만 따지는 곳이지, 거기가 일제하에서 우리 민족의 교육사업, 빈곤문제, 산업발달을 다 다루는 곳이 아닙니다. 민족문제를 종합판단하는 기관도 아니구요. 거기는 친일행위를 찾아내서 사전으로 편찬하는 것에 집중하는 곳입니다.
물론 중요한 판단자료를 제공해주는 소중한 곳이고 후원할 만한 곳이기는 하지만, 거기에 내 판단을 맡기면 안됩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자료를 참고하여 판단은 나 스스로, 각자가 해야 하는 것이지.

kodykody
3
1일 전
만해 한용운도 '지나사변과 불교'라는 글에서 중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정당성을 논술했는데,
위 몇분들 기준에 의하면 친일인명사전에 만해 한용운도 올려야 하는 것 아닌가요?

악인에 대해서는 관행이니, 인간적인 이해라느니 관용하는 말들이 많은데,
선인에 대해서는 한점의 티끌조차 허용하지 않으니 참으로 독야청청한 시류라고 하겠네요.

아샤단
1
1일 전
자산가의 힘의 원천인 "돈"을 타인의 삶을 위해서 자신의 거의 모든 재산을 투자한다면
보통 "위대한 사람" 또는 "성인"이라고 불릴만한데요...
자신만의 권력을 움켜잡고 있어도 되는 것을, 모르는 타인들에게 돌려주는 사람들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

내가슴속에우는바람
6
1일 전
아주 소극적으로 제가 친일파나 민족 반역자로 욕하는 것은 저라면 저렇게 나라를 팔아 내 잇속을 위해 살지 않을 것이다,는 생각이 있어 비난을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저는 이종만의 발끝에도 못 미치기에 저의 기준에서 훌륭한 사람으로 판단하고요.

그가 독립운동가의 기준에 못 미친다면, 준 독립운동가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라고 봅니다.


그가 친일에 협조했다. 것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최소한 당신이라면 이종만처럼 살수 있나 묻고도 싶습니다.

WR 賣香人
10
1일 전
>이 땅의 수많은 젊은이들을 사지로 몰아넣어 개죽음을 당하게한 친일행적
 
이종만에게 저럴 능력이 어디있습니까. 말도 안되는 오바입니다.
이종만이 일제에 머리숙이게 만든 이유 자체가 대동농촌사 망하면 거기 딸린 조선 농민들은 어떻게 하고, 대동공업전문학교 망하면 거기서 교육하던 조선인 학생들은 어떻게 하며, 대동광업사 망하면 거기 조선인 광부들은 어떻게 합니까. 자신에게 목을 매달고 사는 조선민중들이 있고 거기 책임을 져야하니까 이종만이 고개를 숙였던 것이지, 1942년에 금광 강제 폐쇄 되어서 5개 사업체가 동시에 망하고 나니까, 이종만도 친일 땡 칩니다. 머리 숙일 이유가 사라졌으니까요.
 
보통은 이런 거 하면, 자신에게 목매달린 종업원들이라고는 해도 어차피 자기 사업체를 유지하기 위해서인 것이고 자기가 돈벌기 위해서 일제에 머리숙인 거 아니냐 라면서 개처럼 까이는 게 마땅한 데, 이종만은 자기 이익을 다 퍼다가 민족운동에 쓰던 사람이고, 민족운동 사업체를 유지하기 위해 머리숙인 케이스라서 까기도 뭐해요.
 
 賣香人
9
1일 전
그러니까 그건 monandol 당신 생각이구요. 돈돈돈.  돈에 얼마나 찌들었으면, 보이는 게 돈입니까.
저번 글에서도 보니까, 이종만이 '거액'을 투척했으니 용서하자는 것이냐 라고 돈 액수에 집착하시던데, 제가 보는 건 돈이 아니라 인생입니다.
저는 일제에 헌금한 게 2천원 vs 민족에 기부한 게 80만원이라며 1:400 비율을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데, monandol님 당신은 자꾸 80만원이 거액이라서 그런 것이냐. 돈이 많아야 친일도 면죄부 받는 세상. 이라며 절대 액수를 자꾸 이야기하더라구요. 저와 님이 같은 80만원을 이야기하는 데도, 뭔가 핀트가 다르더군요.
 
부자이든 거지이든 누구든 인생은 한번 사는 거라서 같고요,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흐르구요, 자신이 모은 부를 퍼센티지로 따지면 누구나 100%입니다
저는 이종만이 거액을 투척했다고 칭찬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번 가산의 대부분을 털어넣은 것에 칭찬하는 것이고,
몇번이고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민족계몽운동과 농민운동, 노동운동을 계속 시도하고 노력한 것에 높은 점수를 주는 것이고,
자신의 사익을 추구하지 않고, 공동체와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을 위해 이윤을 돌린 것을 평가하고, 가난할 때도 부자일때도 한결같았던 것을 평가하는 겁니다.
 
가난하고 미약할 때는 동네 서당을 모아 학교를 세우고,
그보다 낫지만 여전히 가난할 때는 경성고학당을 세우고,
돈을 벌으니 대동공업전문학교를 세우고... 가난하거나 부자이거나 언제나 교육계몽을 통해서 조선 민족이 더 나아지기를 바라고 실천한 사람이 이종만입니다.
 
몇백억을 버는 사람이 아니라, 단돈 몇백만원을 버는 가난한 사람일지라 하더라도, 자기가 번돈의 절반이상을 자신보다 더 가난한 이에게 돌리는 사람은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자기 혼자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공동체와 함께 잘 살기 위해서 자기 시간을 쓰고, 자기 삶을 바치는 사람은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방응모 같은 놈은 금광으로 돈 벌어서 먹고 살만 해지니까, 명예욕에서 남아도는 돈에서 일부 떼어다가 뽀찌 뿌리는 게 방응모식 장학재단인 거고,
기본적으로 자기가 가난하면 남에게 나눠주지 않습니다. 내 돈이 남아돌고 썩어나야 뿌리는 겁니다.
 
이종만은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가난해도 남에게 나눠주었고, 자기가 부자가 되어도 남과 나누는 사람이었습니다. 너무 나눠주다 보니까, 금광이  터져도 거덜난 게 이종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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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판왕 17-03-06 16:07
   
안사요 ~
오뎅거래 17-03-06 16:11
   
오류가 있으면 후손들이 수정해야지요
저 내용이 미화없는 사실이라면 고려해봐야 할 사안임
제 생각에는 신빙성이 아주 높다 생각되는 글이군요 하도 우리나라 뻘짓한게 많아서리
꽃보다소 17-03-06 16:24
   
ㅎㅎ 신문기사만 보아도 이런 내용이 있더군요. 강동원의 조상이 착한일 나쁜일 두가지를 다 했다. 하지만 나쁜 일이 정도가 지나친 거죠.

한 사람이 사람을 죽였다. 하지만 한 명의 생명도 구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의 죄는??
     
오뎅거래 17-03-06 16:28
   
한사람을 죽이고 여러사람을 살렸다가 옮은 표현 같음 저 글대로면 거의 전재산을 다 털어서 다른사람 위해서 썼음
          
꽃보다소 17-03-06 16:32
   
그렇다면 처음 위안부생길때 일본에게 돈 지원하고 이런 일들은 묻어야 한다는 겁니까?
               
오뎅거래 17-03-06 16:34
   
뭍으라는게 아니라 너무 매도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때 상황에서 어쩔수없었다 이런말 하는게 아니라 공과 과는 정확하게 평가 하자는겁니다
               
두리네이터 17-03-06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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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측 “강동원 외증조부 위안부 지원? 100% 왜곡”
4번째정지 17-03-06 17:43
   
매국노 물타기 희석 들어가나요~~
어쩌라고응 17-03-06 18:31
   
캬 강동원  조상 경력화려하네
강동원이 '예술이다'  라고  할만했네
일제가 판치는 조선 안에서 저렇게 크게 사업했네
왜 애국열사릉에 안장됐는지 궁금했는데  잘읽었습니다
어쩌라고응 17-03-06 18:34
   
항상 하는말이지만 애국열사릉이 사실이라는 가정하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