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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9-19 14:39
한국전쟁 북한군 12사단 정치장교 여정(呂政) 수기 일부 (부제: 비열한 놈들)
 글쓴이 : toriny97
조회 :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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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동아일보에서 주간마다 연재한 한국전쟁 40주년기념 칼럼이 있어 소개해드립니다.

수기의 주인공은 한국전쟁당시 북한군 12사단 정치장교로 전쟁에 참가한 중국 항일빨치산출신 여정(呂政)씨로 이후 남한에 귀순하였던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1950년 5월에 민족보위성의 지시에 의해 부대 훈련에 변화가 생겼다. 우리 부대뿐아니라 전군의 훈련이 달라졌다. 정치학습은 주로 "미제국주의의 완전한 식민지로 전락한 남조선", "자본가와 지주의 착취밑에 허덕이는 남조선인민의 참상", "남조선을 해방하고 조국을 통일하여 국토를 완정하는것은 민족최대의 과업"등의 주제가 중심이 되었다. 군사훈련은 다른것들을 중지시키고 하전사들은 실탄사격훈련을 위주로 그리고 군관들은 남조선지도연구에 중점을 두고 38도선 이남의 지리를 연구하게했다.


6월 19일에 야전훈련을 한다면서 12사단 전 병력이 완전무장하고 원산을 떠났다. 간성에서 기차를 내려 거기에서부터는 도보행군으로 38도선을 끼고 있는 인제에 도착한 때가 6월 23일이었다. 이날 임해(林海)와 김광협(金光俠)이 인제에 왔다. 인민군 제 2작전조 군사위원이었던 임해는 정대대급이상의 간부회의를 소집해놓고 연설을 했다. 그때 이미 김책이 사령관, 강건이 참모장, 김일이 군사위원이었던 전선사령부와 김웅이 사령관, 김재욱이 군사위원인 제 1작전조(서북전선군단) 및 무정이 사령관, 김광협이 참모장, 임해가 군사위원이었던 제2작전조 (동부전선군단)가 조직돼었다. 서북전선군단과 동부전선군단은 전선사령부의 보조지휘소를 금천과 화천에 자리잡고 있었다.


임해는 연설에서 남조선을 해방하고 조국을 통일할 역사적 과업을 우리가 짊어졌기에 힘을 다해 이 영광스러운 과업을 수행하자고 호소하고나서 남북군사력을 비교 설명했다. 동부전선에는 우리 연대가 소속된 보병 12사단의 왼편에 보병 5사단, 오른편에 보병 2사단이 배치돼있고, 12사단에는 자동포대대를 포함한 모터지크부대가 배속돼있으며 서북전선에는 보병 1사단, 3사단, 4사단, 6사단과 105땅크여단이 배치돼있다고 했다. 그는 또 보병사단들이 야크기로 편성된 2개 공군연대의 공중지원을 받을 수 있는 반면, 적은 38도선에 2개사단이 배치돼있을뿐 전투에 추가할 예비대는 없으며 공군도 장갑부대도 없다고 했다. 뿐만아니라 아군은 38도선 경비를 담당하던 3개 38경비여단이 각각 보병 7사단, 8사단, 9사단으로 개편되고, 함북 회령에 있던 청년훈련소가 보병 13사단으로, 제 3군관학교가 전투부대로 편성돼 6월 25일 새벽 강원도 강릉일대에 상륙하여 적후로를 끊게 돼있다고 했다. 그러니 남북의 군사역량대비는 6:1인 셈이라며 이는 남침공격전투에 이상적인 역량대비라고했다.


임의 연설이 끝나고 12사단 정치부 부부장이 회의에 참석했던 정치간부를 따로 불러놓고 전쟁전의 정치동원사업과 전투진행중의 통보사업 긜고 조직선동사업에 대해 요구를 제가하고 나서 이렇게 덧붙였다.


"전쟁을 우리가 먼저 시작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미 지난 48년 황해도 은파산에서 남조선괴뢰군들이 쳐들어왔어요. 이번에는 우리가 쳐들어가지만 말이오"


6월 24일 남침공격대기지점까지 따라왔던 소련군 참모고문 쿠신소좌와 정치고문 포노마렌코소좌가 성공을 빈다며서 군관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 돌아갔다. 24일 아침부터 날씨가 흐리기 시작하여 비가 내리다가 저녁무렵에야 그쳤다. 어둠이 깃들자 대대별로 간단한 동원대회를 갖고는 38경비여단과 교방하여 38도선 전면진지를 차지했다. 소대장 중대장들은 별빛을 빌려 육안으로 적의 토목화점과 영구화점의 위치 그리고 산병선과 화력배치 및 지형의 특색등 제반정황을 38경비여단으로부터 인수인계받고 대대장이상 지휘관들은 지형지물외에 5만분의1 지도를 주고 받았다.


잠시 갰던 날씨가 새벽부터 다시 흐려지기 시작했다. 이슬비가 내리는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은 나뭇잎에 괴었다가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마저 또렷이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돌연 귀를 찢는듯한 포병의 준비사격포성이 산골의 정적을 깨뜨렸다. 이어 보병의 일제사격이 온천지를 뒤흔들었다. 오전 4시 30분, 포병의 계속된 준비사격의 포문들이 일제히 남측을 향해 불을 뿜는 가운데 우렁찬 만세소리와 함께 보병의 돌격이 개시됐다. 인제일대의 38도선에는 소양강이 흐르고 있어 산을 달려내려간 보병들이 차례로 강에 뛰어들었다. 제일 깊은 곳이 1m밖에 안되는 소양강을 단숨에 돌파하고 우리는 드디어 남조선땅을 밟았다.


*개전직전 북괴군 전방전개 위치 (남침공격대기지점)

제 6사단 (주둔지 사리원) -> 개성북쪽 계정 (개성동북방 18km, 금천 동남방 6km) / 6월 23일 도착

제 6사단 14연대 (주둔지 사리원) -> 해주, 죽천 / 6월 23일 도착

제 1사단 (주둔지 남천점) -> 구화리, 구화리 북방 4km / 6월 23일 도착

제 4사단 (주둔지 진남포) -> 연천 / 6월 21일 도착

제 3사단 (주둔지 평강) -> 운천 야미리, 신망리 동남방 6km / 6월 19일 도착

제 13사단 (주둔지 신의주) -> 금천, 적동산리 및 하길성리 / 6월 20일 도착

제 105땅크여단 (주둔지 평양) -> 연천 / 6월 22일 도착

제 203땅크연대 (주둔지 평양) -> 남천 / 미상

제 2사단 (주둔지 원산) -> 화천 / 6월 22일 도착

제 12사단 (주둔지 원산) -> 양구 대몰리 및 선수리 동남방 5km / 6월 23일 도착

제 5사단 (주둔지 나남) -> 양양 / 6월 20일 도착

제 15사단 (주둔지 회령) -> 김화 / 6월 25일 도착

독립전차연대 (주둔지 나남) -> 인제

제 12MTSP 연대 (주둔지 길주) -> 양양

제 766부대 (주둔지 회령) -> 원산, 간성

제 549부대 (주둔지 갑산) -> 성진

* 보병 제 10사단, 13사단, 15사단은 예비대로 신의주, 숙천, 화천등에 주둔


강을 건너 부상당한 국방군포로 2명을 심문하는 일을 처음 맡았다. 부대번호, 성명, 직급따위 질문에 대답하고 나서 포로가 말하기를 "국군참모총장의 명령으로 6월 23일부터 3일동안 장교휴가가 실시되어 중대장은 새로 개설된 용산육군장교구락부에 놀러가고 토요일인 24일 오후에 소대장들도 춘천으로 춤을 추러가서 중대에는 주번소대장만 남아 있다고 했다" 우리 인민군 전군의 이동이 남조선군대들에게 전혀 눈치채이지 않았던 것이다. 며칠후 남조선인민들에게 살포하라는 삐라가 수송돼왔다. 삐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성명이 실려있었다. "미제국주의자들의 사주하에 남조선괴뢰군은 38도선 전역에서 북침했다. 영웅적 조선인민군은 적의 공격을 물리치고 반 공격을 가하여...."


인민군 전군의 훈련을 남조선지형연구와 실탄사격에 집중시킨것이 5월 말이고 중대장에게까지 38도선 이남지대의 5만분의1 지도를 내준것이 6월초였다. 한편 6월 7일에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중앙위원회를 소집하여 남조선 정당 및 각 사회단체들에게 통일최고입법기관선출을 제의하는 등 평화통일 4개조항을 선포했으며 전군을 38도선 근방에 집결완료한 23일에는 평화통일사절단을 남조선에 파견해다. 김일성은 평화선전공세로 남침기습공격을 철저히 위장했던 것이다.


나는 부대를 따라 강원도 현리, 홍천, 횡성, 원주를 거쳐 충북 제천을 지나 매포리에서 남한강을 건넜다. 단양을 지나 죽령고개를 향해 전진할때 적 105mm 야포공격에 파편상을 입어, 부대장은 나를 야전병원에 후송하려했으나 나는 부대를 떠나지 않았다. 죽령을 넘고 경북 풍기군을 거쳐 영주읍을 벗어날때 다시 적 포사격에 한차례 부상을 입었지만, 병원에 후송되기를 거정했다. 항일 빨치산으로 중국에 있다 조선에 돌아온 이후 나는 김일성수령에게 무한히 충실한 정치간부가 되있었다.


이후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긴 끝에 전쟁은 1953년 7월 휴전이 되었고 그해 10월 김일성은 평양광장에서 인민군 열병식을 진행하며 조국해방전쟁승리를 자축하며 영웅칭호를 받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수 많은 인민군 전쟁유훈자들에게 훈장을 주었다.


개전 당시에는 북조선의 모든 신문에 남조선 점령지가 실려 어디까지 해방시켰는지 확인을 할 수 있었으나, 휴전이후에는 군사분계선이 어떻게 설정됐는지 일반주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대학생들, 심지어 군인들조차 몰랐다.


우리는 옹진반도의 구불구불한 해안선과 개성시를 차지했다. 반면에 우리는 경기도 연천, 강원도 철원군, 화천군, 금화군, 창도군, 간성군, 인제군, 양양군등을 잃었다. 군사분계선은 금강산의 바로 밑에 그어졌고, 장산곶에서 바라보이는 백령도도 남측으로 넘어갔다. 당시 군사분계선에 대해 누가 물어보면 나는 "이제 지도가 출판되면 알게 될것 아니오" 하고 넘겨버리거나 "아무튼 옹진반도의 전부와 개성을 우리가 차지했다 개성이 어떤 곳인지아오. 고려왕조의수도였소. 그런 곳을 우리가 차지했단 말이오. 우리도 강원도의 작은 부분을 내주긴 했지만, 그곳은 쓸모없는 산간벽지요" 라고 응수하곤했다. 그러면서도 마음한 구석이 씁쓰레한것은 어쩔수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조국해방전쟁의 책임을 덮어씌울 누군가가 필요한 김일성은 첫번째 희생양으로 이승엽과 박헌영을 지목했고, 둘다 처형된 후에 나도 1959년 종파사건에 휘말려 10년간 옥살이를 했다. (중략)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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