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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11-18 15:00
몽골얘기가 나와서 말입니다만
 글쓴이 : ellexk
조회 : 1,045  

고려에 대한 과대평가가 심한거 같습니다

아래 글은 고려가 여몽전쟁기간중 살아남은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사실 당시 고려만큼 항쟁했던 나라들은 꽤 많이 존재했었어요.




고려는 1231년 1차 전쟁을 시작으로 1259년 9차까지 30년 더 넒게 보자면 삼별초의 항쟁까지 40여년을 몽골인들과 전쟁을 치루었습니다, 지배층 자제의 입질, 호구조사의 보고, 몽고군 원정시의 조군, 원에 대한 식량과 물자의 공납, 다루가치의 주재, 역참의 설치 등 이른바 6사(六事)를 강요 하는 전통적인 외교 방식에 대하여 강하게 반발하여 벌어진 이 전쟁은 고려를 쇠락하게 만든 주요한 원인들중 하나였지요,
 
그럼에도 고려는 살아남았습니다, 수차례 전란을 겪으면서도 기어이 국가를 지켜냈고 심각한 내정 간섭이 존재하였으나 고려의 가치는 매우 높게 평가받았습니다, 그러한 이유가 뭘까요? 당연히 잘 싸워서 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대몽항쟁이 유래없는 전쟁이기는 했지만 금나라의 경우 20년간 전쟁을 벌였고 그 들은 몽골의 전술 교리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금송의 하늘 높이 치솟은 강대한 성채는 기병들을 주저 앉히기에 충분했지요, 호라즘의 경우 그 들의 기병 전력은 가히 몽골과 일전을 겨룰만한 존재였습니다, 남송은 어떨까요? 제 아무리 창이 날카롭다 하더라도 방패를 뜷기는 어렵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는 전쟁이었습니다, 유럽의 중장 기병들은 십자군 전쟁에서 증명되었듯이 정면으로 대적하는것은 무모한 일이었고 맘루크의 전략적 운용은 몽골을 뛰어넘는 수준이었지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보자면 고려가 살아남은 이유는 우수한 전과의 문제라기 보다는 외교적이고 정치적인 상황이 기여한 바가 매우 큽니다.
 
비록 반란군이 들어다 바친 동녕부와 동북면 일대의 약 60여개 성은 당장은 돌려받지 못하였지만 원종이 쿠빌라이에게 받아낸 불개토풍不改土風 다른말로 세조구제世祖舊制 라고 하는 즉 몽골에 귀속은 하되 고려라는 국가는 유지하게 해달라는 약조로 인하여 이중적인 통치가 이루어지게 된 것인데 그 배경은 내부의 문제 때문입니다.
 
이는 옷치긴 왕가의 존재 때문으로, 무슨 말인가 하자면 징기스칸이 옷치긴에게 몽골의 옛 터전인 에르구네의 동쪽 지역인 홍안령 일대를 분봉해주면서 생겨난 문제인데 이 옷치긴 일족은 중앙정부와 수 차례의 반란을 통한 독립과 대칸을 향한 도전등을 시도하며 끊임없이 마찰을 빚고 또 타협을 하며 성장을 거듭하여 만주 일대를 석권하는 대단한 왕족으로 사실상 쿠빌라이의 배경중 하나이기도 할 정도로 그 위세가 대단하였는데 이러한 이 들의 성장에 제동을 걸고자 했던 방책이 바로 고려의 존재를 세우는 것입니다,
 
이후의 심양왕을 비릇하여 작위를 내린것도 그렇고 부마로서 대우를 하며 황금씨족의 일원으로 끌어들인것도 이러한 까닭입니다, 당장 목 안에 걸린 가시와 같은 내부의 문제를 견제를 통해 호전시켜보자는 더 나아가 해결해보고자 한 것이지요.
 
비단 옷치긴뿐만이 아닙니다, 만주와 동몽골 일대를 석권하여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미비할수 밖에 없었던 이른바 동방 3왕가 들에 대한 견제 역시 몽골이 고려를 유지할수 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물론 옷치긴 왕가가 몽골 제국과의 사이에서만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와 무관한 이 들은 아닙니다, 사실상 고려의 서해안 일대에 고려를 제치고 주요한 영향력을 미치기도 했고, 수없이 반복된 수탈의 주요한 원인을 꼽자면 이 들을 빼놓을수 없습니다, 그 뿐일까요? 옷치긴 왕가를 비릇한 동방 3왕가를 견제하라고 만든 심양왕의 작위는 도리어 동포들을 학대하고 수탈하는 약속된 이름이기도 했지요.
 
멀리보자면 조선을 세운 이성계의 선조도 이 동방 3왕가의 맹주 옷치긴의 휘하에서 복무한 적이 있다고 할 정도로 이 들의 영향력은 만주 일대에서는 몽골을 당연히 앞질러 갈 정도였습니다.
 
간략히 적어보자면 이렇습니다, 음 두서가 없었지만 네 그렇습니다, 고려가 살아남은 것은 그 들이 뭔가 엄청난 위업을 달성한 까닭은 결코 아닙니다, 좀 심한 말일지 모르나 몽골 제국 내부의 문제가 없었다면 막강한 영향력을 휘두르며 중앙정부가 늘 견제를 해야했던 옷치긴을 필두로 한 동방 3왕가가 없었다면 고려는 말 그대로 남송이나 호라즘, 금나라와 같이 완전한 몽골제국의 일부가 되었을지 모르는 일이지요.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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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lexk 16-11-18 15:04
   
우리가 잘 못 알고 있는 상식 중 하나가 오늘날 러시아의 거대한 영토는 몽골의 지배에 저항한 모스크바 공국이 점차 몽골 세력을 구축하고 주변을 병합하며 형성된 것으로 알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모스크바 공국은 몽골의 침입 때 얼마간의 저항을 벌였지만 곧바로 스스로 피지배인이 됨으로써 몽골로부터 대공국(Grand Principality of Moscow)의 칭호와 더불어 다른 공국들보다 월등한 자치권을 부여받았던 나라였습니다.



[ 스웨덴, 독일 기사단의 침략을 막아내어 러시아의 영웅으로까지 추앙 된 네프스키
하지만 몽골은 결코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여 스스로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

 

즉, 넓은 영토를 모두 직할지로 경영할 수 없었던 몽골제국에게 먼저 충성을 맹세함으로써 간섭을 최대한 배제하고 내실을 기하면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후의 영토 확장도 몽골을 격퇴하며 이룬 것이 아니라 몽골이 쇠퇴하여 무주공산이 된 힘의 공백 지대를 자연스럽게 차지하며 이룬 결과였습니다.  이처럼 시간이 흐르며 칸(汗)국은 지배층이 몽골인에서 슬라브인으로 바뀌며 자연스럽게 현지화 되었습니다.

 


(러시아의 경우도 항쟁이후 일찍이 몽골에게 머리를 조아림으로써 가장 강한 자치권을 행사한 나라가 됐다고 하네요. 고려만 특수한 경우라고 보는 분들이 있다면 그건 틀렸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
     
스테판커리 16-11-18 15:05
   
역잘알 ㄷㄷㄷ
바로크 16-11-18 15:09
   
전 첫 번째에 살아 남아야 두 번째, 세 번째도 있다는 사실에 더 주목하고 싶습니다.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자가 진정 강한 자라는 옛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란 생각이 든다고나 할까요..
록도하억기 16-11-18 15:17
   
역사에 가정이란 없습니다..
고려는 살아남아 역사책에 남아 있습니다
님의 고견은 좋으나,,
그러지 않았으면 이리 되었을거라는 가정은 함부로 하시면 안됩니다
고려가 살아남을수 있었던 님의 이유는 몽고와의 힘의 차이가 엄청났다라는것으로 귀결되며
지역적으로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고려를 한나라로 귀속시키는것보다는 자치하에 두는게
나았을것이란건 누구나 할수 있는 생각입니다
고려가 위대한 국가라 살아남았다고 생각하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ellexk 16-11-18 15:22
   
? 제가 언제 가정법을 썼나요?
제대로 읽어 보신건지 의문스럽네요

고려가 살아남은 것에는 운이 좋았던 이유가 더 크다 라는 이야기를 했을뿐...
          
록도하억기 16-11-18 15:25
   
마지막 요약하는 말은 가정이 아닌가요?
결국은 고려는 님이 주장하는 이들이 없었으면 나라를 유지 하지 못했을거란 가정을 결론으로 내리고 있는것 같은데요..
제가 글을 잘못읽엇나요?
               
ellexk 16-11-18 15:30
   
내가 주장하던 이들???
본문에 주체적인 화자나 주인공이 존재합니까?

가정법 = a라는 역사적 사실을 두고
              b였으면 어땠을까 하고 상상해보는것

논란 = 같은 a라는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다른시각으로 판단하는것

님은 지금 저 둘을 혼동중인거 같네요
                    
록도하억기 16-11-18 15:37
   
글참 어렵게 쓰시네요..

님 생각은 저들.. 저들이 싫으면 옷치긴을 필두로 한 동방 3왕가 없었다면
고려는 복속됐을거라는 가정을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게 맞더라도 가정은 있을수 없다란 말을 드린겁니다
제가 드린 것에 답을 하시고 거기에 맞는 답을 하셔야지..
지금 역사강의에 국어강의까지 하실작정인가요?
                         
ellexk 16-11-18 15:40
   
답변 쓰고 있구만... 댓글다시네...

 옷치긴을 필두로 한 동방 3왕가가 없었다면 고려는 말 그대로 남송이나 호라즘, 금나라와 같이 완전한 몽골제국의 일부가 되었을지 모르는 일이지요

이것 때문이라면 별 의미없는 사족을 가지고 논란거리로 만들 필요도 없을듯 싶은데요
본문 글도 퍼온것을 주체로 했고 본문의 주제 자체와도 큰 영향이 없는 말그대로
있으나 마나한 사족일 뿐입니다.

이걸 왜 물고 늘어지십니까?

그러니 뭔소리를 하는지 이해를 못할수밖에요

마지막 한줄이 중요한가요?
전체 본문이 중요한가요?

님이 주장하는대로 위의 본문이 가정을 중심으로 한 글이라면

최소 중반부터 마지막 한문장을 테마로한 이야기가 나와줘야 그렇게 따질수 있겠죠
                    
록도하억기 16-11-18 15:52
   
님의 말씀에 동의 하고 저의 과한 딴지 일부인정합니다

본문의 내용이 중요하더라도 그 본문의 내용을 가지고 그글을 쓰는이가
자신의 사견을 곁들이는것은 누구나 할수 있으나
역사에 관해서는 함부로 사적인 가정을 하면서 결론을 맺으면
결국은 그것은 본문의 중요성은 사라지고 개인의 서견만이 남을수 있는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는 님도 생각을 해보심이 좋을것 같습니다
그저 말꼬리 잡으려는 사람으로 치부하시어도 상관없지만,,
역사라는게 일부로던 실수던간에 개인의 가정하의 사견이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되는 영역입니다..
                         
ellexk 16-11-18 15:56
   
네 다음부터는 민감한 사족부분은 좀 조심해서 올려야 겠습니다

다른 의견을 지닌 분들도 계실테니...
촐라롱콘 16-11-18 15:30
   
쿠빌라이칸 이전의 구유크칸과 몽케칸도 한때 동방3왕가의 세력을 제어하고
만주지역에 대한 중앙집권화를 시도하기는 했지만 포기하고 말지요....!!!

쿠빌라이칸은 보다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시도하다가 결국 이들과 충돌하여
고려 충렬왕대에 나얀(내안)의 난과 카단(합단)의 난이 이어지며 고려까지 불똥이
튀게 되지요.....!!!

이후 고려말기 더불어 원나라말기~명나라 초기의 만주의 실력자로 한 때 고려까지
침입했던 나하추세력 또한 동방3왕가의 마지막 잔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자춘-이성계 가문 역시 고려에 귀순하기 전에는 동방3왕가의 하부구조를 이루었던
가문이라 할 수 있고.....
따라서 일각에서는 이성계의 출신을 몽골 또는 당시 몽골에 예속되었던 여진계통으로
보기도 합니다. 실제로 이성계의 고모를 비롯하여 이성계 조상대부터 주변의 유력한
여진계 또는 몽골계 부족장 가문과 대를 이어 혼인해 왔던 것은 사실이니까요.....!!!

고려말기에 동북면 일대에서 일어난 여진족 삼선-삼개의 난에서 삼선-삼개는 이성계와
고종사촌지간입니다. 이성계의 고모가 여진추장에게 출가하여 낳은 자식들이 삼선-삼개인
것이지요!

따라서 이성계집안의 선조가 전주로부터 출발하여 함경도지역에 정착했다는 것은
용비어천가로 상징되는 대표적인 신분세탁-민족세탁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비좀와라 16-11-18 16:18
   
역사에 관해서 여러 해석을 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 여기는 1 인 이지만...

이번 것은 고려에 관해서 너무 박한 평가라 보이는 데요. 칭기스칸이 호라즘을 완전히 몰살 시킨 것이 몽골의 사신을 모욕을 주었고 그로 인해 몽골 사신이 xx을 했다는 이유에서죠.

그런데 고려는 몽골사신 일행을 아예 학살 해 버렸습니다. 그런데도 버팅기고 살아 남았죠. 그러면 최소한 호라즘 보단 강한 것 이네요.
     
촐라롱콘 16-11-18 17:44
   
몽골사신 저고여 일행이 고려국경 근처에서 정체불명의 무리로부터 습격당해
살해된 것은(물론 당시 고려는 본인의 소행이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정황상
고려가 벌인 일일 가능성이 가장 크기는 합니다.

그런데 당시 칭기스칸의 몽골군 주력 대부분은 비좀와라님이 위에서 언급하신
호라즘원정을 위해 중앙아시아-서아시아에 진출해 있었던 상황이었고.....

당시 칭기스칸을 대리하여 고려를 비롯하여 동북아일대를 관장한 것은 칭기스칸의
4구4마의 한 명으로 일컬어지는 무칼리였습니다.

당시 무칼리 휘하의 몽골군은 겨우 3만 미만에 불과했고 이 정도 병력을 가지고
몽골군이 장악한 대도(현 북경근처)를 비롯한 금나라 점령지들을 관리함은 물론이고,
잔여 금나라 세력들과 대치함은 물론 요동-만주-한반도 방면의 거란족, 동진국, 고려까지
신경써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거란족이 몽골군에 협력하고 동만주 일대에 근거한 동진국 또한 당시에는 몽골에
신속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무칼리가 이끄는 북중국 일대의 몽골군이 그나마 위태위태하게
유지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고려에 파견된 몽골사신 저고여는 칭기스칸이 파견한 것이 아니라 북중국의 대리인에
불과한 무칼리가 파견한 사신입니다.
따라서 당시 몽골사신이 피살되어도 당장 고려에 대해 병력을 동원할 여력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이후 몽골의 1차침입은 저고여 사건으로부터도 만 6년 이상이 지나서야 이루어졌고...
칭기스칸도 죽은 이후인 2대칸인 오고타이칸 시기에 이루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