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의 선포때나 동학농민운동 때는 이미 국력차이가 너무 많이 벌어진 상황 아닌가요? 그거 뒤집을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대체역사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같은 인물이 있지 않은 한 독립국으로 유지되기가 정말정말 어렵지 않을까 싶은데요.
제가 왜 임진왜란을 언급했느냐 하면, 왜란이 끝나면서 사회혼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선조를 포함한 지배층들이 왜란 발생의 실수를 감추고 정당화하면서 유교가 유교탈레반화(이런 표현을 써도 되는지 모르겠지만요)되기 시작한 시기라고 생각하거든요. 예를 들어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는 인식, 노비들은 주인이 때려죽여도 문제가 안된다는 인식, 기타등등 우리가 유교를 생각할 때 안좋다고 생각되는 거의 대부분의 정책? 개념?등이 왜란 이후에 생겨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새로운 나라가 만들어져서 왜란 이후의 사회 혼란을 바로잡는 형태로 갔으면 훨씬 좋은 방향의 역사가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건 영조의 왕비간택에서 나왔던 어떤꽃이 가장 아름답느냐 라는 영조의 질문에 "목화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왜냐면 백성들이 옷을 해입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라는 대답에서시작된 비극으로 이말은 정순왕후가 한 말 인데 사실 이 사건도 좀더 이전으로 돌아가면 나비효과로 발생된 일로 엄동설한에 태어나자마자 얼어죽을뻔한(후에 정순왕후가 된) 간난아기를 구한 이사관에서 부터 출발했습니다. 정순왕후는 영조의 왕비간택에의해 왕비가되어 국모가 되었으며 웃기게도 사도세자가 죽은 원인중 하나도 이 정순왕후에게 있음. 이 사도세자 사건으로 인해 정순왕후와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의 사이도 점차 벌어지게 되었고 정조가 죽고 순조가 왕위를 잇게되자 그때부터 정순왕후의 본색이 제대로 들어나기 시작함. 정순왕후의 악행으로 가장 유명한게 카톨릭의 탄압이며 이로인해 수많은 카톨릭 교인이 순교당함(그리고 이게 신미양요의원인이됨). 애초에 목화가 백성을 따뜻하게 해주므로 가장 아름답다 라는 말로 심금을 울렸던 이 여자가 이나라를 온갖 악행과 기행에 결국은 홍경래의 난이라는 사건까지 일어나게됨.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기전 정순왕후의 악행은 극에 달했고 그뒤 정순왕후가 죽고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이 권세를 휘두르기 시작하는데 이때부터 안동김씨세상이되고 모든 요직을 안동김씨가 차지할 정도로 나라가 부패하기에 이르렀음(정도가 얼마나 심했는지 현감이 부임하면 기념 비석을 세워주는데 그 글귀가 이랬음 .今日送此盜= 오늘도 도둑이오는구나 이걸 본 부패현감이 그걸 보고 글귀를 덧붙임. 明日他盜來= 내일도 도둑이 올것이다 此盜來不盡 그리고 도둑은 끊임없이 올것이다). 매관매직은 기본이오 온갖 뇌물에 지역차별까지 이중에서 가장 피해를 본게 북방계였는데 특히 북쪽출신을 천대함이 극에다르고 이런 지역적 차별에 분노한 홍경래가 조선을 뒤엎어 버리자 라는 분노에서 시작되었음.
홍경래는 원래 일종의 천재였으며 상당한 기량을 가진사람이었다고 함. 하지만 그도 북쪽출신이라 안동김씨의정부에 의해 천대를 받는데 분노했고 나라가 잘못됨을 한탄하여 결국 반역에 이르는데 이를 가장 크게 도와준 사람이 바로 우군칙과 이희저 홍봉희였음. 특히 그중 이희저는 어마어마한 갑부로 홍경래의 반란에 가장 큰 힘을 보탠사람으로 모든 군자금을 홍경래에게 투자했고 홍경래는 이자금으로 민중을 끌어들여 군사훈련을 하는등의 반란을 준비함.....뭐 뒷이야기의 결말은...결국 반란은 실패하고 홍경래는 죽었다 이게 결말
홍경래의 난이 성공한거랑 일제 강점기가 발생한거랑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일제 강점기는 미국에 의해 일본이 쇠국정책이 강제로 열렸을때 일본은 미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의 기술을 배워 나라를 강하게하는 정책을 취했고 물론 일본 내부적으로는 전쟁아닌 전쟁이 벌어졌고 이 시기가 메이지유신임. 반면 우리나라는 당시 중국만을 바라보며 다른나라의 사람은 사람으로 취급하지도 않았던 시기임. 그러다가 미국이나 프랑스의 신미양요나 병인양요가 벌어지기도 했고(프랑스는 카톨릭을 탄압하지말라라는 지들 나름대로의 명분은 있었지만 우리가 듣기에는 개소리에 불과함 미국의 경우...남의나라에 함부로 들어와서 지 족대로 측량작업등을 하는 개짓거리를 하니 조선이 빡치는건 당연....물론 이후에온 미국에게 개판으로 깨졌지만...흥선대원군이 집권하게되자 이 쇄국정책을 더 단단히했음 즉 갈라파고스처럼 고립되어 국제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모르고 공자왈 맹자왈 하다가 깨진것임. 나중에 고종이 집권할때 해외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지만 이미 늦음(뭐 사실 그래봐야 십몆년 차이지만...) 그때는 이미 일본은 모든 침략 준비가 끝난상태였음. 즉 우리나라도 중국만 바라보지 말고 해외에 눈을 돌리고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어서 배웠어야했는데 그걸 못했다는게
님이 말하는 "역사를 너무 모르는" 사람의 말이라는겁니다. 아시겠어요?
본문에서 말하는 일본의 끝없는 내란이라는게뭔가요? 덴노가 쇼군의 권력을 모두빼앗은 시기인 메이지유신의 전쟁은 그다지 오래가지 않았음. 그 이전에는 쇼군의 중앙집권형 권력을 가지는 봉건제도였고 본문에서말하는 끝없는 내전은 당시의 메이지유신을 빼면 300년전(전국시대)의 일임. 메이지유신을 통해 덴도가 권력을 잡고 미국과 프랑스등과 통상개방을 시작하면서 일본의 세력은 급속도로...한마디로 미친놈처럼 강해지기 시작했음.. 홍경래의 반란이 성공해서 권력을 잡았다 하더라도 과연 그가 외국과 통상개방을 했을지는 의문임. 말이 정의지 사실상 사사로운 감정에서 시작된 반란이었기에 아무리 그가 천재였던들 반란의 명분이 많이 부족한것도 있고 그 권력의 탈취를 외국(중국)이 인정했을지도 의문임. 물론 중국은 타인에 의해 왕권이 교체한다는걸 인정함(서양에서는 말도안됌 왜냐면 서양에서 왕의 위치는 지방세력의 싸움을 막기위한 역할로써 오로지 혈통만을 인정받음)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반란의 명분도 부족하고(차별당했다가 이유니) 반란에 성공했다하더라도 그가 중국과의 교역을 버리고 타국과 손을 잡을지는 아니 사실 불가능함. 왜냐면 당시 조선의 모든 사회개념은 중국에서 받아들인게 너무나도 많았기때문.
내가 그냥 님이 너무 모른다고 하면 그래 그런말을 할수도 있지 라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같잖은 메퇘지가 시비를 거니 이렇게 상세하게 쓴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