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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5-06 19:11
이쯤해서 다시보는 90년대 1차 북핵위기
 글쓴이 : 누운사람
조회 : 460  

북미 핵대결 1부   |시사 및 스크랩
 
아이디어 | 조회 464 | 08.07.23 14:58 http://cafe.daum.net/chooshin/KfvO/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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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 소련이 붕괴되고 냉전이 해체되었다. 냉전은 미국의 승리로 막을 내리고 자본주의의 영원한 승리가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이제 북한만 제거하면 성조기는 영원히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그해 미국이 핵개발을 문제 삼으며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을 요구하자 북한은 한국에 배치된 미국의 핵문제를 동시에 거론하였다. 1990년 11월 16일 유엔 주재 북한 대사는 주한민군 핵무기도 동시사찰하면 국제원자력기구의 핵사찰을 수락하겠다고 말했다.


“북한 외교관은 1990년 국제원자력기구 총재단 미팅에서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에 서명한 것은 남한의 미 전술핵과 미국의 핵우산이 제거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고 말한 적도 있어다. 그것이 충족되지 않을 경우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 조약 사항을 지키지 않겠다고 했다. 그 같은 말은 반대로 해서하면 미국이 남한에서 전술핵을 철수할 경우 더 이상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 사찰을 지연할 명분이 없게 된다는 논리가 성립합니다.”

마이클.J.마자르 [북한핵 뛰어넘기]


“핵사찰 문제를 들고 나와 우리에게 부당한 압력을 가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조선반도를 비핵지대, 평화지대로 만들려는 것은 우리의 일관한 입장입니다. 우리는 핵무기를 개발할 의사도 능력도 없으며 공정성이 보장되는 조건에서는 핵사찰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는 것을 한 두 번 만 천명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한다면 하는 것이고 안한다면 안하는 것이지 결코 빈말을 하지 않습니다.”

김일성 [1992년 1월 1일 신년사]


과연 부시(현부시의 아버지)가 김일성의 말을 믿을 수 있었을까? 물론 믿지 않았다.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겠다며 안전조치협정에는 서명하지 않는 북한의 태도는 미국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미국의 불안과 공포가 한계점에 도달하고 있던 시점에 북한은 자신들의 요구사항들을 내놓았다. 북한은 부시정부에 팀스피리트훈련 중지, 남북미 3자회담, 한국에서 핵무기철수, 주한미군 철수, 핵불사용을 약속하라고 요구했다. 이중 3가지는 핵확산금지조약에 가입한 핵보유국의 의무사항이다. 그리고 미국에 대한 동시사찰을 국제원자력기구에 요구한다. 북한의 핵시설을 보여줄 테니 주한미군의 핵무기도 보여 달라는 것이다.

 

이러한 북한의 요구는 매우 정당한 것이었다.

핵확산금지조약의 의무는 비핵보유국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핵보유국들도 그에 상응한 의무를 가지고 있다. 핵보유국은 무엇보다도 비핵보유국을 핵무기로 위협하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한반도에는 어떤 핵무기도 존재하지 말아야 하며 핵전쟁훈련은 더 더욱 용납될 수 없다. 팀스피리트훈련은 세계 최대 규모의 핵전쟁훈련이었다. 따라서 당시 핵확산금지조약을 위반하고 있던 것은 북한이 아니라 미국이었다.

 

미국과 국제원자력기구는 매우 난처한 상황에 몰리고 있었다. 북한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는다면 북한의 핵활동을 감시할 수 없고 북한의 요구를 들어주면 미국은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북한 앞에서 바지를 내리는 수모를 당해야 한다. 부시는 북한의 핵문제를 시비 걸려다가 오히려 50년동안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던 미국의 한반도 핵문제가 도마 위에 오른 것이다.

 

결국 부시는 북한과의 교섭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1991년 9월 27일 부시는 “한국에서 지상 및 해상 발사 단거리 핵무기를 모두 철수”한다는 전술핵무기철수선언을 발표한다. 그리고 92년 1월 6일 팀스피리트훈련을 중단하였다. 미국의 태도 변화를 확인한 북한은 92년 1월 30일 안전조치협정에 조인하였다. 그리고 4월 5일 북한의 최고인민회의는 이를 비준했다. 92년 9월에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했고 같은 해 12월 13일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남북한이 ‘비핵화 공동선언’을 합의함으로써 한반도 비핵화와 항구적인 평화를 위한 발판이 마련되었다.

 

북한이 안전조치협정을 비준함에 따라 국제원자력기구는 92년 5월말부터 12월까지 5회에 걸쳐 북한의 영변 핵시설을 사찰했다. 사찰을 통해 국제원자력기구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은 오히려 미국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공식사찰이 끝나자 미국은 북한을 믿을 수 없다면서 특별사찰을 요구하였다. 미국의 특별사찰 요구는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국제원자력기구는 미국의 요구를 앵무새처럼 북한에 전달하였다. 당연히 북한은 반발했다. 북미대결은 서서히 불이 붙기 시작하고 있었다.

1993년 1월 20일에 취임한 클린턴은 부시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악의제국을 무너뜨린 세계 유일의 대제국이 동방의 작은 나라 앞에서 쩔쩔매는 이유를 그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집권초기 전임자들보다 강경한 대북정책을 선택하였다. 클리턴 정부는 특별사찰을 수용하지 않으면 선제공격도 불사하겠다고 북한을 압박하였다. 그리고 92년 중단되었던 팀스피르트훈련을 재개한다. 클린턴의 무모한 야심 덕분에 채 일 년도 안돼 북미합의는 물거품이 되었다.

 

클린턴정부는 북한에 미신고한 영변의 2개 기지에 대한 특별사찰을 요구했다. 미신고 시설에 대한 특별사찰은 유래가 없는 것이었다. 미국이 군사력으로 압박하며 특별사찰을 요구하자 북한은 팀스피리트훈련이 시작되는 시점에 맞춰 93년 3월 9일 준전시상태를 선포하고 3월 12일 핵확산금지조약을 탈퇴하였다.

 

당시 세계 유일의 초대국을 자처하는 미국과 핵전쟁을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어려운 일이다. 소련붕괴이후 미국의 독주를 막을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었다. 동구사회주의의 몰락으로 당시 북한은 고립무원의 상황에 놓여 있었고, 세계 어디에도 북한을 도와줄 나라는 없었다.

북한은 미국에 사전 통보하고 1993년 5월 29일부터 사흘간 모두 3기의 미사일 시험을 단행한다. 그 중 두 발은 하와이와 괌 앞바다에 떨어졌다.

 

클린턴정부는 경악하였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 이래 미국은 본토가 공격당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적 없다. 결국 클린턴도 공화당의 전임자들처럼 무릎을 꿇었다. 대화 외에 미국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없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 직후인 6월 2일 뉴욕의 유엔 주재 미국대표부에서 제1차 북미고위급회담이 개최되었다. 북한 측 수석대표는 강석주 외무성 부상이었고 미국 측 대표는 로버트 갈루치였다.

당시 미국은 시간에 쫓기고 있었다. 북한이 3월 10일 핵확산금지조약 탈퇴를 선언했기 때문에 유예기간 60일이 되는 6월 12일에는 탈퇴가 확정되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늦어도 6월 12일 전까지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회의 첫날 갈루치는 느닷없이 북한 측에 대해 다음과 같은 엄포성 발언을 내뱉었다.

“핵확산금지조약 탈퇴를 취소하십시오.

3일 이내에 취소하지 않으면 무력행사 카드를 배제하지 않겠습니다.”

한마디 내뱉은 그는 벌떡 일어서서는 회의장에서 나가려 했다.

순간적으로 화가 치민 북한 측 대표 한 사람이 갈루치에 볼펜을 집어 던졌다.

그러자 갈루치가 멈칫 했다.

그 즉시 강석주는 이렇게 받아쳤다.

 

“이해하십시오. 오늘은 여기서 회의를 마친다고 발표합시다.

3일 후에 양국이 서로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을 한판 벌려 봅시다.”

볼펜은 갈루치에게 명중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갈루치도 등골이 오싹했던 모양이었다.

 

당황한 갈루치는 이렇게 답했다.

“아닙니다. 이 회의는 평화를 위한 회의입니다.

 

절대 깨지면 안 됩니다.”

김명철 [김정일 한의 핵전략]


결국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 탈퇴 시한을 하루 앞 둔 6월 11일 북미공동성명이 채택되었다. 클린턴은 왜 공화당의 전직 대통령들이 동방의 작은 나라 앞에서 쩔쩔맸는지 마침내 알게 되었다.

이후 북미회담은 계속되어 1993년 10월 14일 미국은 팀스피리트훈련을 취소하고 북미 외교관계 수립 문제를 논의하였다. 그리고 1994년 2월 15일 북한은 미국이 원하는 7개 핵시설에 대한 사찰을 수용하였다. 모든일이 원만하게 해결되는 듯 했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에 대한 적대정책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94년 3월 개최하기로 한 북미고위급회담을 일방적으로 거부하고 팀스피리트 훈련을 재개하였다. 또다시 전쟁의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 정부는 북한에 쩔쩔 매고 있는 클린턴 정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미국은 그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다. 김영삼은 서독처럼 한국이 북한을 흡수하게 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이 그렇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미국이 겉으로는 대화를 하고 있지만 본심은 다르다고 판단했다. 94년 3월 미국은 팀스피리트훈련 중단의 전제 조건으로 남북 특사교환이라는 엉뚱한 카드를 내밀었다. 김영삼이 끼어든 것이다. 결국 미국은 3월 11, 12일에 예정되어 있던 북미고위급회담을 취소하고 팀스피리트훈련을 재개하겠다고 북한을 위협하였다. 결굴 3월 19일 남북회담이 개최된다. 김영삼은 판문점에서 클린턴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 주기로 작정하였다. 당시 한국 측 대표는 남북회담의 의제도 아닌 핵문제를 회담자에 끌고 나왔다. 남측대표는 “핵문제가 조속히 해결되지 않을 경우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 모른다”고 말하면서 팀스피리트훈련을 재개할 것이라고 북측 대표를 위협하였다. 이에 대해 북측의 박영수 대표가 “서울 불바다” 발언으로 응수한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애초 이 회담은 비공개로 합의되었다. 그런데 한국정부는 회담 장면을 녹화한 후 전후 맥락은 누락시키고 박영수대표의 “서울 불바다”발언을 교묘하게 편집하여 언론에 공개하였다. 불바다 발언은 마치 북한의 선전포고처럼 들렸기 때문에 한국은 발칵 뒤집혔다. 보수언론들은 대대적인 반북캠페인을 조직하였다. 북한의 호전성을 규탄하는 보도물이 홍수를 이뤘다. 난데없는 라면사제기 열풍이 한국을 강타하고 북한이 곧 밀고 내려 올 것만 같은 긴박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이제 두 번째 조연인 국제원자력기구가 등장할 차례였다.

북한이 1994년 5월 12일 영변의 5MW급 원자로 핵연료봉을 교체하기 시작했다고 국제원자력기구에 통보하였다. 폐연료봉을 교체하지 않을 경우 체르노빌 참사와 같은 대형 핵누출 사고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북한은 규정에 따라 국제원자력기구 사찰단의 입회를 허용하였다. 5월 24일 국제원자력기구 사찰단이 평양에 도착하였다. 사찰을 마친 6월 6일, 국제원자력기구는 “연료봉의 추후 계측마저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이 원자로에서 핵물질 전용이 있었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 없게 됐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국제원자력기구 이사회는 6월 10일 대북제재 결의안을 채택했다. 그러나 북한은 3일 후인 6월 13일 외무성 성명을 통해 국제원자력기구 즉시 탈퇴를 선언했다.

이에 클리턴 정부는 영변 핵시설 폭격 계획을 수립하고 94년 6월 18일 개전을 결정한다.


94년 6월 한반도는 민족의 생존권이 벼랑 끝으로 몰리는 최악의 전쟁위기를 맞았다. 이미 미국은 6월 2일부터 매시간 단위로 한반도 상황을 점검하는 비상체제를 갖추고 인디펜던스 항공모함을 환태평양군사훈련에 참가시켰으며, 미 상원은 이미 퇴역한 고속정찰기 SR71을 복귀시켜 북한상공을 정기정찰하기 위해 1억 달러의 예산지출을 승인하고 예방폭격을 배제하지 않고 있음을 재확인하였으며, 미군 1개 사단 증파를 협의하는 등 군사적 대결상태를 준비해 나갔다. 또 존 매케인 상원의원 등은 “북한이 계속 버틸 경우에 대비해 핵시설에 대한 선제공격계획을 지금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언론이나 여론조사 등도 대화보다는 대결을 촉구하고 군사력 사용이라는 초강경 대결을 역설하였다.

강정구 [한반도 정쟁위기의 실상]


한반도 전쟁은 초읽기에 들어갔다. 94년 6월 16일 주한미사령관 케리 럭과 레이니 주한 미대사는 한국내 미국인들에게 대한 소개작전을 추진하기로 합의하였다. 럭은 자신들의 가족들에게 사흘 뒤인 일요일까지 한국을 떠나라고 했다.


하루는 보고를 받으니 내일 대사관 직원 가족들의 철수를 발표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이 전쟁 직전에 취하는 조처다.

남북에서 천만명에서 2천만 명이 죽을 것이다. 그 날 저녁 클린턴하고 32분 동안 통화했는데 대판 싸웠다.

김영삼 


클린턴은 당장 북한을 폭격이라도 할 것처럼 온갖 허세를 떨었지만 속으로 떨고 있었다. 미국은 북한을 쉽게 폭격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이미 93년 5월 북한 미사일의 미 본토 공격 능력이 확인되었고 전쟁시뮬레이션 결과 미군의 피해가 너무 크다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쟁의 마지막 절차로 6월 15일 지미카터를 클린턴의 특사 자격으로 평양에 파견했다. 개전을 하루 앞둔 6월 17일 김일성과 카터의 교섭이 극적으로 타결 되었다는 낭보가 백악관에 날아든다. 클린턴은 재빨리 움직였다. 6월 20일 북미고위급회담을 재개하고 경제제재를 요구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서한을 북한에 보냈고 24일 북미 양국 당국자들이 뉴욕에서 회담했다. 그리고 6월 28일 한국 정부는 7월 25일 김영삼이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과 회담할 것이라고 갑작스럽게 발표하였다. 전쟁전야의 한반도에는 갑자기 대화의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은 7월 8일 김일성의 급작스런 사망으로 결국 미뤄지게 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지도자 김정일 각하


각하 

나는 나의 모든 직권을 행사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제공될 경수로발전소대상의 자금보장과 건설을 위한 조치들을 추진시키며 1호 경수로발전소가 완공될 때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제공될 대용에너지보장과 필요한 자금조성과 그 이행을 위한 조치들을 추진  시키겠다는 것을 당신께 확인하는 바입니다.

이와 함께 나는 이 원자로대상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책임이 아닌 다른 이유들로 하여 완공되지 못하게 되는 경우 나의 모든 직권을 행사하여 미합중국 국회의 승인 밑에 미합중국이 직접 맡아 완공하도록 할 것입니다. 동시에 나는 대체에너지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책임이 아닌 다른 이유들로 하여 제공되지 못하게 되는 경우 나의 모든 직권을 행사하여 미합중국 국회의 승인 밑에 미합중국이 직접 맡아 제공하도록 할 것입니다. 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미합중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사이의 기본합의문에 지적된 정책들을 계속 이행해 나가는 한 이 행동방향을 견지할 것입니다.

경의를 표합니다.

미합중국 대통령 빌 클린턴 [1994년 10월 20일 위싱턴 백악관]


10월 20일 클린턴의 담보서한이 김정일에게 전달되고 다음날 북미기본합의서, 즉 제네바합의가 채택되었다. 클린턴은 북한을 굴복시키려 했지만 끝내 북한의 요구사항을 모두 수용하고 핵문제를 해결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제네바합의는 바로 북미관계 정상화로 이어지지 않았다.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고 서방진영에 북한이 곧 붕괴할 것이라는 3-3-3설이 유행하면서 클린턴 정부는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되었다. 미국은 제네바합의에 도장을 찍었지만 그 합의에 결과를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2003년까지 북한에 경수로 2기를 지어주기로 약속하였다. 아직 10년 이라는 긴 시간이 남아 있었고 2003년이 오기 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지구상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다. 미국은 김일성 주석의 사후 북한 체제는 매우 불안정해지고 급기야 동구사회주의국가들의 경우처럼 붕괴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급기야 94년부터 해마다 대홍수와 가뭄이 연이어 북한을 강타하면서 북한 정권 붕괴의 꿈은 실현되는 듯하였다. 북한이 붕괴되면 연연히 클린턴은 약속을 지킬 필요가 없다. 그걸 노렸던 것이었다.


제네바 합의 서명 후 6개월 안에 체결되어야 할 경수로제공계약은 1995년 12월에 되어서야 확정되었다. 1997년 7월에 가서야 경수로 부지 공사에 착수하고, 2000년 2월이 되어서야 경수로 발전소 본 공사가 시작되었다. 2003년 경수로를 인도하겠다는 약속은 이미 물 건너갔다. 아무리 빨라도 경수로 공사는 2007년에나 되어야 완공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클린턴 정부는 애초부터 제네바합의를 이행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3년만 참고 기다리면 94년 6월의 치욕을 모두 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3년이 지나도 북한은 붕괴하지 않았다. 그는 김정일을 잘 모르고 있었다.


미국은 또다시 시간에 쫓기고 있었다. 북한과 약속한 시한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미국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다.

또다시 미국은 책임을 북한에 떠넘길 무언가를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소위 “금창리 핵개발설”이다.

금창리 핵개발설은 1998년 8월초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지에 처음 등장하였다. 클린턴 정부는 금창리 핵개발설을 의도적으로 언론에 흘려 제네바합의 불이행의 책임을 북한에 떠넘기려 하였다. 그리고 이를 빌미로 북한을 공격할 명분을 쌓으려 하였다.


금창리 문제가 공론화되기 전인 98년 6월 초 미 공군 소속 4전투비행단은 플로리다에서 한국전쟁을 가정한 작전계획에 따라 장거리 핵투하 훈련을 벌였다. 이 작전에는 폭격기를 비롯해 F-16기와 공중조기경보기와 공중급유기 등 24대의 공군기가 참가하였다. 당시 미군은 이 훈련이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하였다.

클린턴은 북한과의 핵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북한의 대응은 미국의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98년 8월 31일 경악할 만한 뉴스가 전쟁준비에 한창이던 백악관과 펜타곤에 날아들었다. 북한이 인공위성을 발사한 것이다.


북한이 지난달 31일 북위 40.8도, 동경 129.7도에 위치한 무수단리에서 성공적으로 최초의 자국산 인공위성을 발사했다.

1998년 9월 4일 러시아 위성관측센터 대변인


백악관은 혼비백산하였다. 북한의 장거리 탄도미사일이 최소한 미국의 서부 해안 도시들을 공격할 수 있다는 사실이 명백히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클린던은 북한과 전쟁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1998년 8월에 있었던 북한의 대포동 1호 시험발사는 북한의 능력이 사거리 5,500 킬로미터의 대륙간 탄도미사일의 문턱을 넘어섰음을 과시하였다.

미 국가정보회의 의장 존 개넌


클린턴은 94년과 똑같이 행동하였다. 겉으로 전쟁 불사를 외치면서 조용히 북한과의 교섭을 준비했다. 미국은 북한의 인공위성 발사 이후 대북선제공격을 명문화한 자계 5027-98 등을 언론을 통해 흘리며 북한을 압박하였다. 하지만 이미 클린턴은 북한과의 대결에 지쳐 있었다. 더 이상 힘으로 북한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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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뚜기 18-05-06 19:13
   
길어서 안 읽음
     
누운사람 18-05-06 19:14
   
읽어야합니다.
촌팅이 18-05-06 19:32
   
출처링크 타고 들어가봤는데 없는 카페네요

시간적 순서는 맞는데 중간중간 작성자의 상상이 들어가
이를 근거로 당시 상황에 대한 평가까지 내려지네요

좋은 글은 아니네요
     
누운사람 18-05-06 19:39
   
그런가요...ㅠㅠ
종달새의비… 18-05-06 20:15
   
저 때 당시 일본은 자기들 머리 위를 지나서 태평양에 북한 미사일이 발사 됐을때에 경악을 했지..미국이 한참 있다 알려줘서 발사 시점도 몰라서 경악을 했지 2000 초 책이 발간 됐는데 뭐 내용은 강대국에 길들여지지 않는 북한 이라고
깁스 18-05-06 20:17
   
긴거 누가 읽는다고 최소 3줄 요악을 해주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