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 삼국지 위연전
보니
실제론 반역할 생각은 없었을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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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三國志) 촉서(蜀書) 권 46
촉서(蜀書) 10 위연(魏延)
위연이 자는 문장(文長)으로 의양(義陽)사람이다. 부곡(部曲; 호족 대가들의 사적 예속인, 사병)신분으로 선주를 따라 촉으로 들어가, 수차례 전공을 세워 아문장군(牙門將軍)으로 승진했다.
선주가 한중왕(漢中王)이 되어 성도(成都)로 옮겨 다스리매, 마땅히 중한 장수를 얻어 한천(漢川)을 진수(鎭守)해야 하는데, 당시의 의논이 반드시 장비될 것이라고 했고, 장비도 마음속으로 그렇게 자인(自認)하고 있었다. 선주가 이에 위연을 발탁해 독한중(督漢中) 진원장군(鎭遠將軍)으로 삼고, 한중태수를 맡게 하니, 온 군대가 다 놀랐다.
선주가 여러 신하들을 크게 불러 모아, 위연에게 묻기를 지금 경에게 중임을 맡겼는데, 경이 그 자리에 대해 뭐라 말하고 싶소?라 하자, 위연이 대답하길 만약 조조가 천하를 들어 온다면 청컨대 대왕을 위해 이를 막고, 편장(偏將) 10만의 군대가 이르면 청컨대 대왕을 위해 섬멸해 버릴 것입니다라 했다. 서주가 그를 칭찬하고, 모두를 그 말을 장하게 여겼다.
선주가 존호를 칭하자(제위에 오름), 진북장군(鎭北將軍)으로 승진 임명했다. 건흥(建興) 원년(223) 도정후(都亭侯)에 봉했다.
건흥 5년(227), 제갈량이 한중에 주둔하게 되자, 다시 위연을 독전부[督前部; 전거는 정확히 없지만, 다른곳에도 이와 비슷한 형태의 명칭, 예를 들어 '독후부(督後部)' 등이 나오는 걸로 봐서 술어가 아닌 관명 같습니다. 앞서 독한중도 그런 예 같습니다]로 삼아 승상사마(丞相司馬), 양주자사(凉州刺史)를 맡게 하였다.
8년(230)에는 위연을 시켜 강중(羌中)으로 들어가게 하니, 위나라의 후장군(後將軍) 비요(費瑤), 옹주자사(雍州刺史) 곽회(郭淮)와 위연이 양계(陽谿)에서 싸웠는데, 위연이 곽회 등을 크게 격하여, 전군사(前軍師) 정서대장군으로 승진되고, 부절을 내려주며, 남정후(南鄭侯)로 올려 봉해졌다.
위연은 매양 제갈량을 따라 출정하였는데, 번번이 병사 1만명을 청해 제갈량과는 길을 달리해 동관(潼關)에서 만나 한신의 고사[항우를 공격할 때, 한신이 한왕인 유방과는 길을 달리해 진격했던 일]와 같게 하려 했지만, 제갈량이 제어하며 불허하였다. 위연은 항상 제갈량이 겁이 많다고 하며, 자기의 재주가 다 쓰여지지 못함을 탄식하였다.
위연은 군사를 잘 길러, 용맹함이 남들보다 뛰어나고, 또한 성품이 자만하여, 당시 사람들은 모두 그를 피했다. 오직 양의(楊儀)만은 위연에게 지지 않으니, 위연은 매우 분노하여, 서로 물과 불 같았다.
건흥 12년(234) 제갈량이 북곡구(北谷口)로 출정하니, 위연은 선봉이 되었다. 제갈량이 군영에서 10리를 나왔는데, 위연이 꿈에서 머리위에 뿔(角)이 생긴 꿈을 꾸고, 해몽가 조직(趙直)에게 물으니, 조직은 위연에게 거짓으로 무른 기린은 뿔이 있으나 쓰지 않으니, 이것은 싸우지 않고도 저절로 적을 격파할 상(象)이다라 했다. (조직이) 물러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하길 각(角)이라는 글자는 칼 자(刀) 아래 용 자(用)가 있는 것인데, 머리 위에서 칼(刀)을 쓰니(用)[머리에 뿔이 생겼다는 꿈], 매우 흉하다라 했다.
가을, 제갈량이 병이 심해지자, 은밀히 장사(長史) 양의(楊儀), 사마 비의(費褘) 호군 강유(羌維) 등과 자신이 죽은 후에 퇴군하는 방법을 만들어 주고, 위연에게 영을 내려 후방을 끊게 하고, 강유는 그 다음에 있게 하였다. 만약 위연이 혹 명을 따르지 않으면, 군대가 바로 직접 출발토록 했다.
제갈량이 죽자, 비위가 발상(發喪)하지 않고, 양의는 비위에게 영을 내려 가서 위연의 뜻을 알아보게 하였다. 위연이 말하길 승상께서 비록 돌아가셨지만, 나는 살아있소. 승상부의 관속들이 곧 상여를 가지고 돌아가 장례를 하는게 옳고, 나는 응당 여러 군대를 이끌고 적을 격퇴해야 하오. 어찌 한 사람이 죽었다고 천하의 큰 일을 폐해야 겠소? 또 내가 어떤 사람인데, 양의의 지휘를 받아 후방을 끊는 장수가 되겠소!라 했소.
(양의는) 이로 인하여 비위와 함께 떠나고 남을 군대를 나누어, 비위에게 자기와 이름을 같이 한 글월을 손수 써서 휘하의 여러 장수들에게 알렸다. 비위가 위연을 속여 말하길 응당 당신을 위해 돌아가 양장사(楊長史;양의)에게 해명하겠습니다. 장사는 문리(文吏)고 군대 일을 겪어본 적이 드무니, 반드시 명을 어기지 않을 것입니다라 했다. 비위가 군문을 나와 말을 달려 달아나니, 위연이 곧장 후회하려, 추격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위연이 사람을 보내 양의 등을 살펴보게 하여, 마침내 제갈량이 만들어 놓은 계획을 실행해 여러 군영이 차례대로 군대를 이끌고 돌아가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위연이 크게 노해, 양의가 채 출발하기 전에 영솔하던 부하들을 데리고 지름길로 먼저 돌아가, 가는 곳마다 각도(閣道)를 불질러 끊어버렸다. 위연과 양의는 서로 반역한다는 표를 올렸는데, 하루 동안엔 급한 격문이 교대로 (조정에) 이르렀다.
후주(後主;유선)가 시중 동윤(董允)과 유부장사(留府長史) 장완(蔣琬)에게 물으니, 장완과 동윤은 다같이 양의를 보장하고 위연을 의심하였다.
양의는 산의 나무를 찍어 길을 통하게 하는데, 밤낮으로 겸하여 행군해, 또한 위연의 배후와 이어졌다. 위연이 먼저 도착해 남곡구(南谷口)를 차지하고, 병사를 보내 양의 등을 역습케 하니, 양의 등은 하평(何平)에게 앞에 서서 위연을 맏도록 했다.
하평이 위연을 꾸짖으며 먼저 올라가 이르길 공(公; 제갈량)께서 죽어 시신이 아직 채 식지도 않았는데, 너희들이 어찌 감히 이렇게 하는가!라 했다. 위연의 군사들은 잘못이 위연이 있음을 알고, 명을 따르는 자 없이 온 군대가 다 흩어졌다. 위연이 그의 아들 여러 명과 도망쳐 한중으로 달아났다.
양의가 마대(馬岱)를 보내 그를 추격해 참수토록 하고, 그의 머리가 양의에게 보내지니, 양의가 일어나 그 머릴 밟고 말하길 이놈아[원문은 庸奴인데 정확한 뜻은 모르겠지만, 대단한 경멸적인 호칭입니다], 다시 잘못을 저지를 수 있겠느냐?라 했다. 마침내 위연의 삼족을 주살하였다.
처음, 장완은 숙위하는 여러 군영을 이끌고 난이 벌어진 북으로 달려갔으나, 수십리를 가서 위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내 돌아왔다.
본래 위연이 북으로 위에 항복하지 않고 남으로 돌아오려 한 뜻은, 단지 양의 등을 제거해 죽일려고 한 것 뿐이다. 평소 여러 장수들과 (생각이) 같지 않았으며, 당시의 여론(時論)이 응당 (자기가) 제갈량을 대신하게 하기를 바랬지, 본래 이와 같이 해서 바로 배반하려 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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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부분에 딸린 주석이 재미있어 소개합니다.
[주석]
위략[魏略; 흔히 부여나 고조선에 신화얘기 할 때 나오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위략 그것입니다]에 이르길 『제갈량이 병들었을 때. 위연 등에게 말하길 내가 죽고 난 후에, 다만 삼가고 지킬 뿐이지, 다시는 (원정하러) 오지 말라고 했다. 위연에세 자기의 일을 대신 행하도록 하고, 은밀히 상여을 지켜 가게 하였다. 위연이 끝끝내 이를 숨겨오다, 포구(褒口)에 이르러서, 이에 발상(發喪)하였다. 제갈량의 장사 양의는 오래전부터 위연과 불화(不和)하였는데, 위연이 군대 일을 대신 행하는 것을 보고, 자신이 해를 입을까 두려워 위연이 군대를 들어 북(위)으로 붙으려 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위연을 공격하였다. 위연에게는 본래 이런 마음이 없어서, 싸우지 않고 달아났는데, (양의가) 추격하여 그를 죽였다.』
신 송지(松之)[삼국지에 주를 단 사람이 송나라의 배송지(裵松之)입니다]는 이것이 적국에서 전해들은 말이라고 여겨, 부득이 본전(本傳;위연전)과 함께 다퉈 살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