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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8-13 22:35
세계 최초의 함포해전 -고려의 진포해전
 글쓴이 : 생생지락
조회 : 1,415  

DISS님의
189602 근대적 해상 포격전의 시초가 이순신?  글에 대한 답글입니다.


아래는 KSCPP(한국의 정신과 문화 알리기회)에서 한국이 세계 최초 최고인 문화유산 70가지에 찾아내어 책을 전 세계로 펴고 있는데
고려의 진포해전은  세계 정상의 한국의 문화유산 70선 중 하나입니다 . 70가지 문화유산은 차차 올려드릴 계획입니다


진포해전: 세계 최초의 함포해전

 

- 세계 정상의 한국 문화유산 (25) -

 

 

서양 역사에서는 함포 해전을 근대 해전의 분기점으로 본다.

즉 1571년에 베네치아·제노바·스페인 연합함대가

튀르크 함대와 레판토에서 격돌한 레판토 해전을

근대 함포 해전의 효시로 평가한다.

레판토 해전 이후 함포가 장착된 함대로 해상권을 장악한 국가가

세계를 정복하게 되며, 역사의 주도권은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넘어갔다.

 

 

그런데 레판토 해전보다 무려 200년 앞서,

고려는 화포를 선박에 장착하여 적선을 격파하는 함포 해전을

세계 최초로 선보였다.

최무선이 개발한 화포를 장착한 함선 80척으로

왜구 500척을 격침시킨 진포해전(1380)이 바로 그것이다.

 

 

고려말 최대의 국가적 위협은 왜구였다.

우왕(재위 1374~1388)때만해도

왜구는 14년간 378회에 걸쳐 노략질을 한 기록이 있다.

거의 제 집 드나들듯이 드나들었던 것인데, 그 규모도 매우 커서

많을 때는 200~500척까지 무리 지어 몰려와 민가를 습격해

사람을 죽이고 곡식과 재물을 약탈해 갔다.

왜구가 이처럼 극성을 부린 까닭은

일본이 남북조로 갈려 70여 년간(1322~1392)내전에 휘말리면서

중앙 정부의 위력이 지방에 미치지 못하자

지방 호족들이 곡식과 재물을 획득하기 위해 해적을 조직하여

고려를 조직적으로 침탈했기 때문이다.

 

 

당시 왜구는 칼을 들고 벌이는 백병전에 능했으므로

재빠르게 적선에 다가가 기어오르는 보딩 전술에 치중했다.

이에 고려는 왜구가 침입하면 일단 그들을 육지에 상륙시켜놓고 공격하는

육전 위주의 전술을 펼쳤다. 그러나 계속되는 왜구의 침탈로

전국의 해안지방이 무인지경이 될 정도로 상황이 심각해지자,

마침내 고려는 왜구를 육지에 상륙시키지 않고

바다에서 그대로 격퇴하는 해전 위주의 전술로 바꾸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무선은 왜구의 배와 직접 접촉하지 않고

적선을 격파하는 방법을 연구했고,

이는 당시 세계 어느 곳에서도 생각하지 못했던 함포 개발로 이어졌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화약무기가 사용되었지만,

고려 말엽 무인들을 경시하는 풍조가 지속되면서

1308년에는 군기사(무기 제조 기관)가 폐쇄되었고,

1343년에는 훈련장마저 없앴다.

당연히 화약과 화약 무기제조기술도 사라지게 되었다.

왜구의 침탈이 극심한 14세기 말엽 고려는

이미 화약을 만드는 방법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고려는 처음에 중국에 화약을 보내주도록 요구했으나

중국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고려가 원하는 양에 훨씬 못 미치는 양을 보내왔다.

고려의 요청을 거절하자니 명분이 없고 달라는 대로 주자니 아까웠던 것이다.

고려 조정은 결국 국내에서 화약을 만드는 것이 최선책임을 절감하고

최무선에게 그 임무를 맡겼다.

 

 

당시 화약은 오늘날의 핵무기와 같아

화약을 생산할 수 있는 나라들은 그 제조법을 비밀에 부쳤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연구하여 만들어내는 방법밖에 없었다.

최무선은 우선 과거에 어떻게 화약을 만들었는지 문헌을 조사했다.

그리고 이전부터 염초에 반묘(유황)와 버드나무 숯(분탄)을 섞어

화약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유황과 분탄은 쉽게 구할 수 있었지만 염초를 만드는 방법을 알 수 없었다.

그는 화약을 만들기 위해 부엌 아궁이의 재나 마루 밑의 흙을

물에 타서 끓이는 등 수많은 실험을 거듭한 끝에

드디어 초보적인 방법으로 염초를 얻는데 성공했다.

그렇지만 화약을 대량 생산하기 위해서는

좀 더 간편한 염초 제조법이 필요했다.

그는 외국인들의 왕래가 잦은 벽란도에 가서

염초의 비법을 알고 있는 사람을 수소문했다.

마침내 중국인 이원(李元)을 만나

‘염초 자취법’이라는 화약 제조법을 알아냈다.

이것은 오늘날 흑색 화약(유연화약)과 같은 것으로

질산칼륨 75%, 유황 10%. 목탄 15%를 배합하여 만드는 화약을 말한다.

 

 

최무선은 화약을 이용한 무기인 화전과 화통 등을 만들어 실험한 뒤 자신감을 얻자,

화약과 각종 화약을 이용하여 무기를 만드는 화통도감을 설치하도록 조정에 건의했다.

1377년 고려는 드디어 화통도감을 설치하고 최무선을 제조관으로 임명했다.

최무선은 이곳에서 18종의 화약 무기를 개발했다.

 

 

이제 화포가 만들어졌으니 함선에 장착하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화포를 함선에 장착하는 것은 생각만큼 단순한 일이 아니다.

배에서 화포를 발사하면 배는 큰 충격을 받는다.

심한 진동으로 배가 뒤집힐 수도 있고,

설사 뒤집히지 않는다 하더라도 큰 진동과 흔들림은

배의 안정을 해칠 뿐만 아니라 화포의 명중률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실제로 훗날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의 함포 전술에

연전연패한 왜군은 서둘러 배에 화포를 장착했다.

하지만 크기가 작은 일본의 전선은 대형 화포의 발사 충격으로

배가 뒤집히기 일쑤였고, 흔들림이 심해

조선 수군에 비해 화포의 명중률도 현저하게 낮았다.

때문에 7년 동안의 전쟁 내내 왜군은 조선 수군을 상대로

한 번도 승리를 거둘 수가 없었다.

 

 

최무선이 고려 수군의 전선에 장착한 함포가

그 위력을 제대로 발할 수 있었던 것은

고려의 탁월한 조선술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고려 군선의 우수성은 1268년 원나라의 강제로

원나라와 고려 연합군이 일본을 원정할 때 증명되었다.

중국 사서인 <원사>에는 원나라의 왕운이

실패한 해전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태풍을 만나 파도 때문에 서로 부딪혀

크고 작은 우리의 함선들은 대부분 파괴되었으나

오직 고려의 군함만은 견고하여 정상적으로 전투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왔다.”

이 원정에 앞서 원나라는 고려에 군량미 3000~4000석을 싣고

바다를 건널 수 있는 배를 300척 만들도록 요구했다.

군량미가 3000~4000석이라면 현재 단위로 240~320톤(1석은 80kg)되므로

이 배의 수량은 400~500톤이 된다. 이런 배 300척을 고려는 4개월 만에 완성했다.

이보다 200년 뒤에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찾아 항해에 나설 당시

유럽은 150톤에 불과한 배밖에 만들 수 없었던 것에 견주어보면

1268년에 배수량 400~500톤의 배 300척을 단 4개월 만에 만들어낸

고려의 조선술이 얼마나 우수한 것인지 알 수 있다.

 

 

1380년 왜구들은 500척이라는 대규모의 함선을 이끌고 고려의 진포를 습격했다.

그 당시 왜선의 승선인원은 소함이 25명, 중함이 50명, 대함이 100명이었다고 하는데

이를 볼 때 상륙한 왜구가 중함을 몰고 왔다고 보더라도 그 수효는 3만에 이르는 대군이었다.

이 때 왜구가 노략하다 흘린 쌀이 서천-장항 근처의 들판에 3치(15cm)나 쌓였다고

<고려사절요>에 전하고 있으니 약간의 과장이 있는 표현이라 생각되나

왜구의 분탕질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왜구의 진포 습격을 전해들은 고려 조정에서는 나세 장군이 이끄는 전선 80여 척을 급파했다.

왜구의 500척 함선에 비해 80척은 턱없이 초라한 숫자였다.

그러나 고려 수군이 진포에 도착해 공격이 시작되자, 싸움은 싱겁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고려 수군의 화포는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고,

특히 로켓 무기인 주화, 유화, 촉전화 등이 적선의 함선에 깊숙이 날아가

500여 척의 선단을 순식간에 불태워 모조리 바다의 제물로 만들었다.

이것이 세계 최초의 함포해전인 진포해전(1380)이었다.

 

 

유럽에서 화포를 사용하여 해전을 벌인 것은

고려보다 무려 200년이나 늦은 1571년 10월 7일 아침,

베네치아·제노바·스페인 연합함대가 튀르크 함대를 격파한 레판토 해전이다.

 

 

진포해전 3년 뒤인 1383년, 왜구는 진포해전의 패배를 보복하기 위해

120척의 선단을 이끌고 남해로 침입하여 연안지역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고려에서는 정지 장군이 화포를 장착한 군함 47척으로 추격에 나섰고,

남해 관음포에서 화구를 쏘아 왜구의 배 17척을 불사르고 왜구 2400여 명을 섬멸했다.

이 해전에서도 최무선이 직접 참가하여 공훈을 세웠는데,

당시 그는 화포 운용의 책임을 맡은 것으로 전한다.

 

 

이 해전의 승리로 고려는 종래의 수세적인 왜구 토벌 작전에서

적극적인 작전으로 전환하여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1389년 경상도 원수 박위 장군을 앞세워 전선 100척을 이끌고 대마도 정벌에 나섰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고려 수군은 대마도 해안에 정박 중인 외선 300척을 격침하고,

왜구의 본거지를 철저히 파괴했으며, 인질로 잡혀있던 고려인 100여 명을 구출했다.

고려가 화포를 이용하여 진포 해전, 관음포 해전, 그리고 대마도 정벌 통해

왜구의 기세를 완전히 제압하자 고려-일본 간의 외교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당초 고려 조정은 1375년부터 거의 매년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여

왜국의 침입을 억제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일본 조정은 그때마다

중앙 정부가 왜구를 제압하기가 매우 어렵다며 방관의 자세를 취했다.

그런데 1380년대에 이르러 고려 수군이 왜구의 토벌전에서 승세를 잡자

일본은 빈번히 고려에 사신을 파견하고 방물을 바치거나 포로를 송환하면서

친선관계를 가지려고 노력했다. 고려 수군의 함포의 위력을 경험한 일본으로서는

고려 수군의 공격이 대마도에 그치지 않고,

일본 본토로 향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 깨닫고 두려워했음직하다.

아래는 KSCPP에서 펴고 있는 70가지 문화유산 파일 중 진포해전이 나오는 부분입니다^^

17.PNG

18.PNG

 

 출처    청우불교원 금강경독송회 다음카페 나라사랑방

             http://cafe.daum.net/diamondyouth/1fQ/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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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제국 17-08-13 22:41
 
동아게로
     
솔루나 17-08-13 22:55
 
별 상관은 없다고 봅니다.
고이왕 17-08-13 22:56
 
잘못된 사실입니다 함포전은 동로마제국군의 그리스불로 아랍함대와 싸운 것이 더 일찍이고 동아시아에서는 남송해군이 몽골군을 막기 위해서 함포를 선상에서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Requescat 17-08-13 23:19
 
그리스의 불은 함포가 아닙니다. 화염방사기에 더 가깝구요. 그리고 남송수군의 함포전은 바다에서
 진행된 해전이 아니고 강에서 진행된 수전이고 대대적으로 함포를 사용한게 아닙니다.  세계 최초의 함포해전은 진포해전이 맞습니다.
          
킹캡틴 17-08-14 06:25
 
정확한 지적입니다.
참고로 원이 고려와 함께 일본을 정벌하러 갔을때 함선에 함포를 설치했다는기록이 있습니다.
태풍에 전쟁은 못하고 끝났지만 이런 기록으로 볼때 진포해전 이전에 함선에 함포를 설치했던건 맞는걸로 보입니다.그리고 그 이전에 선상에 함포와 비슷한 무기로 싸운 기록은 있지만 그건 인명살상용이지 함선 격파용은아니었습니다.
함선 격파를 위한 함포설치는 고려가 최초입니다.
단, 역사기록에 의한 함선 함포 전투는 진포해전이 최초는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