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그당시는 사무라이의 시대 입니다
센리큐는 그냥 차마시는 사람에 불과할정도 인데 히데요시가 인정해 주고 같이 좀 놀아주면서 유명해 졌죠
그런데
그당시 최강자인 히데요시가 센류큐와 차를 마시는 자리에 어떤 영주나 무장이 있다고 치면
순한 양이 되어야 합니다
안그럼 영지를 몰수당하겠지요
그러니 센리큐의 권한과 말이 쎄진겁니다
그럼 센리큐를 왜 히데요시가 인정해주고 다실을 차려줬냐는 겁니다
그건 싸움밖에 모르는 무사들을 다루는데 요긴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화가 있는데 이런 문화를 몰라서야 하는가? 촌민아닌가? 이것이 교토 오사까에서 유행하는것이다 라고 정의 되어 버린겁니다
그러니 영주며 호족이며 따라하게 되는거죠
센리큐는 히데요시에 의해 죽임을 당했는데 히데요시에 의해 다도가 일본에 퍼진겁니다
그러나 실상은 무식한 농군의 후손인 히데요시가 잘난 영주들을 제압하고 딴생각을 품게(전쟁을 하지 말게) 하려고 만든 겁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차먹는데 예절을 만들고 맘가짐을 만들어 다도 라는 허왕된 족쇠가 만들어 진겁니다
그냥 차는 마시면 됩니다 굿이 예절과 몸가짐을 맘가집을 할 필요 없습니다
일본 전국시대 상류층의 윤리적, 도덕적인 가치가 예절의 형태로 드러난게 일본의 다도입니다. 지금이야 그런 가치가 퇴색된지 오래니 굳이 다도를 지키면서 차를 마실 필요는 없지요. 전통주의자라면은 조금 이야기가 다르지만요. 한국의 다례는 조선시대 이후에는 불교 의식과 함께 행해진 터이라 행위적 의미에 불교적 가치가 많이 들어가 있지요. 조선시대 선비들이 불교적 가치에 호의적일리는 없으니 다례를 그다지 지킬 필요도 없었구요.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가 조선은 최상급의 차품종이 있는데 왜 제대로된 차문화가 없냐고 선조에게 물어봤을 정도니.. 그나마 귀양시절 초의선사와 교류가 있던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선생 정도가 다례를 지키면서 차를 음미했다는 기록이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