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1&mcate=M1004&nNewsNumb=20160821064&nidx=21065
― ‘여진’ 관련 부분은 어떻게 해석해야 되나요.
“여진(女眞) 관련 내용은 《이충무공전서》에는 없고 《난중일기초》에는 ‘여진입(女眞卄)’ ‘여진입(女眞卅)’으로 잘못되어 있습니다. 일본인들이 초서로 써진 공(共)자를 스무 입(卄), 서른 삽(卅)자로 오독한 것입니다. 홍기문은 여진족으로 보고 여진 20명으로 달리 해석했지만 이은상은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이 역시 제가 처음 바로잡은 것인데, 원본 글씨가 공(共)자라는 본인의 견해에 대해 많은 초서연구가가 의견을 함께했습니다.
《난중일기》에 보면, ‘인명 + 共(~와 함께하다)’ 형태의 문구가 자주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介)와 여진(女眞)을 여자 종으로 본 것입니다. 여진과 관련하여, 15세기 전남 해남 지방의 노비관계 문서를 보면, ‘여자 종 여진(婢女眞)’이란 이름이 보이고 다른 임진왜란 기록에도 ‘성주의 여자 종(城主婢) 여진(女眞)과 관기 등이 노래를 불렀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여진이 주로 여자 종의 이름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순신이 만난 여진도 여자 종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간혹 여진을 여진족 또는 남자로 보기도 하나 용례와 문헌에 비추어볼 때 이는 잘못된 견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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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춘향과 이도령은 실존 인물이었다”
http://www.sisapress.com/journal/articlePrint/116534
늙은 기녀인 여진(女眞)과 늙은 서리인 강경남이 맞으며 인사해 왔다. 날이 저물어 아전과 기생을 모두 물리치고 소동과 서리들과 더불어 광한루에 나와 앉았다. 흰 눈이 온 들을 덮으니 대숲이 온통 희도다. 거푸 소년 시절 일을 회상하고는 밤이 깊도록 능히 잠을 이루지 못했다“(원문 생략 · 고딕체 강조는 편집자).
이 구절은 이도령의 실제 인물로 추정되는 성이성 본인의 기록 ‘호남암행록’(계서선생일고>에 실려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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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당시 기생이름에 여진이란 이름이 흔했단 거죠
이순신을 너무 신격화 하다보니 여자관계도 흠결없는 인물로 그리고 싶은 모양인데
이순신도 사람이고 그가 사람이기에 영웅인 겁니다
그리고 당시 시대 상황에서 관기와 자는게 흠이 될수가 없죠
누차 말하지만 요즘 사상으로 과거를 보면 안되죠
그리고 난중일기에 여자와 잤단 기록이 조금 나오긴 하지만
7년간 기록에서 손에 꼽을 정돕니다
그 정도 기록 가지고 난잡하네 어쩌네 하는 것 역시 말도 안되죠