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시조 혁거세거서간(
始祖 赫居世居西干)조에서는, “이에 앞서 조선(
朝鮮)의 유민(
遺民)들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뉘어 살며 6촌(
六村)을 이루고 있었다. 첫째는 알천(
閼川) 양산촌(
楊山村)이고, 둘째는 돌산(
突山) 고허촌(
高墟村), 셋째는 취산(
觜山) 진지촌(
珍支村) 혹은 간진촌(
干珍村)이라고도 하였다. 넷째는 무산(
茂山) 대수촌(
大樹村), 다섯째는 금산(
金山) 가리촌(
加利村), 여섯째는 명활산(
明活山) 고야촌(
高耶村)인데, 이것이 진한(
辰韓) 6부(
六部)가 되었다.(
先是 朝鮮遺民 分居山谷之間爲六村 一曰閼川楊山村 二曰突山高墟村 三曰觜山珍支村 或云干珍村 四曰茂山大樹村 五曰金山加利村 六曰明活山高耶村 是爲辰韓六部)”라고 되어 있다. 진지촌(
珍支村)이 간진촌(
干珍村)으로 불렸다는 기사와 촌이 언급된 순서를 제외하면 동일한 내용이다.
또한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유리 이사금(
儒理尼師今) 9년(32)조에는, “봄에 6부의 이름을 바꾸고 그에 따라 성을 내려주었다. 양산부(
楊山部)를 양부(
梁部)로 고치고 성은 이(
李)로 하였고, 고허부(
高墟部)를 사량부(
沙梁部)로 고치고 성은 최(
崔), 대수부(
大樹部)를 점량부(
漸梁部)[또는 모량부(
牟梁部)라고도 하였다.]로 고치고 성은 손(
孫), 간진부(
干珍部)를 본피부(
本彼部)로 고치고 성은 정(
鄭), 가리부(
加利部)를 한기부(
漢祇部)로 고치고 성은 배(
裵), 명활부를 습비부(
習比部)로 고치고 성은 설(
薛)로 하였다. 또 관(
官)을 설치하였는데, 17등급이 있었다.(
春 改六部之名 仍賜姓 楊山部爲梁部 姓李 高墟部爲沙梁部 姓崔 大樹部爲漸梁部[
一云牟梁]
姓孫 干珍部爲本彼部 姓鄭 加利部爲漢祇部 姓裴 明活部爲習比部 姓薛 又設官有十七等)”라는 기사가 확인된다.
여기서는 촌(
村)이 이미 부(
部)로 변경되었다가, 유리 이사금 9년(32)에 다시 부의 명칭이 변경된 것처럼 되어 있다.
또한 『삼국유사』에서 사량부(沙梁部)와 본피부(本彼部)의 성이 각각 정씨(鄭氏와) 최씨(崔氏)인데, 여기에서는 뒤 바뀌어 있다. 이것은 『삼국유사』권1 기이 신라시조 혁거세왕(新羅始祖 赫居世王)조에서 본피부를 설명하면서, “최치원(崔致遠)은 본피부 사람이다.(致遠乃本彼部人也)”라고 하였지만, 『삼국사기』권46 열전6 최치원(崔致遠)전에서는, “최치원은 왕경의 사량부(沙梁部)사람이다.(崔致遠 …王京沙梁部人也)”라는 구절에서처럼 인식의 차이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또한 『삼국사기』에서는 부의 개편과 동시에 17관등제도 정비된 것으로 되어있다.
이상에서 사료를 통해서 살펴본 것처럼,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서 언급된 6촌에 대한 부분은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기본적으로 신라가 건국되기 이전에 6촌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유리 이사금 9년(32)에 6촌을 6부로 바꾸고 각각의 부는 성씨를 받았다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