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0년(세종 32) 예겸(倪謙)은 명 경제의 즉위를 조선에 알리러 왔다.
예겸이 조선 사신단의 정사(正使)로 선발된 이유는 그가 당대의 동료들로부터 유학과 문장에 탁월한 능력을 지닌 일류의 ‘문학지사(文學之士)’로 평가 받았고 관직이 황제의 최측근인 한림원시강(翰林院侍講)으로 한중 관계를 잘 조정할 수 있는 인물로 기대되었기 때문이다.
예겸이 사신으로 조선에 파견되기 전에는 주로 환관들이 조선에 사신으로 와서 온갖 횡포를 부렸기 때문에 문학지사의 조선 파견은 조선에서는 더욱더 갈망하던 일이었다. 이로 인해 예겸의 출사 소식은 조선을 긴장시켰고, 당대 최고의 문학지사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에게 그들을 맞이하게 하였던 것이다.
예겸을 맞이한 조선의 원접사 정인지, 성삼문, 신숙주
정인지, 성삼문, 신숙주는 세종의 총애를 받았던 집현전 출신 관료들로서 당시 정인지는 55세, 신숙주는 34세, 성삼문은 33세였다. 명의 사신 예겸은 36세였다. 예겸이 조선의 국경에 들어온 후 기행시는 여러 편 지었으나, 조선의 접반사와 시를 주고받은 것은 성균관 선성묘(宣聖墓)에 참배한 이후부터였고 양자 사이에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여러 차례 시를 주고받았던 것이다.
시를 주고받은 초기에는 서로에 대한 탐색과 미묘한 대결 구도가 펼쳐졌으나 시일이 지나면서 서로에 대한 정을 쌓으며 상대에 대한 문학적, 인격적인 존경심을 나타내며 헤어질 때는 서로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예겸은 정인지에 대해 “그대와의 하룻밤 대화는 10년 동안 책을 읽는 것보다 낫다.”라고 말하며 감탄하였고 자신과 나이가 비슷했던 신숙주와 성삼문을 사랑하여 형제의 의를 맺기까지 했다고 성현(成俔)의 [용재총화(?載叢話)]에 언급되어 있다.
성삼문(왼)과 예겸의 글씨(오)
신숙주(왼)와 예겸의 글씨(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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