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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4-29 19:55
왜놈들이 팔만대장경에 목맨 사연
 글쓴이 : 귀요미지훈
조회 : 1,837  

조선 건국 후 조선포로를 돌려보내고 대장경 인쇄본 2질을 하사받은 것이 계기.

기회만 있으면 대장경판 달라고 조름

포로 주고 대장경 달라, 코끼리 상납하고 대장경 달라, 토산품 바치고 대장경 달라,

인쇄본만 주고 대장경은 안 줌. 이런식으로 150년간 일본이 하사 받은 인쇄본이 587상자에 4,995첩이나 됨
(가장 오래된 인쇄본이 현재 일본에 있음)

대장경판 안 주니까 일본사신 단식투쟁.

결국 류큐(오끼나와) 왕국은 군대를 보내 대장경 약탈 시도

일제시대에도 일본으로 반출시도, 승려들의 결사반대로 무산

대장경은 2006년 유네스코 세계 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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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차례(태종, 세종대왕이) 대장경판 주려고 했으나 신하들의 강력 반발로 안 줬다는데
그 때 줬으면 지금쯤 팔만대장경은 일본의 문화유산이고 지들이 만들었다고 우기고 있을지도...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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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지 17-04-29 20:00
   
역시나 예전부터 염치도 없고, 개념도 없고..

저걸 주려고 했던 왕들은 또 뭐여? 억불정책의 일환인가?
     
귀요미지훈 17-04-29 20:02
   
유교의 나라라 별로 가치있게 여기지 않은 것 같더라구요.
태종&세종대왕이 별 쓸모도 없는데 줘버리자...라고 했는데 신하들은 이거 주면 나중에 더 큰거 달라고 할지도 모르니 주면 안된다고 반대
하이1004 17-04-29 20:03
   
팔만대장경이  팔만자라해서 팔만대장경인가요?
     
귀요미지훈 17-04-29 20:04
   
글자수가 아니라 경판의 수가 8만 1258판이죠.
그러니까 글자수는 어마어마하게 많겠죠.
완성하는데 16년 걸렸다고....
          
하이1004 17-04-29 20:05
   
아.. 감사합니다 어릴때 배운거 같은데 기억이 이제 나네요
퓨린 17-04-29 20:06
   
왜구들이 가져갔으면 지금처럼 잘 보관하지도 못했을꺼 같네요
     
귀요미지훈 17-04-29 20:08
   
아마 십중팔구 그랬을 것 같네요.
지금 대장경 상태가 그나마 양호한게 그 보관하는 건물이 바람이 잘 통하도록
기술적으로 잘 지었다고 하네요.
순대천하 17-04-29 20:11
   
6.25 때 팔만대장경이 불타 버릴뻔한걸 막은게 마지막 고비를 넘긴거죠.
     
귀요미지훈 17-04-29 20:12
   
해인사 폭격 명령에 불복한 그 분은 사형선고까지...ㄷㄷㄷ
이후 정상참작되어 천만다행이죠.
루드윅카겐 17-04-29 20:20
   
ㅋㅋ 일본놈들 팔만대장경 가질라고 이천도국,구류국이라는 가짜나라 만들어서 가져갈려고 한거보면....

거기가 무장군대까지 보낼려고 했죠.ㅋㅋㅋ

왜놈들은 진심 인간이 아닙니다.
전쟁망치 17-04-29 20:22
   
알고보니 막부의 류쿠정복은 근대가 아니라 이미 1600년대 군사를 보내어서
사스마번에 의해서 점령 되었다고 하더군요.

다만 그당시 조공을 받아 오던 청나라 사신들에게 이 사실을 들키까봐, 연기를 했다고 하더군요
청나라는 그 사실을 1800년대 중반 가서야 알아챘다고
그노스 17-04-29 20:25
   
세어 보니 대장경 달라고 30번 청구했네요.
빚독촉도 이것보다 심하지는 않았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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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실록 6권, 태조 3년 12월 26일 신묘 3번째기사 / 일본국 진서 절도사 원요준이 사신을 보내어 《대장경》을 구하다
이달에 일본국 진서 절도사(鎭西節度使) 원요준(源了俊)이 사신을 보내어 《대장경(大藏經)》을 청구하였다.

태조실록 9권, 태조 5년 3월 29일 병술 4번째기사 / 일본 좌경 권대부 다다량 의홍이 사신을 보내어 예물을 바치고 《대장경》을 구하다
이달에 일본국 좌경 권대부(左京權大夫) 다다량의홍(多多良義弘)이 보낸 통축(通笁)·영림(永琳) 두 선승(禪僧)이 와서 해적을 금지하고 노획한 사람들을 돌려보낼 것을 주달하고, 예물을 바치고 겸해서 《대장경》을 요구하였다.

태조실록 12권, 태조 6년 12월 29일 정미 4번째기사 / 일본 관서도 구주의 탐제 원도진이 사람을 보내어 예물을 바치고 《대장경》을 구하다
이달에 일본 관서도(關西道) 구주(九州)의 탐제(探題) 원도진(源道鎭)이 사람을 시켜 예물을 드리고 《대장경(大藏經)》을 구하였다.

태조실록 15권, 태조 7년 12월 29일 신미 5번째기사 / 일본의 육주목 다다량 의홍이 사람을 보내어 예물을 바치고 《대장경》을 구하다
이달에 일본의 육주목(六州牧)인 다다량의홍(多多良義弘)이 상국(相國) 대부인(大夫人)의 명령을 받아 중 영지(靈智)를 보내어 예물(禮物)을 바치고 《대장경(大藏經)》을 청구하였다.

정종실록 5권, 정종 2년 8월 21일 계축 12번째기사 /이달에 일본(日本) 준주 태수(駿州太守) 원정(源定)이 사람을 보내어 말 2필을 바치고, 잡혀 간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박다성(博多城) 승천선사(承天禪寺) 주지(住持) 은공(誾公)이 사람을 보내어 예물을 바치고 《대장경(大藏經)》을 청구하였고, 또 자운선원(慈雲禪院) 주지(住持) 천진(天眞)이 사람을 보내어 예물을 바치고, 잡혀간 인구(人口)를 돌려보냈다.

태종실록 11권, 태종 6년 2월 27일 무자 2번째기사 / 일본국왕이 《대장경》을 청하고, 구주 절도사가 포로와 토물을 바치다
일본 국왕 원도의(源道義)가 사신을 보내어 내빙(來聘)하고, 《대장경(大藏經)》을 청하였고, 구주 절도사(九州節度使) 원도진(源道鎭)이 사람을 보내어 토물(土物)을 바치고 부로(俘虜)를 돌려보냈다.

태종실록 14권, 태종 7년 9월 1일 신해 5번째기사 / 일본 다다량 덕웅의 객인이 대궐에 나아와 하직하니 《대장경》 1부를 주다
일본(日本) 대내(大內) 다다량덕웅(多多良德雄)의 객인(客人)이 대궐에 나아와 하직하였다. 《대장경(大藏經)》 1부(部)를 주어서 보내었으니, 덕웅(德雄)의 청을 따른 것이다.

태종실록 17권, 태종 9년 윤4월 26일 무진 3번째기사 / 일본 대내전에서 보낸 주정 등에게 《대장경》과 불구 등을 하사하다
일본 대내전(大內殿)의 사자 주정(周鼎) 등이 예궐하여 하직하니, 임금이 정전(正殿)에 나아가 불러 보고 위로하였다. 또 《대장경(大藏經)》 1부(部), 보리수엽경(普提樹葉經) 1엽(葉), 나발(螺鉢)·종경(鍾磬) 각 1개와 조사(祖師)의 초상과 나옹화상(懶翁和尙)의 화상을 특별히 하사하였으니, 덕웅(德雄)의 청구에 따른 것이었다.

태종실록 19권, 태종 10년 1월 28일 을미 6번째기사 / 일기주의 지주 원양희 등이 사람을 보내어 예물을 바치고 《대장경》을 청구하다
일기 지주(一岐知主) 원양희(源良喜)와 대언(代言) 원각진(源覺眞)이 각각 사람을 보내어 예물(禮物)을 바치고 《대장경(大藏經)》을 청구하였다.

태종실록 19권, 태종 10년 4월 28일 갑자 7번째기사 / 일본 초야뢰영 등이 토산물을 바치고, 일기지주 원양희가 《대장경》을 청하다
일본(日本) 초야뢰영(草野賴永)과 축주 태수(筑州太守) 장친가(藏親家)가 사람을 보내어 토물(土物)을 바치고, 일기 지주(一岐知主) 원양희(源良喜)가 사람을 보내어 장경(藏經)을 구하였다.

태종실록 21권, 태종 11년 5월 26일 병술 1번째기사 / 일본 구주의 강주 수 창만가와 사미 원영이 예물을 바치고 대장경을 구하다
일본국(日本國) 구주(九州) 강주 수(江州守) 판창만가(板窓滿家)와 사미(沙彌) 원영(源英)이 모두 사람을 보내어 예물(禮物)을 바치고, 《대장경(大藏經)》을 구하였다. 사미(沙彌) 불도(佛道)에 들어가 수행중인 중.

태종실록 22권, 태종 11년 7월 25일 갑신 4번째기사 / 일본 일기주의 원양희가 《대장경》을 구하다
일기 지주(一岐知主) 원양희(源良喜)가 사람을 보내어 예물을 바치고, 《대장경(大藏經)》을 구하였다.

태종실록 22권, 태종 11년 10월 21일 기유 2번째기사 / 일본 국왕 등이 《대장경》을 얻고자 토산물을 바치다
일본 국왕(日本國王)이 사신을 보내어 토물(土物)을 바쳤으니, 《대장경(大藏經)》을 구하고자 함이었다. 대내전(大內殿) 다다량 덕웅(多多良德雄)이 사자를 보내어 수레[輿]와 병기(兵器)를 바쳤으니, 또한 대장경을 구하고자 함이었다.

태종실록 22권, 태종 11년 12월 1일 정해 1번째기사 / 일본 국왕 사인 등에게 《대장경》 1 부를 주다
일본 국왕(日本國王)의 사신과 대내전(大內殿)의 사인(使人)이 돌아간다고 고하니, 임금이 경연청(經筵廳)에 나아가서 인견(引見)하고, "너희 왕이 양수(梁需)를 겁박하고 노략질한 도적을 끝까지 토벌할 뜻을 보이니, 내가 심히 기뻐하고 감사한다." 하니, 사인이 대답하였다. "우리 왕이 《대장경(大藏經)》을 구합니다." 이에 1부(部)를 주라고 명하였다.

태종실록 25권, 태종 13년 2월 30일 기묘 2번째기사 / 일기 지주 원양희의 사인이 예물을 바치고 《대장경》을 구하다
일기 지주(一岐知主) 원양희(源良喜)의 사인(使人)이 예물을 바치고, 《대장경(大藏經)》을 구하였다.

태종실록 25권, 태종 13년 6월 11일 무오 3번째기사 / 《대장경》을 일본국 축주 등공에게 보내주다
《대장경(大藏經)》을 일본국 축주(筑州) 등공(藤公)에게 보내니, 그 청함을 따른 것이었다.

태종실록 27권, 태종 14년 6월 20일 신유 1번째기사 / 일본 국왕의 사신인 중 규주의 등이 예물을 바치고 《대장경》을 구하다
일본 국왕(日本國王)의 사신(使臣)인 중 규주(圭籌) 등이 토물(土物)을 바치고 《대장경(大藏經)》을 구하였다.

태종실록 28권, 태종 14년 7월 11일 임오 2번째기사 / 《대장경》을 일본국에 보내고 《대반야경》을 규주에게 주다
임금이 대언(代言) 등에게 이르기를, "일본 국왕이 《대장경》을 구하니, 경판(經板)을 보내 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우리 나라에 경판(經板)이 적지 않으니 보내 준들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경외(京外)에 경 판(經板)의 숫자를 헤아려서 아뢰도록 하라." 하고, 또 말하였다. "이제 일본에서 《대장경》을 청하니, 이미 이루어진 물건을 ...

태종실록 30권, 태종 15년 7월 20일 을묘 4번째기사 / 일본 대내전이 사자를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대장경》을 청하여 이를 의논하다
사자(使者)를 보내 와서 토물을 바치었다. 사자가 《대장경(大藏經)》을 청구하기를 심히 간절히 하니, 예조 판서 이원(李原)이 아뢰기를, "본국에 오직 한 전본(全本)이 있으니 어떻게 대답하오리까?"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불법(佛法)은 비록 그 옳고 그른 것은 알지 못하나, 주면 후일에 자주 와서 청구할 것이니 잇대기가 어려울 것 이다. 마땅히 대답하기를, ‘이 경...

태종실록 32권, 태종 16년 8월 20일 기묘 1번째기사 / 대마도 종정무와 대내 다다량도웅이 《대장경》을 청하다
內) 다다량도웅(多多良道雄)이 사자를 보내어 《대장경(大藏經)》을 청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승록사(僧錄司) 중에게 말[馬]을 주어 《대장경》이 있는 곳인 충청도(忠淸道)·경상도(慶尙道) 각 사찰에 나누어 보내어 골라서 질(帙)을 만들어 주소서." 승록사(僧錄司) 조선조 초기에 불교에 관한 일을 맡아 보던 관아. 예조(禮曹)에 소속하여 절을 관리하고 ...

태종실록 34권, 태종 17년 9월 30일 임오 4번째기사 / 대내 다다량도웅의 사인이 예물을 바치다
대내(大內) 다다량도웅(多多良道雄)의 사인(使人)이 예물을 바치고 대장경(大藏經) 등 불경을 구하였다.

세종실록 7권, 세종 2년 1월 6일 을사 1번째기사 / 일본국 사신 양예를 맞이하여 《대장경》 1부를 주고, 화친을 다지다
이 무엇인가." 하니, 양예가 대답하기를, "《대장경(大藏經)》뿐이올시다." 고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대장경》은 우리 나라에서도 희귀하다. 그러나, 1부(部)는 주겠다." 하니, 양예가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 기를, "우리 나라에서 받은 임금의 은혜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고 하였다. 임금이 또 묻기를, "너희들이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말하라." "말로서는...

세종실록 10권, 세종 2년 12월 8일 임인 3번째기사 / 일본국 구주 도원수 우무위 원도진이 토산물을 바치다
일본국 구주 도원수(九州都元帥) 우무위(右武衛) 원도진(源道鎭)이 사람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치고, 《대장경(大藏經)》과 대종(大鐘)을 구하였다. 전평전(田平殿)과 원성(源省)도 또 도진의 인편을 이용하여 토산물을 바쳤다.

세종실록 14권, 세종 3년 11월 16일 을해 3번째기사 / 일본 구주총관 원의준이 공물을 바치고 대장경을 청구하다
일본 구주 총관(九州摠管) 원의준(源義俊)이 사람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치고 《대장경(大藏經)》을 청구하였으며, 평만경(平滿景)과 종금(宗金)도 또한 모두 사람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쳤다.

세종실록 18권, 세종 4년 11월 13일 병인 4번째기사 / 왜인이 토산물을 바치고 《대장경》을 청구하다
일본의 구주 도원수(九州都元帥) 원의준(源義俊)이 본국 황태후(皇太后)의 명령으로 사람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치고, 인하여 《대장경(大藏經)》을 청구하였다.

세종실록 18권, 세종 4년 11월 16일 기사 2번째기사 / 일본 국왕이 서간을 전하고 《대장경》을 청하다
서간(書簡)을 전하고 방물(方物)를 바치며 《대장경(大藏經)》을 청구하니, 그 글월에, "바닷길이 멀어 오래 소식이 끊어졌습니다. 이때 매우(梅雨)는 개고, 회풍(槐風)이 상쾌하게 불어오는데, 신령이 호위하여 존후(尊候)께서 만복을 받으시기를 삼가 바랍니다. 지난해 귀국(貴國) 사신이 우리 나라 에 왔을 때에, 그 때 국사(國師) 지각보명(智覺普明)이란 이가 있어 관(館...

세종실록 18권, 세종 4년 11월 26일 기묘 1번째기사 / 인정전에 나가 일본 국왕 사자를 맞이하다
"태후가 나에게 명하되, ‘새로 절[佛宇]을 짓고 《대장경(大藏經)》을 조선 국왕 전하께 청구하고자 하나, 그러나 나는 부녀(婦女)라 이 뜻을 친히 여쭙지 못하다가 지금 구주 절도사(九州節度使)가 조선국으로 더불어 화호(和好)를 통한다 함을 듣고 절도사(節度使)를 통하여 조선국에 이 뜻을 여쭈라.’ 하였습니다." 하고, 규주가 또 말하기를, "대마도 종정무(宗貞...

세종실록 18권, 세종 4년 12월 16일 기해 1번째기사 / 인정전에 나가 일본 국왕 사신을 인견하다
부쳐 보내겠으나, 태후(太后)가 청한 《대장경》도 또한 마땅히 청한 대로 하겠노라." 하니, 규주 등이 대답하기를, "신들이 《대장경》의 동판(銅板)이 있다는 말을 듣고 글월을 받들고 와서 이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하였사오니, 이것은 참으로 없는 것입니다. 이 뜻을 회서(回書)에 아울러 써 주시기 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알고 있다." 고 하였다.

세종실록 18권, 세종 4년 12월 20일 계묘 3번째기사 / 일본 회례사 박희중 등에게 옷 등을 하사하고 국서를 내리다
九州都元帥)를 시켜 귀한 선물을 보내 주시고 겸하여 《대장경》을 청하니, 또한 마땅히 좇아야 할 것이매, 지금 신하 전농시 윤(典農寺尹) 박희중(朴熙中)과 용양 시위사 호군(龍驤侍衛司護軍) 이예(李藝) 등을 보내어 가서 후의(厚意)를 사례(謝禮)하게 하오. 상세한 것은 별록(別錄)에 갖추었으며, 온 사신이 말한 《대장경》 동판(銅板)은 우리 나라에 없는 것이니 양해(諒解...

세종실록 21권, 세종 5년 9월 18일 병신 2번째기사 / 일본 전 총관 원도진이 대장경 청구하는 글을 예조에 올리다
에 글을 올렸는데, 그 글에, "우리 전하께서 전년에 대장경(大藏經)을 구하니, 귀국(貴國)에서 즉시 보내주신 은혜를 베푸셨으며, 또 내 자식 의준(義俊)이 존경(尊經)을 구할 때에도 역시 보내주신 은혜를 받자와 요행함이 지극하매 죄송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회례사(回禮使)는 4월 4일에 축주(筑州) 석성(石城)의 냉천진(冷泉津)에 닿았습니다. 보잘것없는 예(禮)는 별록(...
     
전쟁망치 17-04-29 20:29
   
은근히 일본국 세퀴들 조선상국을 놀리는 듯한 것도 있는거 같은 뭐 저리 많이 달라고 조르는건가
그것도 해적질한 인질 가지고

조선에 뭐 문화재 맡겨놨냐
          
그노스 17-04-29 20:38
   
이것도 세종때까지의 청구 횟수일 뿐...
최후가 명종때까지이던데 다 합치면 100~120번은 될 것 같습니다.
     
귀요미지훈 17-04-29 20:33
   
헉...징한 놈들.
예나 지금이나 몰염치하군요.
          
그노스 17-04-29 20:39
   
네, 아시다시피요.

그런데 현대 일본인들은 저런 사실들을 기억못하고 일본이 한국에 기술 원조했는니 어쨌느니만 얘기하니...
               
귀요미지훈 17-04-29 20:42
   
우리가 문명 전수 안 했으면 발가벗고 토인생활 했을 놈들이
참 말이라도 못하면...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